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저 지금 세경 씨랑 사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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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저 지금 세경 씨랑 사귀고 있습니다.
2022.12.24.
태조의 걸음이 중간에 멈추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수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형수님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세경을 보니, 그녀는 예령과 태조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반면 예령은…….
“왜요,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나?”
무해한 척 뻔뻔스럽게 대꾸하는 걸 보니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 지금 같이 온 겁니까?”
“당연히 같이 왔죠. 그럼 요 앞에서 마주친 줄 알았어요?”
“…….”
“그보다 우리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건가?”
당장이라도 저를 내쫓을 듯한 태조의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예령이 딴청을 피웠다.
태조가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돌아가시라 하고 싶지만…….
세경의 넋이 반쯤 나가 있는 것을 보니,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들어오시죠. 차는 뭐로 드릴까요?”
“나는 커피요. 카페인 있는 걸로.”
의도 섞인 예령의 말에 태조의 입술이 가늘게 경련했다.
지금 저건 일부러 저러는 건가? 지난번 자신의 집에서 디카페인 커피를 마셔서?
“세경 씨는?”
“저는…… 차가운 물이요.”
세경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상황이 적응되지 않는 듯 혼란스러운 모양새였다.
하긴 형수님이 사람 혼을 빼놓는 데 일가견이 있으시지.
손가락으로 세경의 손등을 툭, 건드린 태조가 김 비서에게 말했다.
“김 비서님, 여기 아메리카노 두 잔이랑 유자차 하나. 시원한 물도 하나 부탁드립니다.”
“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김 비서에게 차 준비를 맡긴 태조가 소파로 걸어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예령과 달리 세경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태조의 뒤를 쫓아갔다.
“어…….”
당연히 가운데 상석 자리에 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태조가 예령의 맞은편에 앉자 졸지에 자리를 빼앗긴 세경이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반 관장님 옆에 앉아야 하나? 아니면 대표님 옆에?’
다른 때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예령이 태조의 형수님이라는 말에 사소한 자리 배치조차 신경이 쓰였다.
예령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태조와 자신은 사귀고 있는 사이지 않나. 따지고 보면 이 자리가 태조와 같이 그의 가족을 만나는 첫 자리이기도 하고…….
‘잠깐. 그보다 반 관장님은 내가 임신했다고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세경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 빠져 있던 세경이 고개를 들었다. 태조가 세경을 보며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리 와.”
다정한 태조의 목소리에 세경은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대표님, 지금 속 편하게 그런 소릴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요. 왜 계속 서 있어요? 앉아요.”
세경을 혼란스럽게 만든 존재가 어서 앉으라며 손을 파닥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저 손짓이 나가라는 제스처였다면 좋았을 것을.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 꽂히자 세경이 터덜터덜 걸어가 태조의 옆에 앉았다.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온 겁니까?”
김 비서가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커피를 마시는 예령에게 태조가 물었다.
“세경 씨한테 오늘 볼 수 있냐고 하니까, 촬영 끝나면 시간이 난다고 해서.”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형수님이 어떻게 세경 씨를 알고 있는 겁니까? 두 사람 만날 접점이 없는 걸로 아는데.”
“왜 없어요? 잘만 있더만.”
예령이 얄밉게 받아치자 태조가 어찌 된 일이냐 묻듯 세경을 바라보았다. 찬물로 목을 축인 세경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갤러리에서 알게 됐어요.”
“갤러리? 심 원장이랑 간 그 전시?”
세경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을 쓴 태조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예령을 흘겨보았다.
어쩐지 심 원장이 세경에게 전시를 보러 가자고 하는 게 영 이상하다 싶었더니. 중간에 예령의 입김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예령이 세경을 불렀다면 뭔가 계기가 있었을 텐데. 갑자기 왜?
“형수님이 세경 씨를 초대한 겁니까?”
“네. 한번 만나 보고 싶어서요.”
“무슨 일로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거든요.”
“형수님이 왜 그걸 궁금해하시는…….”
“그 사람이죠?”
예령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함축된 질문이었지만 태조는 예령이 말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 사람?’
