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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밤새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계속 봐. (38/100)


38. 밤새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계속 봐.
2022.12.10.


태조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찔러 보는 건지.

예령은 가끔 장난스럽다가도 이렇게 예고 없이 허를 찔러올 때가 있었다.


“왜 그렇게 향수 주인에게 집착하는 거예요?”

꼭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내 촉이랄까? 평소엔 그러지 않던 사람이 낯선 향수 냄새를 폴폴 풍기고 오면 궁금한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럼 저번에 전화해서 연애니, 여자친구니 했던 것도 다 그 향수 주인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겁니까?”

“그럼 내가 누굴 생각하고 그랬겠어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예령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나 욕실에서 봤어요.”

“뭘요?”

“디퓨저요. 그 향수 주인이 만들어 준 거죠? 향이 똑같던데.”

“똑같은 거 아닙니다. 흔한 향이라 어디서 비슷한 걸 맡은 거겠죠.”

“기성품이 아니라 커스텀 상품이던데.”

어디 저를 속여먹으려고.

턱을 괸 예령이 입꼬리를 올렸다. 태조가 피곤한 얼굴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만하시죠, 형수님.”

“누군지까지는 묻지 않을게요. 그냥 향수 주인하고 잘 되고 있는지만 말해줘요. 어머니도 궁금해하시잖아요.”

“어머니도…… 알고 계신다고요?”

마 여사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태조의 눈이 커졌다.


“그럼 모를 줄 알았어요? 그날 저녁에 어머님 옆에 앉았으면서. 내가 맡은 향수 냄새를 어머님이 못 맡으셨을까.”

“…….”

“그러니까 요즘 어머님도 도련님 짝 찾아주겠다고 여자들 사진도 받고 그러시는 거잖아요. 이제 조금 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있나 싶어서.”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형도 결혼하고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도 하나둘 가정을 꾸리고 있으니 모친도 신경을 쓰고 있는 거라 여겼을 뿐.


“어머니한테는 따로 이야기 드렸어요. 올해 안에 소개해드리는 사람이 없으면 결혼과는 인연이 없는 거라 생각하시라고.”

“오, 그건 반대로 말하면 올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올 수도 있다는 거네요?”

자의적인 예령의 해석에 태조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봤자 그걸 믿을 거 같지도 않고.

게다가 세경의 모친에게 인사도 드렸으니, 그도 곧 자신의 가족들에게 세경을 소개하고픈 마음은 있었다.

다만, 아직까진 세경의 일도 있고 임신 초기이기도 하니 시기를 좀 조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올해 데려올 사람은 그 사람인가?”

예령이 또 한 번 툭 미끼를 던졌다. 태조가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고요.”

오호라.

태조의 답에 예령이 눈을 반짝였다.

확실한 답은 아니었지만 저게 어딘가.

매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던 태조의 입에서 처음 듣는 긍정의 답이었다.


“그 사람 올핸 꼭 봤으면 좋겠네.”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것도 없었다. 생글생글 웃은 예령은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

요란한 폭풍이 한차례 집안을 휩쓴 듯했다. 수다스러운 예령이 떠나자 시끄러웠던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정신없어.”

고개를 저은 태조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뒤늦게 모친이 보내준 음식들을 확인했다.

낮부터 고생했겠다 싶을 만큼 반찬의 가짓수가 꽤 많았다. 나물 반찬을 몇 점 집어 맛을 본 태조는 핸드폰을 들어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태조야.

“음식 잘 받았어요. 조금만 해주셔도 되는데 뭘 이렇게 많이 하셨어요?”

-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예령이는? 집에 돌아갔니?

“네. 형수님은 여기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좀 전에 가셨어요.”

- 늦은 밤에 무슨 커피를 줬어. 보낸 음식들은 다 먹어 봤고?

“다는 말고 몇 가지만요. 맛있더라고요.”

- 입에 맞으니 다행이네. 밥 잘 챙겨 먹고. 혹시라도 부족하면 또 연락하렴.

“그럴게요. 쉬세요, 어머니.”

짧게 통화를 마친 태조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예령과의 대화를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어머니도 형수님처럼 향수의 주인을 궁금해하신다고 했지. 예령이 하도 집요하게 물어보기에 일단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긴 했는데…….

