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요즘 회사 대표는 다 이런가? (33/100)


33. 요즘 회사 대표는 다 이런가?
2022.11.23.



 
정란은 말이 없었다.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이지도, 울지도 않았다.


“…….”

“…….”

서로 간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떼지 못해 침묵은 길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니 세경은 좀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예상과 모친의 반응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울거나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거나.

못해도 저 중에 하나의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란은 깊은 숲속에 자리한 호수처럼 차분한 눈으로 세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못 들으신 걸까? 아니면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오는 거라든가.’

평온했던 정란의 일상에, 딸의 임신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일 터였다.

놀랄 만도 하겠지.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다고 눈앞의 상황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엄마, 나는…….”

세경이 배를 감싸 쥔 채 입을 열자 동시에 정란도 굳게 닫힌 입을 뗐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응?”

“너 아이 가졌다며. 나한테 말한다는 건 낳을 생각이라는 거지?”

잠시 멍해 있던 세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정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게…… 다야?”

“뭐가?”

“나한테 할 말이 그게 다냐고.”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정란의 반문에 말문이 막힌 건 오히려 세경이었다.


“아니.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거나. 뭐 이런 반응은 없어?”

“엄만 충분히 속상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어디가?

세경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 치곤 정란의 표정은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었다.


“하나도 안 그래 보이는데?”

“이런 게 다 연륜이지. 네 엄마,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었거든?”

“…….”

“다른 건 다 나 닮아도, 아이 먼저 가지는 건 닮지 않길 바랐는데.”

정란의 입가에 아주 잠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는 넌, 나한테 할 말은 그게 다니?”

“뭐 궁금한 거 있어? 아, 아이는 지금 8주 좀 넘었고…….”

“아이야 잘 자라고 있겠지.”

아까 초음파 사진도 봤으니까.


“아이를 너 혼자 만들어? 엄마는 너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는데.”

“그게…….”

세경이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좀 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던 정란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설마 모르는 거야?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맥주캔을 쥔 정란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세경이 다급하게 부정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긴 한데……. 지금은 엄마한테 좀 소개해주기 곤란해.”

“왜? 그 사람이 책임지기 싫대? 아이는 같이 만들어 놓고?”

“엄마!”

얼굴을 붉힌 세경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무리 친구처럼 친근한 모녀 사이라지만 이런 쪽의 이야기는 처음이라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얘는. 귀청 떨어지겠다. 그러니까 왜 소개를 안 해주냐고. 그 곤란한 사정은 대체 뭔데?”

“음, 순서가 좀…….”

“순서?”

되묻는 말에 세경이 모친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사귀기 전에 아이부터 생겼거든.”

“…….”

정란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임신 사실보다 이 말이 더 충격인 듯 그녀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호, 혹시 처음 만난 사람하고 잔 거니? 워, 원나잇 뭐 그런 거야?”

“그건 아니야. 알고 지낸 지는 꽤 됐어. 나는 그 사람 오랫동안 좋아했고.”

“근데 왜 너는 고백도 안 하고…….”

“고백할 타이밍이 좀 아니었달까. 이런저런 사정이 좀 있었어.”

머쓱하게 웃은 세경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반면 정란은 심란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사람은 뭐라니? 너 임신한 건 알고 있어?”

“응. 알고 있어. 나한테 결혼하자고도 했고.”

“결혼도? 그런 말도 나왔는데 왜 엄마한테 소개를 안 해?”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에겐 그 사람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정란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거절했거든.”

“왜?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그 사람 아이까지 가졌는데 왜 거절을 해?”

“나는 좋아하지만, 그 사람은 날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

“아이 때문에, 그 사람이 책임감에 얽매여 나랑 결혼하는 건 싫었거든.”

정란은 꾹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세경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이구나.’

사랑도 없이 책임감만 가지고 한 결혼.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사람을 병들게 하는지 직접 경험한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경은 그 상황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고.