반면 세경은 당최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심 원장이 전시를 보러 가자고 권한 게 예령의 부탁이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세경은 왜 예령이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 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갤러리에 방문한 날, 예령이 말하기론 자신을 처음 본 게 심 원장의 병원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저 스쳐 지나간 것뿐이라 깊은 인상을 남긴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그 사람이라니? 예령이 말하는 그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세경 씨가 꽤 혼란스러워 보이는데.”
턱을 괸 예령이 세경을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잘 이해가…….”
“음, 그럼 질문을 좀 바꿔볼까요?”
아니요. 그냥 그 질문을 안 하시면 안 될까요?
세경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예령의 저 질문은 들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세경의 속이 타들어 가거나 말거나. 예령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경 씨, 도련님이랑 사귀고 있죠?”
“……네?”
직구로 날아온 질문에 세경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자신이 언제 태조의 연인인 척 티를 낸 적이 있던가?
산부인과에 태조가 같이 갔음에도 심 원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도 못했는데.
“그…….”
대답을 하려는 찰나, 세경은 예령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눈치채고 있다는 걸 다시금 상기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서 자신이 태조와 사귀고 있다는 걸 인정해 버리면, 그 뒤는 임신 이야기로 흘러갈 게 자명한데.
근데, 그걸 이렇게 밝혀도 되는 건가?
‘뭘 어떻게 해야…….’
사방이 가로막혀 도망칠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은 어질어질해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옆에 있던 태조의 손이 세경의 손을 감싸 쥐었다.
“어디서 알아차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 안 돼요, 대표님.
세경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태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맞아요. 저 지금 세경 씨랑 사귀고 있습니다.”
“흐흥, 그래요?”
예령이 묘한 미소를 입에 건 채 세경을 응시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세경이 눈을 감았다.
태조에게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예령이 자신이 입덧한 걸 보았다고.
“그럼 도련님이 아이 아빠겠네요?”
“……네?”
드물게 당황한 태조가 벙진 표정을 지었다.
“설마 몰랐던 건 아니죠?”
“……”
“세경 씨, 임신했잖아요.”
놀란 태조가 세경을 휙 돌아보았다.
‘망했다.’
세경은 속으로 비명을 삼킨 채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사무실 안이 고요해졌다.
연이어 직구를 날려 세경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 예령도 커피만 마시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반예령 관장님이 대표님의 형수님이고, 내가 대표님과 사귀는 것도 눈치챈 데다 임신 사실도 알고 있다는 거지.’
그간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세경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음, 그냥 다 털린 거네…….’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게 무색할 정도였다. 태조와 사귀고 있다는 것도, 자신이 임신한 것도.
“세경 씨, 이제 좀 진정됐어요?”
건너편에서 들려온 예령의 목소리에 세경이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그녀는 세경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세경이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예령은 자신을 경계하는 세경의 태도에 쓴웃음을 지었다.
앞서 만났을 때도 자신을 아주 편하게 대한 건 아니었지만, 태조의 형수님이라는 말에 이전보다 더 거리가 생긴 듯했다.
사실 예령은 이렇게 빨리 두 사람을 만날 생각이 아니었다.
몇 번 더 세경과 사적으로 만나보고, 좀 더 친해진 뒤에 자연스럽게 태조와 함께할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세경이 입덧하는 걸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직은 임신한 태가 나지 않는다지만, 세경이 태조의 아이를 가진 게 확실하다면 두 사람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우리 도련님 언젠가 큰일을 낼 줄은 알았지만.”
“…….”
“그게 이런 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커피잔을 내려놓은 예령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옆에 있는 세경이 움찔거리자, 태조가 걱정 말라는 듯 세경의 손을 잡아 쥐었다.
“형수님은 언제 아셨습니까?”
“어떤 거요? 도련님이 연애하는 거? 아니면 세경 씨가 임신한 거요?”
“전부 다요.”
“의심이 가기 시작한 건 꽤 됐죠. 내가 도련님한테 여러 번 물었잖아요. 세경 씨 임신한 건 최근에. 같이 식당에 갔는데 해산물 요리가 나오니까 입덧을 하더라고요.”
