32. 나 아이 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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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나 아이 가졌어.
2022.11.19.
[어머니한테 말씀드렸어?]
태조에게 온 문자를 본 세경이 뒤로 쓱, 몸을 기울였다. 주방에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오고 있었다.
오후에 잡혀 있는 스케줄 때문에 제훈이 집에 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딱 점심때라 매니저는 정란이 차려준 김치찌개에 고슬고슬한 쌀밥으로 배를 채우는 중이었다.
[아직요. 오늘 저녁에 말씀드리려고요.]
답장을 찍어 보내자 곧바로 다른 메시지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내일 제주도로 내려가셔? 아님 며칠 더 머무르시나?]
[내일 내려가신대요. 가게를 너무 오래 비워둘 순 없다고.]
[자주 뵙질 못하니, 좀 더 머무시면 좋을 텐데. 어머니 오셨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음 좀 해달라고 해.]
[네, 그럴게…….]
“뭐 하니?”
“흐억.”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세경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액정을 짚은 손가락이 하필 전송 버튼 위라 쓰다만 메시지는 태조에게 그대로 전송되었다.
“아…….”
본의 아니게 반말을 해버렸네.
세경은 ‘-요’가 빠져버린 메시지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문자 좀 보내느라고. 왜?”
“너 정말 밥 안 먹을 거야?”
“바로 의상 피팅 하러 간다니까. 밥은 무슨 밥이야.”
“한 끼 먹는다고 체형이 바뀌니?”
“그건 아니지만. 마음가짐의 문제랄까?”
“어제는 그렇게 잘 먹어 놓구?”
딸이 밥을 굶는 게 영 못마땅한지 정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어제 그렇게 잘 먹어서 지금 굶는 거야.”
늦은 시각, 모녀는 식당에 들어가 각자 갈비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집에 돌아와선 감귤즙과 함께 정란이 가져온 쿠키를 먹은 뒤, 새벽 2시에 잠이 들었다.
“너 아침도 안 먹었잖아.”
“어제 저녁을 많이 먹어서 괜찮아. 게다가 스케줄 끝나면 엄마가 해준 갈비찜도 먹을 텐데. 무슨 걱정?”
“너 또 바빠진다니까. 엄마는 여기 왔을 때 한 끼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그러지. 아, 이따 스케줄 끝나고 오면 신 매니저도 같이 저녁 먹자고 할까?”
“아, 그건 좀…….”
저녁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신 매니저가 있으면 좀 곤란했다.
“내가 저녁에 엄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 지금 하면 안 돼?”
“응. 이렇게 흘리듯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저녁에 둘이 있을 때 차분한 분위기에서 했으면 하거든.”
정란이 세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따로 자리까지 만들려는 걸까.
“그래, 그럼. 저녁에는 둘이 오붓하게 먹자.”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곤란한 듯 난처해 보이는 세경의 표정에 그녀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세경이 스케줄을 하러 간 사이, 혼자 남은 정란은 청소기를 돌리고 상자에 담겨 있는 짐들을 정리해 두었다.
“자, 여기는 이쯤이면 된 거 같고.”
손을 툭툭 턴 정란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새 시간은 흘러 파랗던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 재료를 좀 다듬어야겠는걸.”
고기는 한번 삶아뒀으니. 이제 양념을 만들고 채소를 다듬어 한 번 더 푹 끓일 차례였다.
종종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간 정란은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내놓았다. 감자와 당근, 버섯, 홍고추와 파 등등. 모두 오전에 세경과 마트에 가서 사 온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걔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정란이 버섯 머리를 열십(十)자로 잘라내고, 조각낸 당근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썰어내며 중얼거렸다.
저녁에 따로 할 말이 있다던 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난감해 보이는 표정이 썩 좋은 화젯거리는 아닌 듯했다. 매니저가 있는 데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걸 보면, 가까운 사람에게도 말하기 힘들다는 소리일 텐데.
“설마, 누구한테 사기라도 당한 건…….”
부정적인 상황을 떠올리니 그간 보아왔던 안 좋은 기사들만 생각이 났다.
혹시 누가 투자하기 좋은 곳이라도 알려준 건가? 그래서 벌어놓은 돈을 다 날린 거라든가…….
“아얏.”
예리한 통증에 정란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칼날에 베인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어휴, 나도 참…….”
불길하게 칼엔 왜 베이고 이런담.
물을 튼 정란이 졸졸 흐르는 물줄기 아래로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키친 타월로 손가락을 꾹 눌렀지만 생각보다 깊게 베였는지 피는 금방 멈추지 않았다.
“반창고 같은 게 어디 없으려나.”
거실로 나온 정란은 서랍을 뒤적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아니면 바빠 그런가. 어디에도 상비약을 두는 구급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얘는 갑자기 아프면 어쩌려고.”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 약 좀 사둬야겠네.
거실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 정란이 침실로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대 서랍을 열어 보았지만 거기에서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피가 멎기를 좀 기다려볼까? 아니면 가까운 약국이라도 가봐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협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여기도 없네.”
서랍 문을 다시 밀어 넣던 정란의 손이 순간 멈칫거렸다. 밑에 뭐가 들어간 듯 책이 비스듬하게 떠 있었다.
“이게 뭐…….”
책을 들어 그 아래 있는 것을 꺼내 본 정란이 얼굴을 굳혔다.
< Mom's Diary >
“산모 수첩이 왜…….”
세경이 서랍에 있는 거지?
왠지 모를 불안함에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수첩을 펼치자 검은색 사진 하나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거라곤 검은색 바탕에 동그란 형체뿐이지만, 이게 무엇인지 자신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어떻게…….”
