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혹시 임신했어요?
(40/100)
40. 혹시 임신했어요?
(40/100)
40. 혹시 임신했어요?
2022.12.17.
“대표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조가 고개를 들었다. 진료를 마친 세경이 대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다 했어?”
고개를 끄덕이는 세경을 보며 태조가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뒤따라온 심 원장은 태조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니가 그걸 왜 봐?”
태조가 보고 있던 건 대기실에 비치해 둔 육아 서적이었다.
산모들이 진료를 받는 동안 대기하고 있는 예비 아빠들이 좀 읽고 육아에 대한 지식을 쌓으라 꽂아 둔 거였다.
“할 일이 없어서. 읽을 만한 것도 없고.”
정작 읽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건만, 왜 아이도 없는 지가 읽고 있어?
“네가 육아 상식 쌓아서 뭐 하게? 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 원장의 말에 뜨끔한 세경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태조를 쳐다보았다. 그는 놀란 자신의 반응이 재밌는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읽어두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도움? 너 결혼할 거니? 누구 사귀는 사람 있어?”
“딸꾹.”
태조의 대답 대신 어디선가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심 원장이 휙 옆을 돌아보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세경이 연신 딸꾹질을 하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어머, 갑자기 웬 딸꾹질? 세경 씨도 쟤 여자 있는 거에 놀랐어요?”
“그게 아니……. 딸꾹!”
손을 내젓던 세경이 다시금 입을 틀어막았다.
세경이 말도 못 하고 있자 심 원장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잠깐 기다려봐요. 물 갖다줄게.”
좀 보고 있으라는 듯 태조에게 턱짓을 한 심 원장이 대기실을 나섰다. 그는 자신을 흘겨보는 세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놀랐어?”
“조금요. 원장님이 갑자기 저런 말을 하시니까.”
세경이 가슴을 두드리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태조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뭐라고 대답하실 거예요?”
작게 딸꾹질을 한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이참에 다 털어놓을까?”
“대표님이 앙꼬 아빠라고요?”
“응.”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 원장에겐 아이 아빠가 태조란 걸 밝혀도 상관없을 테지만…….
“뭐…… 멱살이 잡히는 건 대표님이니까.”
“아, 그건 좀 싫은데.”
“뭐가 싫어?”
심 원장의 목소리에 태조가 고개를 돌렸다. 생수병을 든 그녀는 뚜껑을 잡아 있는 힘껏 비틀고 있었다.
“마셔요, 세경 씨.”
“감사합니다.”
“너는 뭐. 뭐가 싫은데?”
턱을 치켜든 심 원장이 태조에게 날을 세웠다.
세경은 물을 마시며 눈동자를 굴렸다. 태조가 앙꼬 아빠라는 걸 알아채진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들은 건 아닌 듯했다.
“남의 말을 엿듣는 네가 싫다고.”
“웃겨. 엿들은 게 아니라 들린 거거든?”
흥, 코웃음을 친 심 원장이 태조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보다 너 진짜 사귀는 사람 있었어?”
“왜? 나는 사귀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나?”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세경을 힐끗거린 심 원장이 다시 태조를 쳐다보았다.
있으면 진작 말하지. 그럼 예령 언니가 세경 씨가 너랑 잘 어울린다는 둥,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았을 거 아냐!
심 원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예령이 그녀에게 당부한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세경 씨한테는 내가 태조 형수님이라는 거 비밀로 해줘.’
‘왜요?’
‘왜긴. 좀 부담스럽잖아. 소속사 대표의 친인척이라고 하면.’
음, 확실히 좀 부담스럽나. 예령 언니가 태조의 형수님이라고 하면?
“왜 말을 하다 말아? 세경 씨 진료는 다 끝난 거지?”
“어? 어어. 끝났어. 이제 가도 돼.”
심 원장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조가 의자에 걸쳐 둔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럼 간다. 수고해.”
“그래. 잘 가고. 세경 씨도 들어가요. 곧 연락할게.”
“네. 그럼 나중에 봬요.”
고개를 꾸벅거린 세경이 태조와 병원을 나섰다.
“뭐, 예령 언니에 대한 건 나중에 알려주면 되겠지.”
심 원장은 세경의 손에서 물병을 가져가는 태조를 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
또롱!
아침부터 울리는 경쾌한 메시지 도착음에 세경이 핸드폰을 들었다.
[세경 씨, 오늘 저녁 6시 30분. 청담동에 있는 블랑으로 와요. 주소는 따로 링크 걸어 보낼게요. 예약은 내 이름으로 했으니까 들어오면서 내 이름 말하면 돼요.]
