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좋네, 아주 좋아. (35/100)


35. 좋네, 아주 좋아.
2022.11.30.



“…….”

순간 차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사연을 읽던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도 방송 사고가 난 것처럼 몇 초간 들리지 않았다.

태조는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으나, 그는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도대체 어디서 알아챈 걸까.’

태조는 조금 전 정란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아이 아버지라 눈치챌 만큼 의심스러운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세경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외에 다른 말은 한 게 없냐고 물었을 뿐인데.

어머니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걸 뒤로 미루려 했던 세경이었으니,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세경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로 자신을 떠본 걸까?

이런저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던 태조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픽 웃고 말았다.

어차피 정란에게 말하려 했던 거 아니었나.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게 뭐가 중요하다고.


“맞습니다.”

“…….”

“세경 씨 아이, 제 아이이기도 합니다.”

 

 
긴장한 듯 핸들을 고쳐 쥔 태조가 힐끗 옆을 내려다보았다.

최 여사가 들고 있는 컵이 살짝 우그러지고 있었다. 태조는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실은 어제 식사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알아요. 세경이가 말린 거죠?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고.”

듣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 정란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사실 어제 세경이 당장 아이 아빠를 소개해 주기 곤란하다고 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이미 이야기가 다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다만 아이 아빠가 회사 대표님인 건 예상 밖이었지만.


“세경 씨가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머니가 자기 임신 소식을 듣고 울지 않을까 해서요.”

“…….”

“많이 놀라셨죠?”

“처음에는요.”

새삼 어제 일이 떠오른 듯 정란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세경이가 말해서 안 거 아니에요.”

“그럼 언제…….”

정란의 말에 당황한 태조가 눈을 크게 떴다.


“저녁 먹기 몇 시간 전에 우연히 발견했어요. 세경이 산모 수첩을.”

“…….”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했어요. 아니면 얘가 이번에 무슨 배역을 맡아서 이걸 가지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고. 근데 아이 초음파 사진을 보는 순간 확신이 서더라고요. 아, 이게 정말 세경이 거구나 하고.”

담담히 말하고 있으나, 가라앉은 정란의 목소리에선 당시 느꼈던 착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짜 그땐 머리가 멍해지더라고요. 처음엔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어요. 심장도 터질 것처럼 뛰고.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태조는 라디오 볼륨을 최소로 낮췄다. 차에는 정란의 목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생각은 많아지는데 정리는 안 되고. 그래서 집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어요. 그렇게 머리를 좀 식히니까, 그제야 내가 할 일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그게 뭐였습니까?”

“내 딸을 믿고 기다리는 거요.”

정란이 싱긋 웃었다. 막혔던 일이 풀린 것 같은 개운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모른 척했어요. 세경이가 말할 때까지. 그래서 지금도 몰라요, 걔는. 내가 먼저 산모 수첩을 발견한 것도.”

그러니 이건 대표님도 모른 척하라고, 정란이 속삭였다.


“세경이가 내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아이도 아니고. 걔도 어른이니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하겠죠. 그 결정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모든 일에 후회는 남으니까. 중요한 건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냐 하는 거죠.”

“…….”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은 그 애 인생을 참견하는 게 아니라 힘들 때 돌아와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다행히 나는 경험도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여유도 있으니까. 음, 다만…….”

달변가처럼 술술 내뱉던 정란이 태조의 눈치를 봤다.


“아이 아빠가 대표님일 줄은. 그리고 제 딸의 대담함에 놀랐달까…….”

새경을 물고 늘어지고 있으나 요지는 그거였다. 속도위반.


“그…… 면목 없습니다.”

“운전은 참 점잖으신데. 의외로 스피드를 즐기시나 봐요?”

뼈 있는 말을 던진 정란이 생글생글 웃었다.

태조가 마음에 들긴 하나 괘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애든 결혼이든, 먼저 좀 하고 나서 아이도 가지면 좀 좋아?

앞으로 세경이 마음고생 할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심술 축에도 끼지 못했다.


“세경이한테 결혼하자고 하셨다면서요?”

“네. 거절당했지만요.”

그게 뭐 자랑이라고.

태조가 당당히 말하며 웃자, 정란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세경이가 뭐라고 하며 거절하던가요?”

“책임감 때문에 결혼하는 건 싫다더군요.”

“…….”

“아직 제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 그렇겠죠. 그래서 노력 중입니다.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려고.”

정란은 심란한 얼굴로 태조를 바라보았다.


‘나는 좋아하지만, 그 사람은 날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아이 때문에, 그 사람이 책임감에 얽매여 나랑 결혼하는 건 싫었거든.’

 
세경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음에도 딸이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게 꼭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 일이라곤 하나 세경에겐 자신의 이혼이 마음속 상처로 남았을 거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철이 들어 내색하지 않았을 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놀러 가는 아이들이 내심 얼마나 부러웠을까.


“세경이가 대표님을 믿지 못해 그랬던 건 아닐 거예요.”

그래서 정란은 세경이 자신의 힘든 모습을 기억하고 제게 온 사랑을 놓치는 걸 원치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 저와 달리 도란도란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어쩌면 세경이가 대표님과의 결혼을 고민하는 건 나 때문일지 몰라요.”

태조가 작게 눈을 들썩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이었다. 어제 본 두 사람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네요?”