정란은 놀라 벌어진 입을 그대로 틀어막았다.
딸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초조한 제 속도 모르고 시간은 잘도 흐르고 있었다.
저녁에 할 말이 있다고 정란에게 미리 언질을 해두었으니, 더는 피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운을 떼야 정란의 충격이 그나마 덜 할까인데…….
“하아.”
차라리 대표님을 먼저 소개한 뒤에 임신 사실을 밝히는 게 더 나을까?
아니, 그러다 나중에 대표님과 관계가 틀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뭐가 더 나은 방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제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 건 모친이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란이 어떻게 반응할지 쉬이 예상이 가지 않았다.
심 원장은 직업이 의사다 보니 담담한 눈치였고, 태조의 반응은 ‘잡았다, 요놈!’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송 실장은 임신테스트기를 흘린 이후로 직접 보진 못했지만, 태조의 말을 빌리면 놀람과 걱정이 반반이라고 하였다.
모친의 반응도 송 실장의 반응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경 씨, 아직도 갈아입는 중이야? 뭐 안 맞는 거 있어요?”
“아뇨. 다 됐어요.”
거울을 보며 옷을 탁탁 턴 세경이 탈의실을 나왔다. 세경을 쭉 훑어본 스타일리스트가 매무새를 잡아주곤 세경의 옆에 섰다.
“어때요? 나는 지금껏 입어본 것 중에 이게 제일 예쁜데. 드라마 이미지랑도 잘 맞는 거 같아. 화려한 패턴 들어간 치마도 잘 어울리고.”
“네. 저두요.”
“그럼 이걸로 픽할까? 나중에 기자 간담회 때 입을 옷으로.”
“전 좋아요.”
“액세서리는 나중에 협찬 들어오는 거 보고 결정하자. 포스터 촬영할 때는 저걸로 입고.”
스타일리스트가 손짓한 곳엔 비비드한 컬러의 정장 한 벌이 걸려 있었다.
“음, 근데 저거 정말 괜찮은 거예요? 색이 너무 튀는 거 아닌가?”
“아까 사진 찍어서 보내니까 감독님은 좋다고 하던데? 아예 화려한 옷으로 남주를 눌러버리라고.”
“아니. 쥐꼬리만하지만 로맨스도 있는데, 남주를 눌러버리면 어떡해요.”
“감독님 말로는 드라마가 거의 세경 씨 원탑이라더만. 이 드라마의 묘미는 로맨스가 아니라 가족 같지 않은 가족들에게 엿먹이는 거랬어.”
아, 엿먹…….
감독님,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뭐, 감독님도 좋다고 하면 저도 상관없죠.”
“그럼 저 의상은 내가 촬영하는 날 스튜디오로 가져갈게.”
“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세경이 인사를 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사무실을 나와 밴에 오르자 제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바로 집에 가시는 거죠?”
“응.”
대답을 하면서도 세경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어댔다. 머릿속으론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면서.
“오늘은 차도 안 막히네.”
턱을 괸 세경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원활한 도로 상황에 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집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세요, 누나. 내일 봬요.”
“응. 너도 조심히 가.”
세경은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 나 왔어.”
문을 열자 훈훈한 공기와 매콤달콤한 냄새가 세경을 맞이했다. 주방으로 들어가자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정란의 뒷모습이 보였다.
“뭐야. 또 뭘 하는 건데?”
“남은 재료로 반찬 좀 만들었어. 씻고 나와. 음식 거의 다 됐으니까.”
“응. 근데 여긴 왜 이래? 다쳤어?”
세경이 반창고를 붙인 정란의 엄지손가락을 가리켰다.
“아까 칼질하다가 살짝. 약국 간 김에 소화제랑 해열제 같은 상비약도 몇 개 사다 놨어. 너는 갑자기 아프면 어쩌려고 집에 구급함도 없니?”
“아, 그래서 약국에 갔다 온 거야?”
“그래. 너 여기서 뭉그적거리지 말고 얼른 가서 씻고 와. 배고플 텐데.”
“알았어. 금방 씻고 나올게.”
욕실로 들어간 세경이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서기 전, 그녀는 협탁 서랍을 한번 열어보았다.
산모 수첩은 여전히 책 아래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건, 엄마한테 임신 사실을 털어놓은 후에.”
세경이 책을 톡톡 두드리고 다시 서랍을 닫았다. 식탁 앞에 앉자 돼지 갈비찜을 중심으로 각종 반찬들이 맛깔스럽게 담긴 것이 보였다.
“와, 우리 최 여사님 솜씨 발휘 좀 하셨네.”
세경이 젓가락으로 감자 조각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달짝지근한 반찬에 따끈따끈한 쌀밥까지 들어가자 식욕이 마구 돌기 시작했다.
“엄마는 안 먹어?”
정신없이 수저질을 하던 세경이 가만히 저를 보고 있는 정란에게 물었다.
“먹어. 너 먹는 거부터 보고.”
“나 먹는 건 어제도 봤으면서. 엄마, 맥주 한잔하실래요?”
정란의 답도 듣지 않고 세경이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왔다. 그녀는 딸이 주는 맥주캔을 따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넌 뭐 안 마셔도 돼?”
“응. 난 괜찮아.”
세경은 입에 문 젓가락을 우물거렸다.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은데,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엄마한테 할 말 있다며.”
“으응.”
“근데 왜 말은 안 하고 술부터 먹여? 뭐, 맨정신으론 못 들을 말인가 보지?”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솔직히 최 여사보단 자신이 더 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
세경은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엄마가 무슨 반응을 보여도 당황하지 말아야지.
젓가락을 내려놓은 세경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정란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아이 가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