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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너 만나는 사람 있니? (36/100)


36. 너 만나는 사람 있니?
2022.12.03.



 
블라인드가 올라간 창을 타고 봄볕이 밀려들었다.

외부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복도를 걷는 태조의 가슴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슈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네, 어머니.”

- 너 요즘도 바쁘니? 왜 도통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전화를 받자마자 마혜영 여사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 저녁 식사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서였다. 태조는 지나가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항상 바쁘죠. 저희가 성수기 비성수기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외부미팅 나갔다가 들어오는 중이에요.”

- 일은 너 혼자 하니? 아무튼, 너 예령이한테 뭐 들은 거 없어?

“무슨…….”

이야기를 말하시는 거냐 물으려던 태조는 저번에 예령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전화를 해서는 여자친구가 없냐고 아주 저를 달달 볶았었지. 그 이야기의 연장선인가 싶어 태조가 구겨진 미간을 긁적였다.


“여자 소개해 준다는 거요? 그거라면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생각 없다고.”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김 비서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태조가 안으로 들어갔다.


- 그랬지. 근데 혹시 그사이에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서. 모임 나가니까 주변에서 계속 권하더구나. 너 만나는 사람 없으면 한번 자리만 만들어 보라고.

“거절하세요. 생각 없다고. 아니면 만나는 사람 있다고 둘러대시든지.”

- 너 만나는 사람 있니?

슬쩍 흘린 말을 마 여사가 날카롭게 잡아챘다. 태조가 피식 웃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마 여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솔직히 말해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세경이 그의 집안을 부담스럽게 느끼는데, 어머니까지 알게 되면 그날로 제 사무실이며 집으로 찾아오실지도 몰랐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계속 어머니를 귀찮게 하면 그렇게 말씀하시라고요.”

- 뭐야……. 정말 없어?

좋다 말았다는 듯, 마 여사의 목소리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생기면 소개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일부러 자리 만드실 생각 말고 그냥 기다리세요.”

- 그 말, 작년에도 들은 거 같다만.

“올해도 소개해드리는 여자가 없으면 결혼은 저와 인연이 없는 거로 여기시고요.”

- 태조 너, 엄마 속이 문드러지는 말만 하는구나?

마 여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샜다. 태조가 소리 없이 입술만 끌어올렸다.


“아,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는데.”

- 부탁? 뭔데.

“저 반찬 좀 몇 개 보내주셨으면 해서요.”

- 어쩐 일로? 매번 남겨서 다 버린다고 안 받는다더니.

마 여사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태조가 밖에 나가 살면서, 그녀도 아들이 걱정돼 반찬을 해서 가져다주곤 했었다.

하지만 집보다 바깥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던 태조는 매번 보내주는 반찬들을 반도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음식을 갖다줘도 도로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외식도 좀 질려서요. 주말 같은 땐 집에서 간단히 차려 먹으려고요.”

- 그러지 뭐. 따로 먹고 싶은 건 있니? 이번에 간장 게장 받은 게 있는데 그것도 갖다줄까?

마 여사의 물음에 태조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뇨. 게장은 됐고. 향이 세지 않은 음식으로 부탁드릴게요.”

- 향이 세지 않은 거?

생각지도 못한 요구 사항이었다. 태조가 딱히 음식을 가리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 그래, 일단 알았다. 준비되면 다시 연락할게.

“네. 쉬세요, 어머니.”

전화를 끊은 태조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메시지 앱을 열어 새로 온 문자들을 쓱 훑어보았다.

회사로 돌아오기 전, 세경에게 메시지를 보내놨었는데 보지 못한 건지 답이 오지 않고 있었다.

똑똑.


“대표님, 송지화입니다.”

“들어오세요.”

핸드폰을 내려놓은 태조가 몸을 바로 세웠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송 실장이 태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드라마 관련해서 세경 씨 스케줄이 새로 잡힌 게 있어서요.”