“그냥 속이 안 좋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임신이 아니라고요?”
질문은 태조에게 했지만 예령의 시선은 세경에게 향해 있었다. 마치, 그날 하지 않았던 질문을 지금 한다는 듯이.
“맞아요, 임신.”
“도련님 아이인 것도 맞고요?”
“네.”
“심 원장은 아이 아버지가 도련님인 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태조의 답을 원하는 듯 예령이 그를 힐긋거렸다.
“말 안 했으니까요.”
“왜요? 심 원장이 도련님 멱살이라도 잡는대요?”
“멱살을 잡을지, 목을 조를진 모르겠는데. 암튼, 가만두지 않을 건 확실하군요.”
“하긴 심 원장이 세경 씨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으니까.”
심 원장의 반응이야 뻔하다는 듯 예령이 픽 웃었다.
“외부에 안 알려진 거 보면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모양이에요?”
“소수만 알고 있습니다. 아이 아빠가 저라는 건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고요.”
“언제 말하려고 했어요? 세경 씨가 아이를 가졌으면 가족들에게도 알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수님.”
태조가 나직한 목소리로 예령을 불렀다.
“세경 씨가 제 아이를 가진 건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정하는 건 우리 두 사람의 일이에요.”
“…….”
“세경 씨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배우고, 결혼도 안 한 상태에서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면 이미지에 타격이 갈 수도 있어요. 게다가 곧 새 드라마의 방송을 앞두고 있는데, 지금은 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예령을 보는 태조의 눈빛엔 날이 서 있었다. 평소 본가에서 보여주던 부드러운 분위기도 온데간데없었다.
“알아요, 말 안 했다 탓하는 건 아니고. 나는 다만 나중에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어머니가 들으시면 서운해하실까 봐 그러죠.”
과한 참견이었다면 미안하다는 듯, 사과를 한 예령이 세경의 눈치를 봤다. 세경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는지 난처한 미소만 흘렸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대표님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해서요.”
“그런 와중에 내가 알아버린 거네요. 세경 씨 임신한 걸?”
“네.”
음. 짧게 목을 울린 예령이 팔짱을 꼈다.
사실 두 사람이 사귀는 데다 아이까지 가졌으니 결혼에 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나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아직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힐 생각이 없는 건가?
“일단 알았어요. 아직은 가족이든 누구든 다 비밀이란 소리죠?”
“네.”
예령의 말에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현 씨나 석주 씨는 알아요?”
“몰라요. 아직은.”
그럼 윤조 씨가 물어봤어도 알지 못하겠구나. 예령이 살짝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중에 우현 씨가 알면 배신감에 치를 떨겠는걸?”
“치를 떨기 전에 기자들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윤조 씨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형한테 말하면 어머니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 아닙니까?”
태조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눈으로 예령을 쏘아보았다.
“우리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는데.”
입을 삐죽거린 예령이 알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겠어요. 당분간 윤조 씨한테도 비밀로 할게. 대신 너무 오래 시간 끌지 말아요. 어머님이 도련님 결혼 상대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데…….”
말끝을 늘인 예령이 세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며느리에 손주까지 데려오면 기쁨이 두 배시지 않겠어요?”
“세경 씨 드라마 끝날 때쯤,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그럼 용건도 끝났으니 우리 슬슬 일어날까요?”
“우리?”
자리에서 일어난 예령이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태조의 옆에 있는 세경을 눈짓했다.
“나랑 세경 씨, 저녁 먹으러 가야지. 그거 때문에 만난 거였는데.”
“그럼 저도…….”
태조가 같이 나갈 것처럼 몸을 일으키자 예령이 인상을 썼다.
“뭐예요? 우리 밥 먹는데 도련님도 끼려고?”
“왜요,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되죠. 나랑 세경 씨만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
“그래서 말인데요, 도련님.”
예령이 태조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인상을 쓴 태조가 이게 뭐냐는 눈으로 보자 예령이 말했다.
“도련님 카드 좀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