심 원장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예령과 약속을 잡았다는 말을 들은 게 어젯밤이었는데, 그새 식당까지 예약한 모양이었다.
링크한 주소를 클릭해 보니 퓨전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밥을 사려고 한 건 저였는데 어쩌다 보니 바쁜 세경을 대신해 식당을 예약한 건 심 원장이었다.
“계산은 꼭 내가 해야지.”
들쑥날쑥한 제 스케줄에 맞춰 진료를 보느라 늦게까지 병원에 남아 있는 심 원장에게 늘 미안했었다. 그래서 꼭 한번은 밥을 사야겠다 마음을 먹고 있었다.
다만 저렇게 다짐을 해도 왠지 모르게 제가 쉽게 밥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갤러리에서 본 예령이나 심 원장 둘 다 누군가가 사준 밥을 먹기보단 본인들이 나서 결제할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분 다 든든한 언니 같은 스타일이긴 하지.”
물론 그중 맏이는 반예령 관장이었고.
세경은 피식 웃으며 심 원장의 메시지에 답을 보냈다.
오후에 브랜드 행사에 참석하고 약속 장소로 향하면 대충 시간이 맞을 듯했다.
“조금 출출한데.”
주방으로 들어간 세경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찾아와 소파에 앉았다. 그때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세경은 발신인을 확인하곤 전화를 받았다.
“어, 유나야.”
전화를 건 이는 요즘 한창 바쁘게 활동하는 유나였다.
- 뭐 해? 지금 집이야? 요즘 드라마 때문에 바쁘지?
전화를 받자마자 유나가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냈다.
“조금 바빠. 지금은 집에 있고. 오후에 나가야 하지만.”
- 우리도 얼굴 한 번 봐야 하는데. 요즘 만나기가 힘드네.
“네가 요즘 바빠서 그렇지. 지금도 혼자 다녀? 소속사랑은 계약 안 하고?”
- 아직 여기다 싶은 곳이 없어서. 그냥 당분간 혼자 해 보기로 했어.
“요가 학원은? 강사 일은 그만둔 거야?”
- 응. 시간 조정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녹화 시간이 다르니까 병행하기가 힘들더라고. 그보다 넌 어떻게 한 거니? 나야 예능 촬영이니까 그나마 다닐 만한데. 넌 드라마 촬영이었잖아. 혼자 다닌 거.
의외로 운전하고 스케줄에 맞춰 이동하는 게 제일 힘들다며 유나가 약한 소리를 했다.
“그냥 버틴 거지 뭐. 그래서 금방 소속사 들어갔잖아.”
- 지금 소속사도 문 배우님이 소개해 주신 거지? 네가 거기 들어갔을 때 바로 그분을 찾았어야 했는데…….
타이밍이 아쉽다는 듯 유나가 혀를 찼다. 세경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이미 그분 찾았어, 유나야.
- 아 참, 그보다 임 피디님이 너 드라마 홍보 겸 혹시 부부이몽 나올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시던데.
“나를?”
아니, 왜 저번부터 결혼도 안 한 사람을 자꾸…….
- 꼭 나오란 말은 아니고, 혹시 드라마 홍보차 필요하면. 예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었잖아. 우리 부부 쪽 게스트로 나오면 좋을 것 같다고.
“그거 지나가는 말 아니었어?”
- 반반? 나야 너랑 같이 나오는 거 좋지. 근데 한편으론 걱정도 되더라. 너 이용해서 방송한다는 말 나올까 봐.
그러다 괜히 네게 불똥이 튀는 건 아닐까 싶어 말하는 게 꺼려졌다고, 유나가 덧붙였다.
- 그래도 다행히 요즘은 우리 부부 이야기가 화제성이 있어서, 지금 출연하면 네 드라마 홍보에도 조금 도움이 될 것 같고. 우리 프로가 부부 동반 출연 예능이라 그런지 드라마 제작사 쪽에서 홍보차 게스트 출연 제의도 없더라고. 그래서 피디님이 나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하시더라. 혹시 너 출연할 생각이 있나 하고.
“나도 너랑 출연하는 건 좋지만…….”
당장은 고려해야 할 상황이 몇 개 있긴 했다. 관찰 예능의 특성상 카메라가 하루 종일 돌아갈 텐데. 그 사이에 제가 입덧이라도 하는 게 찍히면 어쩌나.
“지금도 잡혀 있는 스케줄은 많아서. 다음에 한 번 생각해 볼게.”
- 그래. 아니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와. 꼭 방송 아니어도, 우리 집에도 한번 놀러 오고.
