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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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2022.12.21.
룸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세경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하얗게 변한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임신이 아니라고 잡아떼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지. 그조차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 언니도 참. 세경 씨가 무슨 임신이에요.”
고민하는 세경을 대신해 입을 연 건 옆자리에 있던 심 원장이었다.
하지만 예령은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떨리는 목소리와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영 신뢰가 가지 않는 탓이었다.
‘어떻게 하지…….’
세경은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에서 임신이 아니라 해도 예령은 믿지 않을 것 같은데.
“관장님, 제가…….”
입을 떼는 순간, 가라앉았던 속이 다시금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급히 입을 틀어막은 세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경 씨!”
세경이 룸을 나가자 뒤따라 일어선 심 원장이 몸을 멈칫거렸다.
‘눈치챘나? 눈치챘겠지?’
그녀는 녹슨 기계처럼 삐그덕 고개를 돌려 예령을 바라보았다.
세경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던 예령은 얼어 있는 심 원장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따라가 봐.”
심 원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채 세경을 따라나섰다. 룸에 혼자 남은 예령은 테이블에 벌여둔 음식들을 쓱 훑어보았다.
“이건…….”
예상 밖의 일인데?
예령은 창백해진 세경의 얼굴과 당혹한 심 원장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임신은 맞는 거 같고…….”
생각이 많아지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댄 예령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웬만한 일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자부하는 예령도 세경이 입덧을 했을 땐 꽤 놀랐었다.
태조와 세경이 사귀고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이를 가졌을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해정인 두 사람이 사귀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어쩐지 자신이 태조와 세경을 붙여주려 할 때 애인이 있다며 말리더니.
세경의 임신 사실을 알고 그러는 거였다. 다만, 그 상대가 태조란 걸 모르고 있을 뿐.
“그럼 어머니한테 음식을 부탁한 것도…… 자기가 먹을 게 아니었던 건가?”
세경과 태조, 그리고 세경의 임신.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자 최근 태조가 보여준 행동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태조의 집에 구비해 둔 디카페인 커피며, 게장은 빼고 향이 강하지 않은 반찬들을 좀 해달라고 했던 것도 모두 태조가 아닌 세경을 위한 거라면…….
“부야베스가 나오니까 입덧을 했지.”
테이블을 내려다본 예령이 젓가락으로 홍합 껍데기를 툭 건드렸다. 육고기는 괜찮아도 해산물은 못 먹는 모양.
그녀는 세경이 돌아오기 전,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다.
“여기요. 이거 좀 치워 주시겠어요?”
***
“세경 씨,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낯을 한 심 원장이 세경을 다독이며 물었다. 룸에서 나왔을 땐 창백했던 얼굴이 지금은 혈색이 좀 돌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다행스럽게도 화장실에 가자마자 울렁거리는 속은 좀 나아졌다. 바깥 공기도 좀 쐬고 들어온 덕에 아까보다 속은 더 편안해진 상태였다.
다만 다시 룸으로 돌아가는 세경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예령을 룸에 혼자 두고 나온 것도 마음에 걸렸고, 식사 중에 헛구역질을 한 것도 미안했다.
무엇보다 세경의 마음을 가장 심란하게 하는 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예령에게 밝혀야 하나 싶은 거였다.
“그…… 미안해요. 나도 너무 급작스러워서 표정 관리를 못 했네.”
심 원장이 뺨을 긁적거리며 세경에게 사과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세경이 입덧을 한 터라 미처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게다가 예령의 눈치가 좀 빨라야지. 그 순간 세경의 임신 사실을 캐치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냥 우깁시다. 갑자기 해산물 냄새에 속이 뒤집혔다고.”
비장한 얼굴을 한 심 원장이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그거 안 믿으실 거 같은데요.”
“의심은 해도 어쩔 거야. 두 사람 다 아니라고 우기는데.”
“…….”
“아님, 사실대로 말하게요?”
