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향수 주인하고 잘 안 됐어요? (37/100)


37. 향수 주인하고 잘 안 됐어요?
2022.12.07.


집 안에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서 풍겨왔다. 예령은 맛있는 냄새가 시작되는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본가 살림을 도와주는 홍 여사님과 시모인 마혜영 여사가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음식을 만들었는지 넓은 조리대 위는 맛깔스러운 음식들로 가득해 빈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 이게 다 뭐예요?”

“뭐겠니. 다 너네 먹을 거지. 오랜만에 반찬 몇 개 좀 했다.”

몇 개라고 하기엔 그 양과 가짓수가 꽤 많았다.

어디 산에 가서 나물의 씨를 말려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

고사리에 시금치, 방풍나물과 고춧잎, 호박고지와 가지무침 등등. 시모의 손이 큰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많은 걸 다 누구 먹이려고.


“간 좀 볼래?”

“네.”

안 그래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아까부터 입에 침이 고이던 참이었다.

예령은 조리대 앞으로 달려가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마 여사는 조물조물 무친 취나물을 조금 집어 예령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떠니?”

“맛있어요. 근데 뭘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이게 뭐가 많아. 너네랑 태조 그리고 홍 여사님도 챙겨주면 남는 것도 없는데.”

“도련님한테도 보내주시게요?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반찬을 해줘도 안 가져가잖아요.”

젓가락을 가져온 예령이 다른 반찬들도 조금씩 집어 맛을 보았다.

JK 푸드 대표였던 시절, 전국의 유명 장인들을 만나 직접 요리를 배운 덕에 마 여사의 요리 솜씨는 웬만한 프로 셰프 못지않았다.


“이거 태조가 부탁한 거야. 반찬 좀 만들어 달라고.”

“도련님이요? 의외네요.”

“그치? 나도 놀랐다니까. 태조도 맨날 바깥에서 밥을 먹으니까 좀 질렸나 봐. 주말엔 집에서 간단히 먹겠다고 반찬 좀 보내달라 하더구나. 게장도 줄까 했더니 그새 입맛이 변했는지 음식은 향이 세지 않은 걸로 해달래.”

그래서 낮부터 뭘 해줄까 고민을 했다고, 마 여사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도련님이 요즘 바빠서 본가를 못 오니 어머니 음식이 그리웠나 봐요.”

“그럴 수도 있고. 집에 오면 더 맛있는 걸 해줄 텐데. 참, 너는 저녁 먹었니? 안 먹었으면 차려줄 테니까 먹고 가고.”

“어머니는요?”

“난 아까 먹었어. 홍 여사님, 예령이 저녁 좀 차려주세요.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

“그럴게요, 사모님.”

“그리고 김치 냉장고에서 동치미도 꺼내주시고요. 예령이 너도 저거 가져갈래? 선정 스님이 이번에 동치미가 잘 익었다며 한 통 주시더라. 태조한테도 싸서 보낼 건데 너도 가져간다면 따로 싸주고.”

“주세요, 저도. 나중에 동치미 국수도 해 먹으면 맛있겠네요.”

그럼 얼른 식탁에 가 앉으라고 마 여사가 손을 내저었다. 예령이 식탁에 앉자 홍 여사가 금세 푸짐한 한 상을 차려주었다.


“게장도 살이 실해서 맛있네요. 아니, 도련님은 왜 이걸 마다하시지? 못 먹는 것도 아니면서.”

게살을 긁어 그릇에 담은 예령이 밥을 비벼 먹었다. 아삭한 무와 시원한 동치미 국물까지 곁들이자 달콤 시원 짭짤한 게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도련님한테 음식은 언제 보내시려고요?”

“내일 내가 가든지 아니면 김 기사한테 가져다 놓으라고 하려고.”

“낮에 회사에 있어서 집에 아무도 없을 텐데. 아니면 제가 이따 가는 길에 잠깐 들를까요?”

“네가 태조네 집에? 번거롭게 뭘 그렇게까지 해.”

“오늘 그이도 저녁 약속이 있어서 집에 늦게 오거든요. 가는 길에 도련님 얼굴도 볼 겸 들르죠, 뭐. 지금 집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까 퇴근해서 집에 간다고 했으니 지금쯤 들어갔을 거야.”

“그럼 딱 좋네요. 도련님 거랑 저희 거 같이 챙겨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예령이 남은 밥을 마저 비웠다. 그사이 마 여사는 태조에게 보낼 음식들을 하나둘 챙겨 놓았다.


“음? 뭔가 좀 많네요?”

“뭐 하나라도 더 챙겨줄까 하다 보니. 그냥 내일 김 기사 통해 보낼까?”

