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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혹시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인가요? (34/100)


34. 혹시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인가요?
2022.11.26.



“오늘 저녁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태조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세경과 정란은 현관까지 따라 나와 그를 배웅했다.


“아니에요. 우리 먹는 거에 밥공기 하나만 더한 건데. 대접했다 하기도 민망하네요. 대표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음식을 더 푸짐하게 준비할걸.”

“충분히 푸짐했습니다. 음식도 맛있었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다른 곳에서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술을 드셔서 차를 못 끌고 가실 텐데. 불편해서 어쩌죠?”

“괜찮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면 됩니다.”

“어휴, 제가 괜히 술을 권한 것 같기도 하고…….”

슬쩍 고개를 돌린 정란이 옆에서 가만히 있는 딸의 허리를 쿡 찔렀다. 세경이 놀라 돌아보자 정란은 같이 나가 태조를 배웅하라는 듯 눈치를 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 저랑 같이 나가요.”

착실하게 모친의 명을 따른 세경이 태조와 현관을 나섰다.

따라 나오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태조는 정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뿐 그를 쫓아오는 세경을 말리지 않았다.


“내일 정말 누구 보내주실 거예요?”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 일정 좀 확인해 보고.”

“개인적인 일은 회사 사람들한테 시키지 마세요. 그분들도 자기 할 일이 있는데.”

“억지로 안 시켜. 본인이 하고 싶다면 가라고 할 거야.”

그러니까, 그걸 대표님이 물어보시면 안 된다구요. 대표님 말을 거절할 직원이 어디 있다고.

세경이 뚱하게 입술을 내밀자 태조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가 울진 않으셨나 봐?”

“네. 생각보다 강하시더라고요. 음, 오히려 다른 거에 충격을 받으셨달까?”

“다른 거?”

“네.”

태조가 그게 뭐냐고 묻자, 세경이 그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사귀기 전에 아이가 먼저 생겼다고.”

“…….”

아, 어머니한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좀 뒤로 미뤄야 하나.


“그냥 지금 다시 들어가서 말씀드리는 건 어때? 내가 아이 아버지라고.”

“왜요?”

“나중에 말씀드리면 내 이미지가 더 바닥으로 처박힐 것 같아서.”

“그럴 리가요. 방금 봤잖아요, 엄마가 대표님 좋게 보는 거.”

“그러니까 지금이 적기라고. 조금이라도 이미지가 좋을 때 말씀드려야지.”

태조가 다시 집에 들어가려 몸을 틀었다. 그러자 세경이 그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안 돼요, 지금은.”

“…….”

“나중에. 나중에, 내가 말할게요.”

“나중, 언제?”

태조의 물음에 세경이 다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음, 아이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지금은 아닌가?”

“적어도 12주는 넘기고 이야기해요.”

숫제 사정하는 목소리였다. 세경의 입에서 정확한 시기가 언급되자 태조가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렸다.


“그래. 그럼 12주까진 잠자코 있을게.”

태조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가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세경의 몸을 끌어안고 둥근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입에다 하고 싶은데.”

“…….”

“술을 마셔서.”

속삭이듯 하는 말에 괜히 가슴이 술렁거렸다. 그때 타이밍 좋게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엔 아무도 없었다. 태조는 아쉬운 듯 품에서 세경을 떼어냈다.


“들어가. 내일 연락할게.”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불쑥 손을 뻗어 태조의 재킷을 잡아당겼다.


“음?”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태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무슨 할 말…….”

태조가 몸을 돌리자, 바짝 다가온 세경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살짝 당겨진 힘에 그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왔다. 동시에 발끝을 든 세경의 얼굴이 그와 가까워졌다.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태조의 입술에 비벼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키스에 놀란 태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다 이내 여유를 되찾은 듯 그가 세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으음.”

짙어진 입맞춤에 세경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태조가 고개를 기울여 세경의 입술을 다시금 집어삼켰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부딪치길 몇 번.

그는 숨이 막혀 세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쯤 입술을 뗐다.


“하아.”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달뜬 숨을 뱉어냈다. 태조는 그녀의 입술을 쓸며 세경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딪쳤다.


“진짜, 이 앙큼한 고양이가.”

“…….”

“왜 술 먹을 때만 이렇게 덮치지?”

“입술에다 하고 싶다면서요.”

세경의 대답에 태조가 웃었다.


“게다가 지금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머니가 안에 계셔서 참고 있는데. 이렇게 불붙이면 어쩌냐는 소리야.”

태조가 세경의 몸을 제게 밀착시켰다. 뜨거워진 체온만큼 단단해진 몸이 옷 너머로 느껴졌다.

그가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열며 세경의 손을 붙잡았다.

태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자신을 끌어당기자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내려가요?”

“나랑 같이 바람 좀 쐬고 들어가. 그 얼굴로 들어가면 어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하실 테니.”

얼굴? 내 얼굴이 뭐 어때서…….

뺨을 감싼 세경이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

반들반들한 입술과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두 뺨.

영락없이 바깥에서 뭔 일이 있었던 얼굴이었다.

***

다음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제주도로 내려가는 모친을 배웅하러 나온 세경은 집 앞에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곤 눈을 끔뻑거렸다.

태조가 오늘 어머니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사람을 보낸다고 하였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인사라도 하려고 했더니. 설마, 그 사람이…….