심 원장의 물음에 세경이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아니, 뭐. 솔직히 말하면 그 언니가 어디 가서 가볍게 이야기할 사람은 아닌데, 세경 씨 입장에선 몇 번 보지도 못한 사람이니까…….”
음, 여전히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세경이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문 앞에 도착한 심 원장이 세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예령 언니한텐 따로 당부해 둘게요. 오늘 일은 모른 척해달라고.”
나름 신경을 써 주는 말에 세경이 옅게 웃었다. 본인이 더 긴장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한 심 원장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미안해요, 언니. 오래 기다렸죠?”
심 원장이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부러 큰 소리를 냈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예령이 고개를 들어 세경의 안색을 살폈다.
“세경 씨, 속은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식사 중에 안 좋은 모습을 보여서…….”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괜찮으니 앉아요. 그보다 좀 춥죠? 조금 전까지 창문을 열어놔서.”
그러고 보니 환기를 한 듯 룸 안을 가득 채우던 음식 냄새가 조금 사라져 있었다. 입덧의 원인이었던 부야베스도 보이지 않았고.
“어? 아까 시킨 건 어디 갔어요? 이건 또 뭐고?”
자리에 앉은 심 원장이 테이블 중앙에 위치한 볼그릇을 가리켰다.
“그건 치워달라고 했어. 포장해서 내가 가져가려고. 세경 씨가 이건 좀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비프스튜인데.”
불편한 화젯거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미 본인이 속으로 답을 내려서 그런 걸까.
예령은 세경의 임신 여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릇에 스튜를 덜어 세경에게 건네주었다.
“어때요? 그건 괜찮아요?”
수저를 들어 맛을 본 세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슬쩍 옆을 돌아본 세경이 심 원장과 눈을 맞췄다.
‘말해야 해요?’
눈으로 묻는 세경에게 심 원장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오전부터 스튜디오 안이 부산스러웠다.
드라마 포스터 촬영이 있는 날. 1차로 촬영을 마친 세경은 잠시 대기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예령과 식사 자리를 가진 지 3일이 지나고 있었다.
입덧하는 걸 들킨 후, 임신을 했냐 물었던 예령은 의외로 식사를 마칠 때까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언제 또 예령에게 질문이 날아올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예령이 처음부터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아차린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피가 마르는 것은 이쪽이었다.
그렇다고 예령이 묻지 않는 걸 제가 먼저 나서 말을 꺼내기도 좀 그랬다.
대뜸 ‘저 임신했어요.’라고 밝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심 원장님한테도 아무 말 안 했다고 하던데…….”
식사를 마친 다음 날, 세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예령이 그녀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묻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심 원장은 자신에게 묻기는커녕 그날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설사 제게 물었다 한들 의사인 자신이 함부로 환자의 정보를 노출할 수는 없다면서.
다만 심 원장은 세경을 안심시키려는 건지, 예령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반 관장님이 세경 씨 임신에 대해 의심해도 그걸 떠벌리진 않을 거예요. 그분이 세경 씨 회사에 피해를 줄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거거든.’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묻진 못했지만, 분명 심 원장은 ‘세경’이 아닌 ‘세경의 회사’라고 했다.
그건 분명 소속사를 지칭하는 것일 텐데. 어째서 예령이 자신의 소속사 피해 여부까지 신경을 쓰는 건지.
본인도 갤러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사업하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뜻인가?
“하아.”
한숨을 쉰 세경이 초조함에 다리를 떨었다. 그날 예령이 묻지 않아도 제가 먼저 물어볼 걸 그랬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는지. 그랬다면 요 며칠간 그로 인해 마음 졸이는 일도 없었을 텐데.
“대표님한테 털어놓는 게 그나마 마음이 좀 편하겠어.”
예령이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아, 세경은 그날 있었던 일을 따로 태조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태조에게 이야기를 하고 뭔가 대책을 세우는 게 나을 듯했다.
똑똑.
“누나, 촬영 다시 시작한대요. 준비됐으면 나오세요.”