책상 앞으로 걸어간 송 실장이 태조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에 방영하는 <우아한 가족> 제작사 측에서 요청한 홍보 스케줄입니다. 그쪽은 관찰 예능이나 야외 촬영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는 걸 제안했는데, 세경 씨 몸에 무리일 것 같아 일단 제 선에서 거절해두었습니다.”

“잘하셨어요. 일정이 좀 빡빡하긴 해도 화보 외엔 촬영 시간이 길진 않겠네요.”

“네. 그런데 그쪽에서 따로 세경 씨에게 다른 예능에 나가달라 요청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도 드라마 홍보를 위해 인터뷰랑 화보 촬영 일정을 최대한 잡아두긴 했는데. 그쪽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에 나가질 않으니까 많이 아쉬워하는 눈치더라고요.”

“갑자기 편성이 잡혀서 그쪽도 조급하겠죠. 최근 기사가 좀 늘긴 했어도 사전에 충분한 홍보 시간이 없었으니까. 일단 세경 씨한텐 잘 거절하라고 말해둘게요.”

“이 스케줄도 무리하게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제가 최근에 세경 씨를 만난 적이 없어서. 임신 몇 주차인지도 듣지 못했고…….”

“이제 9주 차 됐을 겁니다.”

……예?


 
태조의 대답에 송 실장이 송아지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왜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9주 차요. 아직 초기니까 안정기까지는 조심해야겠네요.”

송 실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는 세경 씨의 상태를 대표님이 너무 잘 아시는 것 같다는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면서.


“그럼 저는 내일 세경 씨 만나서 스케줄 확인하고 픽스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우아한 가족 메인 피디랑 식사 약속 좀 잡았으면 하는데.”

“피디님이랑요?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세경 씨가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드라마 방송 중에 혹시라도 자신의 임신 사실이 알려질까 봐.”

“으음, 그래서 피디님께 말씀드릴 생각이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피디님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드라마 종영 때까진 밝히지 않을 생각이지만. 요즘은 뭐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알 수가 있어야지.”

송 실장도 그 말엔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요즘은 카페나 커뮤니티에 갑자기 글이라도 올라오면 순식간에 퍼지니까. 그럼 피디님하고 메인 작가님도 같이 뵙는 게 어떠세요?”

“메인 작가라면 공지원 작가님 말입니까?”

<우아한 가족>의 메인 작가인 공지원은 드라마계에서 잔뼈가 굵은 특A급 작가였다.

데뷔 후 나온 작품들이 연달아 히트를 한 데다, 주연 배우들도 모두 톱스타가 된 터라 그녀와 작업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네. 피디님만큼 영향력이 큰 분이잖아요. 공 작가님이 같이 계시면 세경 씨 입장을 더 쉽게 이해해 주실 것 같고요.”

“그럼 그 두 분과 식사 약속 좀 잡아줘요. 일정은 그쪽에 맞출 테니까. 식당은 프라이빗하게 룸으로 예약해 주고.”

“예. 확인해보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송 실장이 태조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데스크에 있는 김 비서와 눈인사를 하고 등 뒤를 힐끔거렸다.


“누가 보면…….”

대표님이 아이 아버지인 줄 알겠네.

세경의 임신 주 수를 주저 없이 말하던 태조를 떠올리며 송 실장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으, 그나저나 진짜 누구야.”

내일 세경 씨를 만나면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물어봐야지.

팔짱을 낀 송 실장이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노을이 기지개를 켜는 때늦은 오후였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은 세경은 깍지 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아으.”

뚜둑, 뼈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간 세경은 그대로 몸을 길게 뉘었다.


“피곤해.”

몇 시간을 잤는데도 몸은 여전히 무겁고 피곤했다. 자도 자도 졸린 건 아이를 가진 영향인 걸까?


“얼굴 붓겠다.”

잠도 깰 겸 뺨을 톡톡 두드린 세경은 테이블을 더듬어 리모컨을 끌어왔다. 티비를 켜고 잠시간 멍하게 있던 그녀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뭘 마실까…….”