마 여사가 민망한 듯 웃었다. 3단 찬합에 대해 커다란 쇼핑백 하나가 더 늘어나 있었다.

예령은 쇼핑백을 벌려 안에 든 걸 확인했다.


“이게 도련님 거죠? 동치미하고 저 통에 담긴 건 뭐예요?”

“볶음 고추장. 고기 갈아서 넣은 거야. 너네 거엔 게장도 담아 놨어.”

“와, 도련님 덕에 우리가 더 호강하네요.”

예령이 흡족한 듯 활짝 웃었다. 차고로 내려간 그녀는 뒷좌석에 짐을 싣고 마 여사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그래. 너도 운전 조심하고. 태조한텐 네가 간다고 미리 연락해 놓을게.”

“아니요. 제가 그 앞에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그러니 따로 연락하지 마세요.”

마 여사에게 인사를 한 예령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미리 연락하고 찾아가면 재미가 없지.”

혼잣말을 하는 예령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 도련님, 나 집 앞이에요. 문 좀 열어 줘요.

핸드폰을 든 태조가 현관 쪽을 쳐다보았다.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예령의 발랄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했다.


“초인종 놔두고 왜 전홥니까?”

태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집 앞이라면서 멀쩡한 벨은 두고 왜 제게 전화를 하는 건지.

그는 현관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예령이 들어오기 좋게 몸을 한쪽으로 비켜주자 그녀가 집 안을 기웃거렸다.


“혼자 있어요?”

“혼자 있지, 그럼 누구랑 같이 있어요?”

반문한 태조가 예령의 손에서 짐을 가져갔다. 그녀는 구두를 벗으며 현관 바닥을 쓱 훑어보았다.

다른 사람의 신발이라도 있으면 좀 좋으련만, 휑한 바닥엔 태조의 구두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나 올 줄 알고 있었어요?”

“네. 어머니하고 통화했거든요.”

쳇. 예령이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어쩐지 갑작스러운 제 방문에도 그리 놀라는 않는 것 같더라니.


“서프라이즈하게 방문하려고 어머니한테 연락하지 말라 말씀드렸는데.”

“제가 한 겁니다. 내일 언제 오시나 물어보려고.”

“그래요? 아, 나 차 한잔도 안 주고 쫓아낼 건 아니죠? 이렇게 배달까지 해줬는데.”

예령이 아일랜드 식탁 위에 핸드백을 올려놓았다. 태조는 찬합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예령을 내려다보았다.


“차 한잔 정도야. 드시고 싶은 건요? 커피랑 주스, 차도 좀 있는데.”

“차는 어떤 거 있어요?”

“루이보스랑 애플민트? 커피는 디카페인도 있어요.”

“디카페인? 그거 도련님이 마시는 거예요? 별로 어울리지 않는데.”

“왜요? 저는 디카페인 먹으면 안 됩니까?”

“안 된다기보단……. 디카페인 커피 마실 거 뭐하러 커피를 마시냐고 할 것 같은 느낌?”

“저를 무슨 카페인 중독자로 아시나.”

“그래서 정말 도련님이 먹는 거라고요?”

태조의 입술이 가늘게 경련했다. 솔직히 제가 먹기 위해 산 건 아니었다. 아이를 가진 세경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기에 내려 주려고 산 거지.


“손님용입니다.”

“손님, 누구?”

예령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으나 태조는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형수님이요. 쓸데없는 의심 마시고 빨리 고르시죠.”

“내가 뭘 의심했다고. 그럼 나는 커피, 디카페인으로 줘요. 아, 화장실은 저쪽이죠?”

예령이 손가락으로 침실 옆에 붙어 있는 문을 가리켰다. 태조가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음? 이게 무슨 냄새지?”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달달한 냄새에 예령이 코를 킁킁거렸다. 물 묻은 손을 툭툭 털어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선반에 놓인 디퓨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 또 누구 취향이람?”

설핏 웃은 예령이 디퓨저 병을 들어 향을 맡았다.

조금 옅긴 하지만 지난번 태조가 온몸에 두르고 왔던 그 냄새가 맞았다.

세경의 향수와 아주 똑같은.


“세경 씨가 애인이 있다고 했지…….”

예령은 심 원장과 한 대화를 떠올리며 디퓨져 병을 빤히 쳐다보았다. 양이 좀 줄어든 걸 보니 최근 받은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럼 혹시 그날 받은 건가?”

도련님이 향수 냄새를 폴폴 풍기던 그때?

예령이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대략 한 달 전후인 거 같은데.


“도련님이랑 세경 씨가 아무 관계도 아니면……. 혹시 우리 도련님의 짝사랑인가?”

짝사랑이라니.