노크 소리와 함께 제훈이 촬영의 재개를 알려왔다. 세경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다시 분장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지이잉.
세경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자, 그녀는 새로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세경 씨, 오늘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세경은 꾹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지난번 예령이 갤러리에서 찍어준 사진 아래,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
오전부터 시작된 포스터 촬영은 오후 3시가 되어 끝이 났다. 세경은 스태프와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인사를 한 뒤 스튜디오를 나섰다.
“누나, 저 정말 먼저 가요?”
밴에 올라탄 제훈이 세경의 앞에 차를 세우고 물었다. 예령의 메시지에 답을 하자, 그녀는 촬영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스튜디오 앞으로 오겠다고 하였다.
“응. 누가 여기로 오겠다고 해서.”
“그럼 그분 오실 때까지 제가 기다렸다 갈게요.”
“됐어. 괜찮으니까 먼저 가.”
세경이 얼른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제훈은 세경의 재촉에 마지못해 먼저 차를 출발시켰다.
“후우.”
세경은 밴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한 손끝을 주무르고 있을 때쯤, 좁은 골목으로 하얀색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세경 씨, 타요.”
조수석 차장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숙인 세경은 운전대를 잡은 예령을 확인하고 차에 올라탔다.
“지금 어디 가는 건가요?”
세경이 안전벨트를 매자 예령이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은 채 예령은 익숙한 듯 차를 몰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저녁 먹기엔 좀 이르기도 해서, 그 전에 누구 좀 만나러 갈까 하고요. 그 사람한테 밥 좀 사라고 하려구.”
“따로 약속이 있으셨던 거예요? 그럼 저랑은 나중에 봐도…….”
“아니. 같이 가도 돼요. 세경 씨도 아는 사람이니까.”
아는 사람? 혹시 심 원장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세경의 추측과 달리 예령의 차는 심 원장의 병원이 있는 청담동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 도로를 달리던 차는 세경의 눈에 익숙한 거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윽고 예령의 차가 멈춰 선 곳은 세경이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여긴…….”
“들어가요. 내가 아는 사람이 여기에서 일하고 있거든.”
당황한 세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예령이 들어가자 한 곳은 바로 세경의 소속사 건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미 건물 경비와도 안면이 있는 듯 예령이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상대도 그녀를 잘 알고 있는지 오랜만에 본다며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소속 연예인보다 사무실 직원을 더 잘 아는 듯한 예령의 모습에 혼란스러워진 건 세경이었다. 예령은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를 끝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반 관장님, 도대체 저희 회사의 누구와 알고 계시는 거예요?”
“곧 알게 될 거예요.”
답을 피한 예령이 세경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한두 번 온 게 아닌 듯 건물 안을 자연스럽게 활보한 그녀가 도착한 곳은 대표실, 즉 태조의 집무실 앞이었다.
“사모님이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예령의 등장에 놀란 김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그는 예령과 함께 있는 세경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안에 있죠?”
김 비서에게 인사를 되돌린 예령이 집무실 쪽을 손짓했다.
“네. 계십니다. 대표님께 바로 알리겠습…….”
“아뇨. 안에 따로 손님이 없으면 바로 들어갈게요.”
인터폰을 든 김 비서를 지나쳐 예령이 문 앞으로 걸어갔다. 똑똑, 노크를 한 그녀가 태조의 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예령이 문 뒤에 숨어버린 탓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태조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건 세경이었다.
“세경 씨?”
허락도 없이 문을 연 사람이 누군가 싶어 미간을 찌푸린 태조가 세경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오늘 포스터 촬영한다고 하지 않았나? 끝나고 바로 온 거야? 왜 연락도 없이…….”
책상에서 일어난 태조가 세경에게 다가왔다. 그때 문 뒤에 있던 예령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형수님?”
응? 형수님?
태조의 입에서 나온 낯선 호칭에 세경이 휙 고개를 돌렸다.
“요즘 자주 보네요, 도련님.”
태조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예령이 세경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