선반에 있는 티백들을 살피던 세경은 디카페인 커피를 연하게 우려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컵에 코를 박을 듯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음. 향 좋다.”

코끝으로 고소한 커피 향이 스며들었다.

요즘 들어 입덧이 조금 심해진 탓에 밖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촬영장에 가거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제훈이나 스태프들이 커피라도 건네주면 그걸 거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몇 번 그러다 보니 제훈은 요즘 눈치껏 세경의 속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과일 주스 같은 걸로 메뉴를 바꿔오기도 했다.

매니저의 눈치가 빠르다 보니 편하기는 한데. 이러다 제 임신 사실을 들키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닐는지.


“어? 대표님한테 메시지가 왔었네.”

세경은 커피를 호록 마시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자고 있는 사이 태조와 송 실장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오전에 속이 울렁거린다고 메시지를 보내 놨더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속은 괜찮냐 묻는 태조의 메시지에 답을 한 뒤, 세경은 송 실장의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세경 씨, 드라마 홍보 관련해서 추가 스케줄 나왔어요. 내일 스케줄 픽스 겸 할 말도 있어서 그런데. 시간 낼 수 있어요?]
 


“할 말…….”

정중한 송 실장의 문자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세경은 복잡한 마음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할 말이라는 건 자신의 임신과 관련된 이야기겠지?

최정란 여사라는 큰 산을 넘었더니 송 실장이란 산이 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몇 번의 산을 또 넘어야 하려나.


“일단 내일 오후에 보자고 하고…….”

세경은 송 실장에게 답장을 보내고 리모컨을 들었다. 채널을 몇 번 돌리자 유나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 이거구나. 새로 촬영했다는 프로그램이.”

부부이몽에 출연한 유나는 최근 핫하게 떠오르며 다른 예능에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고정이 된 부부이몽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섭외 전화가 와 핸드폰이 불이 난다고 했던가.

아무튼, 밝은 유나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더불어 부부이몽에서는 아침부터 요가를 하는 유나와 유나의 지도 아래 세상 뻣뻣한 몸으로 스트레칭을 하는 원호를 보며 버드나무와 대나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방송이 늘어나면 소속사에서 케어해주는 게 좋을 텐데.”

유나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세경 또한 소속사 없이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하며 지냈던 적이 있는 터라 본인이 직접 스케줄을 잡고 촬영 준비를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유나의 방송 출연이 늘어나면서 몇몇 소속사에서 그녀에게 접촉을 해오긴 했다.

하지만 세경처럼 전 소속사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어 그런지 유나도 계약만큼은 신중히 고민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가 참 좋긴 하지만…….”

그걸 태조에게 이야기하기엔 너무 사감이 담긴 것 같고.

또 제훈과 찰싹 붙어 자신의 첫사랑 상대를 캐던 유나의 집요함을 떠올리니, 만에 하나 그녀가 진 엔터로 들어오면 그 상대가 태조란 걸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뭐, 아직 결정된 건 없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세경이 다시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 채널에 잠시 시선을 멈춘 그녀는 곧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우를 한다더니…….”

그새 드라마 촬영까지 한 모양이었다.

세경은 화면 속 주희의 모습을 응시하다 인터넷에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생각보다 꽤 많이 했네.”

이제 막 연기 활동을 시작한 줄 알았더니. 웹드라마를 비롯해 주연은 아니었지만, 조연급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꽤 있었다.

개중엔 방영 예정인 드라마로 시기상 세경의 드라마보다 한 주 앞서 방송하는 것도 있었다.


“경쟁작이라.”

세경이 손가락으로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요즘 유나의 활동이 도드라지면서 예전에 같은 그룹에 있던 세경의 이야기도 종종 기사에 언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또 같은 그룹 출신의 멤버가 같은 타임의 다른 방송국의 드라마에 출연하다니.


“딱 비교하기 좋은 기삿거리네.”

주희를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왜 예능 촬영했을 때의 일이 떠오르며 괜히 마음이 불안해지는 걸까.


“…….”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세경은 미지근해진 커피를 마시며 주희의 연기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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