세경이 예령과 만날 접점이 없는데도 이렇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특히나 마지막에 제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웃던 형수님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향수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따로 캐묻지 않는 게 수상쩍기도 했고.

딩동!

초인종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태조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 주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세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은 가셨어요?”

“응. 좀 전에. 속은 어때? 괜찮아?”

“내내 잤더니 좀 괜찮긴 해요. 근데 이게 무슨 냄새예요? 혹시 음식 하셨어요? 고소하니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내가 한 건 아니고.”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펼쳐진 음식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이게 다 뭐예요?”

모자를 벗은 세경이 손을 파닥거리며 음식 냄새를 맡았다.

풀 씹는 걸 싫어하는 아기 호랑이도 나물 반찬의 고소한 냄새는 꽤 마음에 드는지 거부하는 낌새가 없었다.


“어머니한테 반찬 좀 보내달라고 했거든.”

“대표님의 어머님이요?”

“…….”

“아, 태조 씨 어머님이요?”

태조의 지긋한 시선에 세경이 재빨리 호칭을 정정했다. 그가 세경에게 먹어 보라며 젓가락을 넘겼다.

세경은 윤기 흐르는 나물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맛있다.”

나물의 향긋함과 참기름의 고소함이 한데 섞여 잘 어울렸다. 간도 적당히 짭조름해 입맛을 돌게 했다.

세경은 찬합에 담긴 반찬들을 하나하나 집어 먹다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밥 비벼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 필요한 걸 좀 달라고.

간절히 저를 보는 시선에 태조가 웃음을 터트렸다.


“기다려 봐. 준비해 줄게. 어머니가 고추장도 보내주셨으니 그걸로 비벼 먹으면 되겠네.”

선반에서 커다란 그릇을 꺼내 온 태조가 그 안에 밥과 나물을 담아주었다.

그가 모친이 보내준 고추장으로 밥을 비비는 동안 세경은 국자를 가져와 동치미 국물을 떴다.


“먹어 봐.”

수저로 비빔밥을 뜬 태조가 세경의 입에 넣어주었다. 낮에 입덧으로 고생한 게 무색할 정도로 음식은 입에 술술 들어갔다.


“입에 맞아?”

“네. 딱 좋아요.”

고추장에 고기가 들어가서 그런지 아주 꿀맛이었다. 세경은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음식을 채워 넣고 입을 오물거렸다.


“낮엔 아무것도 못 먹겠다면서 이건 괜찮은가 보지?”

“네. 동치미도 시원하고 나물도 맛있고. 아, 그럼 방금 어머님이 오셨던 거예요? 이 음식 가져다주시러?”

“아니. 형수님이 오셨어.”

“형수님이요?”

그러고 보니 태조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진 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가 대표님의 형이라고 했던가.


“형제는 위로 형 한 분만 계시는 거예요?”

“응.”

“그럼 대표…… 아니, 태조 씨가 집에서 막내예요?”

“왜? 막내라니까 안 어울려?”

“네.”

세경이 즉각 대답했다.

세상에 저렇게 귀엽지 않은 막내가 어디 있나.


“형님은 어떤 분이세요? 대표님이랑 비슷한 스타일이에요?”

“세경 씨가 보기엔 내가 어떤 스타일인데?”

어떤 스타일이냐고?

세경의 시선이 태조의 머리부터 아래로 쓱 훑고 내려왔다.


“그걸 제 입으로 말해야 해요?”

어디 해보라는 듯 팔짱을 낀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키도 크고 잘생기셨고…….”

세경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태조는 앞에서 턱을 괸 채 세경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키 크고 잘생기고. 또?”

“되게 뻔뻔한 데다 자주 절 놀리시기도 하고…….”

“뭐? 뻔뻔?”

그 말은 마음에 안 드는지, 태조가 짙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어떨 땐 다정하게 잘 챙겨주시기도 하고 몸도 좋아서 슈트도 잘 어울리시는…….”

“내 몸이 좋은 건 어떻게 알아? 아, 그때 봤겠구나. 호텔에서.”

태조가 놀리듯 하는 말에 세경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물론 그 잔근육이 잡힌 탄탄한 몸이 섹시하긴 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겉으로 보기에 좋다는 말이었는데!