“혹시 대표님이 절 데려다주시는 건가요?”

“네.”

……태조일 줄이야.


“어떻게 대표님이 오셨어요? 오늘 출근 안 하세요?”

정란도 태조가 올 줄은 몰랐는지 꽤나 놀란 눈치였다.

모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세경에게 향했다. 어떻게 너희 회사 대표님이 온 거냐고 묻는 눈엔 ‘저분, 바쁜 분 아니었니?’라는 물음도 함께 담겨 있었다.


“어제 어머님께 맛있는 음식도 대접받았고 차도 여기에 두고 가서요. 오후에 출근하기로 했으니 겸사겸사 제가 공항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오히려 이쪽에서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네요.”

“폐는요. 어차피 저도 나가는 길인데. 짐은 따로 없으신가요?”

“네. 이게 전부예요.”

정란이 자신의 가방과 쇼핑백 하나를 들어 보였다. 제주도에서 가지고 온 것은 다 세경에게 주었으니 가져갈 건 따로 없었다.


“타시죠. 세경 씨, 신 매니저는?”

“저쪽에서 차 돌려서 올 거예요.”

세경이 손가락으로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한 넘버를 단 검은색 밴이 태조의 차 뒤쪽에 멈춰 섰다.


“어? 대표님, 안녕하세요.”

운전석에서 내린 제훈이 태조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의 차 조수석에 자리한 정란을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오늘 제주도로 가신다고 하셨죠? 음? 근데 왜 대표님이…….”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 싶었는지 제훈이 참새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내가 집이 이 근처잖아. 세경 씨 스케줄도 있다고 하니까, 내가 회사 가기 전에 공항까지 어머니 좀 모셔다드리려고.”

“아아, 그러시구나아…….”

말끝을 늘인 제훈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대표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니 그렇다 대답은 하는데 완전히 납득한 눈치는 아니었다.


“가볼게. 세경 씨도 얼른 스케줄 가고.”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대표님. 엄마도 제주도 도착하면 연락하고.”

“알았어. 나 걱정 말고 일이나 잘해.”

정란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경이 불안한 마음에 태조를 쳐다보자 그가 눈을 잠깐 맞추곤 차에 올랐다.


“누나, 우리도 가요.”

“그래.”

밴으로 걸어가던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멀어지는 태조의 차 뒤꽁무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좀 불안한 느낌이 드는데…….


“설마, 대표님이 말하지는 않겠지?”

 

 

***

어색한 적막을 깨기 위해 틀어놓은 라디오에선 사연을 읽는 디제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는 한남대교를 지나 올림픽대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란은 태조가 사 온 커피를 마시며 옆자리를 힐끗거렸다.

뉘 집 아들인지, 인물 하나는 참 훤칠하다 싶었다. 앞에서 봤을 때도 잘생겼다 싶었는데 옆 모습 또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 정란의 시선을 느꼈는지 입술을 끌어올린 태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금방 내려가셔서 아쉽네요. 조금 더 계셨으면 가까운 곳으로 바람이라도 쐬러 가셨을 텐데.”

“세경이가 바쁘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서울 와서 제가 하고 싶은 건 다 한 것 같네요.”

“어떤 걸 하고 싶으셨는데요?”

“세경이가 먹고 싶다는 음식도 해주고 이삿짐도 정리해주고. 대표님도 뵙고 싶었거든요. 세경이가 바쁘셔서 못 뵐 것 같다고 했는데 집으로 오실 줄은…….”

말끝을 흐린 정란이 태조를 쳐다보았다.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서 간질간질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빨대를 쪽 빨았다.


“그랬습니까? 어머님 뵐 시간 정도는 낼 수 있는데. 근데 왜 저를…….”

“매번 명절 때마다 선물도 보내주셔서 감사하단 말도 드리고 싶었고, 세경이가 대표님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어떤 이야기를 말입니까?”

“대표님이 아주 잘생겼다고.”

크흠.

주먹으로 입을 가린 태조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다잡으려 했지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까진 숨기지 못했다.


“세경 씨가 별 이야기를 다…….”

“뭐, 거짓말은 아니던데요.”

정란이 엷게 웃으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매끈한 컵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세경이가 임신한 거 알고 계시죠?”

“…….”

태조가 정란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꺼냈나 싶어서였다.


“예.”

짧게 답을 한 태조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세경 씨가 말했습니까? 저도 알고 있다고?”

“네. 어제 물어보니까 대표님도 알고 계신다 하더라고요.”

정란이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태조를 보내고 침대에 누웠을 때, 세경은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정란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보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세경을 가졌을 때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랬고.

제게는 마냥 어리게만 느껴지던 딸이 저 작은 생명을 품고 있다는 기특함.

그리고 앞으로 있을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만감이 교차하였다.


“세경 씨가 그 외에 다른 말은 안 하던가요?”

“아이 아빠하고 만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소개는 나중에 해준다면서.”

태조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심각해 보이는 정란의 표정을 살피며 얼굴을 굳혔다.

지금 이야기해도 괜찮으려나.

일부러 시간까지 내 세경의 모친을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건, 그녀에게 자신이 아이 아버지라는 걸 고백하기 위함이었다.


“저…….”

태조가 정란에게 말할 타이밍을 노리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먼저 선수를 친 정란이 태조에게 물었다.


“혹시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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