태조와 영 안 어울리는 단어에 예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태조와 한 살 차이가 나는 예령은 그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별로 알고 싶지 않아도 태조에 대한 소문은 예령의 귀에도 자주 들려왔다.

입학 당시부터 태조는 꽤 유명인사였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니 눈에 잘 띄기도 했고, 운동 신경도 좋아 점심시간 때 강당에서 농구라도 하고 있으면 여자들은 그를 보러 벌떼처럼 몰려들곤 했다.

오죽하면 제 친구들도 태조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괜히 저를 끌어들이지 않았던가.

물론 그 당시 예령은 태조가 아닌 윤조에게 꽂혀 있었다.


“으음.”

입술을 삐죽거린 예령이 디퓨저 병을 내려놓았다. 화장실을 나오자 거실엔 어느새 은은한 커피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드세요.”

식탁 앞에 앉은 예령에게 태조가 잔을 내밀었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호호 불었다.


“형은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늦는대요. 그보다 도련님이 어머니한테 반찬 좀 해달라고 했다면서요?”

“네.”

“웬일로? 집에서 밥도 안 해 먹는다더니. 뭐, 덕분에 내가 호강했지만.”

“형수님이 왜요?”

“도련님 줄 반찬 만든다고 우리도 좀 받았거든. 어머니가 손도 크시고 음식 솜씨도 좋으시잖아요.”

예령이 호록,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문득 시모와의 대화를 상기하곤 태조에게 물었다.


“도련님 요즘 입맛이 변했어요? 음식도 좀 향이 강하지 않은 거로 해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냥 요즘은 그런 게 먹고 싶어서요.”

“수상한걸. 디카페인 커피도 그렇고, 안 먹는 차도 구해 놓은 걸 보면…….”

예령이 의심의 눈초리로 태조를 흘겼다. 그는 요리조리 찔러대는 예령의 공격을 피해 무심하게 대꾸했다.


“수상할 것도 없어요. 사람 입맛이 가끔 변하기도 하는 거지.”

“그런가? 한데 도련님 요즘 사업은 어때요?”

“사업이요? 투자도 잘 받고 있고 큰 문제 없이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만.”

“으음, 엔터 사업 말고.”

그걸 묻는 게 아니라고, 입술을 늘여 웃은 예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연애 사업 말이에요. 연애 사업. 그 향수 주인과는 잘 안 됐어요?”

“…….”

갑자기 튀는 화제에 태조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형수님은 왜 이렇게 자신의 연애에 관심이 많은 거지?


“우리 형수님, 본가만 갔다 하면 이러시네.”

“응? 내가 뭘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을 떤 예령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번부터 제 연애 사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잖아요.”

“그거야 당연히 관심이 많을 수밖에. 우리 이제 한 가족이잖아요. 그리고 내 연애도 재밌지만 다른 사람 연애는 더 재밌는걸.”

아…… 형한테 당장 오라고 할까.

태조의 속도 모르고 입가를 가린 예령이 꺄르르 웃었다.


“게다가 나도 예쁜 동서랑 같이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거든. 도련님도 알잖아요. 나 위로 오빠들밖에 없어서 여동생에 대한 로망 있는 거.”

“그런 로망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리고 왜 형수님 바람을 이루는데 제 와이프를 이용하시려는지?”

“어머어머, 와이프래. 도련님 입에서 그런 말 나오니까 참 낯설다.”

예령이 태조를 놀리며 아일랜드 식탁을 탕탕, 두드렸다. 그가 뭔 말을 못 하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진가(家)네 남자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애처가 조짐이 보이네.”

“…….”

“부정 안 하는 거 보면 본인도 수긍하는 건가?”

“맘대로 생각하세요.”

시위하듯 몸을 반쯤 튼 태조가 커피를 마셨다.

예령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쯤 찔러대면 솔직하게 애인이 있다고 털어놓을 법도 한데.

저렇게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세경 씨랑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

생각에 잠긴 예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묘한 실망감이 몰려오는 건 자신의 촉이 틀렸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왜요. 또 뭐가 궁금한데요?”

뚱한 예령의 표정에 태조가 물었다.

사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긴 했다. 혹시 세경과 사귀는 사람이 태조가 아닌지.

하지만 세경에게 애인이 있다는 심 원장의 말도 걸렸고, 혹시라도 두 사람의 관계가 일찌감치 틀어지기라도 했다면 괜히 실연의 상처를 들쑤시는 건 아닐까 싶어 묻는 게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반응을 보면 태조는 애인이 있어도 없다고 말할 것 같은데.


“도련님, 아직 나한테 대답 안 했는데.”

“뭘요?”

예령이 무슨 질문을 했나, 태조가 되짚어 보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정말 향수 주인하고 잘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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