“응큼하긴.”

“제가 뭘……. 콜록!”

급하게 동치미 국물을 삼키던 세경이 사레에 걸려 기침을 했다.

연거푸 터진 기침에 세경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자 태조가 물을 챙겨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마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세경이 태조를 쏘아보았다.


“진짜, 놀리기나 하고.”

“사레까지 걸릴 줄은 몰랐지.”

그가 잔기침을 하는 세경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래서 형님도 대표님하고 비슷한 타입이에요?”

“형제다 보니 외모는 비슷하지만, 성격은 좀 다르긴 해. 형이 더 모범생이지. 머리도 좋고 좀 호구스럽다 싶을 정도로 착한 게 흠인데…….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이 쉽게 다가와서 고백도 하더라고. 아마 우리 형수님 그거 때문에 처음엔 속앓이도 많이 했을 거야.”

“형수님도 같은 학교였어요?”

“어. 나랑 형수가 한 살 차. 형이랑은 두 살 차이야.”

“대표님도 고등학교 때 인기 많았다면서요? 머리도 좋고.”

“누가 그래?”

“심 원장님이요. 두 분 동창이라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그 녀석이 좋은 얘기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심 원장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다 확신하는 듯 그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물론 태조에 대한 심 원장의 주관적 평가는 좋지 않았다.

재수 없고 얄밉다고 했지. 하지만 태조의 앞에서 심 원장의 말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었다.


“인기는 있었지. 세경 씨 말대로 내가 좀 잘생기고 멋있잖아.”

“와, 역시 좀 뻔뻔…….”

세경의 중얼거림에 태조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러는 세경 씨도 학교에서 인기 많지 않았어? 데뷔가 고등학생 때 아니었나?”

“활동 시작한 건 졸업 후였어요. 그래도 뭐 아주 인기가 없었던 건 아니라서 저도 고백을 좀 받긴 했죠.”

세경이 우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태조가 그런 세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거짓말 같아요?”

“아니. 믿어. 인기 있었겠지. 세경 씨 예쁘니까. 그냥…….”

태조가 손을 뻗어 세경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고백을 받았다니까. 얼굴도 모르는 애송이한테 좀 질투가 나서.”

음? 질투?

질투우?


“농담이시죠?”

“진담이야. 저번부터 그러더라고. 세경 씨 옆에 다른 남자가 서 있는 걸 상상하면 기분이 나쁘달까.”

“저번이라면 언제요?”

“세경 씨가 결혼하자는 내 제안을 거절했을 때?”

“…….”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기분이 좀 별로더라고. 세경 씨 옆에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우리 앙꼬가 태어나서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 안겨 있는 것도.”

세경의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태조가 저런 감정을 느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사귀지는 않았어요.”

“음?”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채지 못한 태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경이 목덜미를 빨갛게 물들인 채 말을 이었다.


“그게…… 고백은 받아도 다 거절했다고요. 데뷔가 임박해서 소속사에서 연애는 금지했거든요.”

“아아.”

기분이 나빴다는 말이 신경이 쓰였나.

변명하는 세경이 귀여워 태조가 웃었다.


“가만 보면 대표님 은근 질투가 심한 거 같아요. 저번에 얼굴 태교한다고 사진 보여달라 할 때도 그렇고.”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애인 앞에 두고 다른 남자한테 한눈을 파는데.”

“태교라니까요. 잘생긴 사람들 얼굴을 두루 봐야 우리 앙꼬도 예쁘게 태어나죠.”

“그럼 밤새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계속 봐.”

태조가 세경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러다 쪽, 세경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그리고 또 호칭이 계속 대표님으로 돌아가는데.”

“이름 부르는 게 어색해서 그래요. 아, 아까 송 실장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내일 좀 보자고.”

“연락할 거란 말은 들었어. 스케줄 때문에 그런 거지? 언제 만나기로 했어?”

“일단 오후에 사무실로 가기로 했어요. 근데 송 실장님이 일 이야기만 하진 않을 거 같은데. 아이 아빠나 임신 사실에 대해 물어보면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세경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세경 씨가 말하고 싶은 것만 알려줘. 송 실장이 뭐 말 안 한다고 세경 씨를 잡아먹기야 하겠어?”

태조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세경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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