“네.”

솔직한 태조의 대답에 정란이 엷게 웃었다.


“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그냥 흘려들어요. 세경이가 대표님께 하지 않았을 말이라 그냥 내가 떠드는 거니까.”

“그러겠습니다.”

정면을 본 태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실은 내가 세경이랑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아이를 밴 상태에서 결혼을 했거든요.”

“…….”

“결혼 생활의 끝이 좋지 못했죠.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더 우선한 결혼이라서 그런 걸까. 세경이 어렸을 때 아이 아빠랑 헤어지고 나 혼자 세경이를 키웠어요. 옆에서 내가 힘든 걸 다 지켜본 아이니, 결혼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정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내가 왜 이 말을 해주는지 알아요?”

“세경 씨랑 결혼하려면 책임감 말고도 애정까지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 주신 거 아닙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대표님이 우리 딸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길 바라서 그래요. 세경이가 나를 보고 괜한 두려움에 좋아하는 사람을 놓치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요.”

세경의 앞에서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정란이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괜히 코끝을 긁적거렸다.


“어머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오해하지 않고 있어요. 당연히 두려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럼 다행이고요.”

“한데,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뭔데요?”

태조가 차선을 변경했다. 차는 목적지인 김포 공항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언제 아신 겁니까? 제가 아이 아버지라는 걸.”

“어, 음, 그게…….”

정란이 말하기 곤란한 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같이 식사할 때까지만 해도 대표님이 세경일 좀 챙긴다 싶긴 했는데.”

“…….”

“어제 봐버렸거든요. 세경이가 하도 안 들어와서 보니까. 두 사람이 그, 엘리베이터 앞에서…….”

입 맞추는 걸.

깍지를 낀 정란이 검지를 톡톡 맞부딪쳤다. 당황한 태조가 입가를 가린 채 헛기침을 했다.


“그, 저희가 매번 그러는 건 아닌…….”

“그렇겠죠. 매번 그랬으면 벌써 소문이 났겠지.”

“…….”

“두 사람 사이가 좋은 거 같아서 보기 좋긴 한데. 조심해요,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충고 섞인 정란의 말에 태조가 웃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여기 게이트 앞에서 내려줘요.”

“게이트 앞이요? 잠깐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게…….”

“바쁘실 텐데 곧장 가세요. 배웅은 여기까지만 해주셔도 돼요.”

태조가 잠시 고민하다 출입구 앞에 차를 세웠다. 정란이 가방을 챙기다 다시금 당부하듯 태조를 쳐다보았다.


“참, 오늘 차에서 했던 이야기는 세경이한테 비밀이에요. 계속 모른 척할 테니 대표님도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겠습니다.”

“세경이 혼자 두고 가는 게 영 불안했는데. 그래도 옆에 대표님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싱긋 웃은 정란이 차에서 내렸다. 태조도 운전석에서 내려 정란을 바라보았다.


“세경 씨는 걱정 마십시오. 곁에서 잘 보살필 테니.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래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란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 태조가 다시 차에 올랐다.

그녀는 멀어지는 태조의 차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멋있고, 나도 많이 챙겨주고.’

 


“좋네, 아주 좋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정란이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


 


“으음.”

세경은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제주도에 도착한 정란과 지금 막 통화를 마친 터였다.

태조는 김포 공항까지 정란을 데려다주었고 비행기도 연착 없이 잘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뭐지?”

도대체 뭘까, 형용할 수 없이 찝찝한 이 기분은.

제주도에 도착한 정란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오히려 제 임신 소식에 엄마가 울면 어쩌나 걱정했던 과거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리고 가장 궁금해할 세경의 애인에 대해서도 별로 캐묻지 않았다. 나중에 때가 되면 소개를 해주겠다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 어떤 사람인지 물어볼 법했는데.

게다가 가장 이상했던 건, 통화 내내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태조를 칭찬하던 정란의 태도였다.

어쩜 앞에서 봐도 멋있더니 옆에서 봐도 멋지더라. 얼마나 정중하고 친절하던지 너네 대표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더라. 등등.

통화 내용의 반이 태조에 관한 이야기였던 터라 세경은 살짝 의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진 대표가 슬쩍 정란에게 아이 아빠란 말을 흘린 건 아닌지.

딩동!

초인종 소리에 세경이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태조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는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오셨어요.”

“음,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왔는데. 대표님은요?”

“나도 우현이랑 먹었어.”

늦게 출근을 한 탓인지 태조의 퇴근이 평소보다 늦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어머니는? 잘 도착하셨대?”

“네. 근데 엄마한테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이야기? 어떤 거?”

“대표님이 아이 아빠라든가 하는…….”

세경이 말끝을 흐리며 태조를 살폈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왜? 어머님이 뭐라고 하셔?”

진짠가?

세경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마치, 저 말의 진의를 가늠하는 듯이.


“아니, 엄마가 대표님 칭찬을 많이 하셔서요.”

“내가 마음에 드셨나 보지. 내가 어디 가서 빠지는 타입은 아니잖아.”

“…….”

세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지?


“앙꼬 초음파 사진 보고 싶다 하셨죠? 기다리세요, 가지고 올게요.”

세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태조는 소파에 앉아 그런 세경을 보며 웃었다.


“떠보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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