애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으니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채(負債)처럼 짊어지던 책임감은 희미해졌고, 남편은 세경이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되어 바람을 피웠다.

정란이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남편은 다른 여자를 배 불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어린 세경을 안고, 눈물로 지새웠던 그 수많은 밤들을 떠올리면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 사람과 이혼을 한 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게 한 세경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무튼, 네 말을 정리하면 결혼은 모르겠지만 아이 아빠하고는 지금 만나고 있다는 소리지?”

“응.”

“별로니, 그 사람? 엄마에게 소개해주지 못할 만큼 믿음직하지 못해?”

“아니.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멋있고 나도 많이 챙겨주고. 결혼이 싫다니까 그럼 연애부터 하자고 한 사람인걸.”

말만 해도 좋은지 배시시 웃는 얼굴에 홍조가 지어졌다.

괘씸한 건 둘째치고, 딸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더더욱 아이 아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래, 뭐, 앞으로의 일이야 어련히 네가 잘할까. 하지만 그건 알아둬. 아이 키우는 거, 그거 보통 일 아니야.”

“응. 알아, 엄마.”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고백한 걸로 큰 짐을 덜었다 생각한 걸까. 세경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방긋 웃었다.


“알긴 뭘 알아. 아직 키워보지도 않은 게.”

이제 갈 길이 구만린데.

정란이 가소롭다는 듯 흥, 코웃음을 쳤다.

걱정되는 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일은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저보단 상황이 좀 낫지 않나.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이 이 상황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니.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태명도 못 들었네. 아이 태명은 뭐야?”

“앙꼬.”

“앙꼬? 그건 무슨 뜻이야?”

“앙증맞은 꼬마 고양이라고.”

“웬 고양이? 태명은 네가 지은 거야?”

“아니. 그 사람이 지었어. 나는 앙큼한 고양이고, 아기는 앙증맞은 꼬마 고양이라고…….”

우리 딸이 고양이상이었나?

정란이 세경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고 있을 때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방문객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응?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세경이 거실로 향했다. 그녀는 인터폰 화면에 뜬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세경아, 누가 왔니?”

“어? 아, 그게…….”

세경은 당황함에 말을 버벅거렸다. 그녀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정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집을 찾아온 사람은, 모친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대표님이 오셨어.”

……진태조였다.

***



“어머나, 이게 어쩐 일이래요?”

두 손을 맞잡은 정란이 환한 미소로 태조를 맞이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방문이었다. 딸에게 한번 보고 싶다 이야기는 해봤지만, 바빠서 보기 힘들다는 사람이었는데.


“세경 씨한테 어머님이 제주도에서 올라오셨다는 말을 들어서요. 전에 통화는 했지만 직접 뵌 적은 없어서, 인사도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인사를 한 태조가 선물로 가지고 온 과일 바구니를 정란에게 건넸다.


“바쁘실 텐데 일부러 이렇게 찾아오시고. 감사해요. 아, 그보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그럼 들어와서 우리랑 같이 먹어요. 내가 제주도에서 고기를 좀 가지고 왔거든요.”

어서 들어오라 손짓한 정란이 과일 바구니를 품에 안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태조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가려 하자, 세경이 그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뭐예요. 연락도 없이.”

“연락하면 오지 말라고 할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오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세경이 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어머니하고 이야기했어?”

“네. 하지만 아이 아버지가 대표님인 건 모르세요.”

“…….”

태조의 눈썹이 작게 들썩거렸다. 그의 침묵을 불안하게 느낀 세경이 잡고 있는 소매 끝을 살살 흔들었다.


 


“그러니까, 아직 엄마한테 말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연신 당부한 세경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조가 고뇌의 한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그보다 어머니 반응은 어땠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요. 그래서 좀 의문인…….”

“대표님, 뭐 하세요? 빨리 오세요.”