“그럴게.”
- 아, 나 촬영 들어가야 한다. 세경아, 내가 다시 전화할게.
“응.”
전화를 끊은 세경이 피식 웃었다. 저를 생각해주는 임 피디나 유나의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그럼 나도 슬슬 나갈 준비를 해 볼까.”
두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한 세경이 몸을 일으켰다.
***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자 세경의 손이 초조하게 움직였다. 퇴근 시간에 잡혀 느릿느릿 굴러가던 차가 드디어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세경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제훈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누나, 집에 들어가실 때 연락하세요.”
“아니야. 내가 알아서 들어갈게. 너도 바로 퇴근해.”
제훈에게 손을 흔들어준 세경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손님을 응대하던 매니저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일행이 있으신가요?”
“네. 심해정으로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심 원장의 이름을 말하자 홀 매니저가 이름을 확인하곤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블랑(Blanc)이란 이름답게 화이트 계열의 장신구와 커튼들이 내부를 고급스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 방입니다.”
세경을 안내한 매니저가 문을 두드렸다. 룸엔 먼저 도착한 예령과 심 원장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세경 씨.”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지금 한창 차가 막힐 때니까. 우선 앉아요. 주문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괜찮죠?”
“네.”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심 원장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맞은편에 있는 예령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우리도 거의 시간 맞춰서 왔어요. 세경 씨는 어디 갔다 온 거예요?”
“행사장에요. 인터뷰가 좀 길어져서 늦어졌네요.”
“많이 안 늦었으니까 미안해하진 말고. 참, 이거 받아요.”
예령이 옆자리에 둔 쇼핑백을 세경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그날 본 전시 도록하고 관련 상품들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생각도 못 했는데.”
세경이 쇼핑백을 열어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컵 두 개와 도록, 그리고 세경이 관심 있게 보았던 그림의 아크릴 액자가 담겨 있었다.
똑똑.
“음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직원이 들어와 주문한 음식들을 세팅했다.
어니언 수프를 포함한 아뮤즈 부쉬로 입맛을 돋우자 곧 메인 요리들이 하나둘 서빙되었다.
“이번에 세경 씨 출연한 드라마가 방송하는 거 같던데.”
“네. 원래는 연말에 방송하는 거였는데 사정상 편성이 좀 당겨졌어요.”
세경이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세경 씨가 주인공 맞죠? 무슨 내용이에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여주인공이 어느 날 돌아가신 조모의 유언으로 재벌가의 상속녀가 되거든요. 그 여주인공이 자신과 어머니를 핍박하고 내친 그 재벌가 가족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이에요.”
“오, 재밌겠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심 원장이 흥미로운 눈빛을 했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직원이 테이블 위에 큰 접시를 내려놓았다.
해산물 냄새가 훅 끼쳐 오자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세경이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켰다.
“여기 부야베스가 특히나 맛있다고 해서…….”
설명을 하던 예령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세경을 쳐다보았다. 어딘가 불편한 듯 세경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세경 씨? 왜 그러는…….”
“욱.”
입을 틀어막은 세경이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헛구역질을 했다. 심 원장이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경 씨, 속이 안 좋아요? 화장실에 갔다 올래요? 해정아 네가…….”
“아뇨. 금방 괜찮아질……. 우욱.”
세경이 말을 하다 말고 다시 한번 헛구역질을 했다. 심 원장은 옆에서 세경의 등을 쓸어주며 예령을 쳐다보았다.
“…….”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멀쩡하던 세경이 연거푸 헛구역질을 하자 예령이 황당한 얼굴로 테이블을 훑어보았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거…….
예령이 세경의 앞에 놓인 접시와 방금 직원이 가지고 온 음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기가 좀 이상한가? 여태껏 음식을 잘 먹다가 갑자기 구역질이라니.
‘잠깐 뭔가 이상…….’
예령의 시선이 이번엔 심 원장과 세경에게 향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자신과 달리 심 원장은 뭔가 알고 있는 듯 난처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예령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해정은 산부인과 원장이었고 세경은 그 산부인과에 찾아온 환자였다.
그리고 예령도 알고 있었다.
산부인과에 가는 이유가 꼭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런데…… 자꾸 무언가가 그녀의 예리한 레이더에 걸려들고 있었다.
“세경 씨.”
예령의 부름에 세경이 움찔 몸을 떨었다. 창백해진 얼굴엔 낭패감이 가득했다.
예령은 당황해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심 원장의 얼굴을 일별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라면 미안한데.”
“…….”
“혹시 임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