정란이 현관 앞에 서 있는 태조를 재촉하듯 불렀다. 세경은 모친에게 들킬세라 태조를 잡고 있던 손을 재빨리 거둬들였다.


“그나저나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목살도 있는데 그것도 좀 구울까요?”

“아닙니다.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여기 차려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태조가 식탁에 앉자 정란이 꽉꽉 눌러 담은 밥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갈비찜도 따로 접시에 덜어준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태조의 반응을 살폈다.


“어때요? 입엔 잘 맞아요?”

“네.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대표님도 맥주 한잔 드릴까요?”

“엄마, 대표님 차도 가지고 왔을 텐데…….”

세경이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태조는 정란의 앞에 놓인 맥주캔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어머님 혼자 드신 거 같은데, 같이 한잔하시죠. 차는 여기에 두고 가도 됩니다. 집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거든요.”

“그래도 되나요? 괜히 번거롭게 하는 거 아닌지 몰라.”

“걷기 딱 좋은 거리라 괜찮습니다.”

“그럼 딱 한 잔만 해요. 많이는 말고.”

정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경이 주먹으로 태조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엄마가 들을까 뭐라 말은 하지 못하고 그녀는 눈만 부릅뜬 채 태조를 바라보았다.


“…….”

진짜, 아까부터 왜 이러는 거야. 귀엽게.

태조가 허벅지 위에 올라온 세경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대표님, 받으세요.”

그 사이 컵과 맥주를 가져온 정란이 태조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태조도 정란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세경이가 회사 옮기고 나서 일이 잘 풀리는 거 같아요. 같이 일하는 분도, 선배님들도 다 좋다고 하고. 걱정 많이 했는데. 감사해요, 대표님.”

“아닙니다. 세경 씨가 다 잘해서 그러죠.”

잔을 든 태조가 살짝 몸을 틀었다. 술잔을 기울인 정란은 앞에 앉은 태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술을 넘길 때마다 톡, 볼가진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날렵하게 뻗은 턱선이며 반들반들한 피부, 선이 짙은 이목구비까지.

딸에게 우리 회사 대표님이 웬만한 연예인 보다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과장된 말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렇게 딸과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 다 예쁘고 멋있어서 참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하고.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딸의 애인이 들으면 기분 나빠하겠구나.

괜히 미안해진 정란이 입을 샐쭉거리며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였다.

순간 왠지 모를 묘한 기분에 휩싸인 그녀가 눈썹을 들썩거렸다.

세경이 맥주캔을 만지작거리자, 태조가 자연스럽게 그걸 가져가 남은 술을 제 잔에 따르고 있었다.


‘……음?’

그러고 보니 진 대표가 세경에게 따로 술을 권하지는 않았다. 마치, 세경이 지금 술을 못 마신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아, 내일 제주도로 내려가신다고 들었는데.”

“네. 더 있고 싶은데 가게를 오래 비워둘 순 없어서요.”

정란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생각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세경 씨는 내일도 스케줄이 있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공항까지 가시려고요?”

“올 때처럼 택시 타고 가면 돼요. 시간 맞으면 공항버스 타도되고.”

“앞으론 서울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 주세요. 세경 씨가 스케줄 상 나갈 수 없으면 저희 쪽에서 마중 나갈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아니에요. 다들 바쁠 텐데 뭘 그렇게까지…….”

정란이 그건 부담스럽다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런 거에 굴할 태조가 아니었다.


“내일은 저희 쪽에서 공항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시간이 비는 사람을 보낼 테니 거절하지 마시고요.”

요즘 회사 대표는 다 이런가?

비교할 데라곤 세경이 처음 계약한 소속사밖에 없으니. 이게 보통인지, 아니면 전의 소속사가 진짜 썩어빠진 곳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저렇게까지 챙겨주는데 계속 거절하기도 좀 그렇고…….


“그럼, 이번에만 신세 질게요.”

호의를 받아들인 정란이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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