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아직도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 (43/100)


43. 아직도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
2022.12.28.



 
태조에게 강탈하듯 카드를 빼앗은 예령은 세경과 함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태조는 같이 오지 못했다.

예령이 따라오지 말라는 눈치를 주기도 했거니와 강 상무가 회의를 하자며 태조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음식은 어때요? 입에는 잘 맞아요?”

“네. 맛있네요.”

세경이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지난번 부야베스 냄새에 입덧을 해서 그런지 예령은 음식을 주문할 때 해산물이 들어간 건 일절 시키지 않았다.


“이것도 먹어요.”

예령이 먹기 좋게 자른 스테이크를 세경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관장님도 드세요.”

“난 됐어요. 이거 세경 씨 먹으라고 시킨 거예요. 저번에 블랑에서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겼잖아.”

그러니 어서 먹으라고 예령이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경이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자 예령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음, 일단 나 세경 씨한테 사과부터 할게요. 태조 형수님이라고 말하지 않은 거, 나쁜 마음은 아니었어요. 세경 씨한테 밝히면 날 불편하게 여길까 봐. 나는 그냥 세경 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

세경이 입 안에 있는 고기를 꿀꺽 삼켰다.

확실히 예령이 태조의 형수님이란 걸 알았다면 아까처럼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쓰이긴 했을 거였다. 사실 지금 이 자리도 그리 편한 건 아니었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보다 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요? 물어봐요, 뭐든.”

“대표님이랑 이야기할 때 제가 ‘그 사람’이냐고 말하셨잖아요. 혹시 전부터 절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아아, 그거요?”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기억을 더듬던 예령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 사람이 세경 씨라고 확신한 건 얼마 안 됐고. 도련님한테 여자가 있나 하는 의심이 들었던 건 좀 됐어요.”

“어떤 점에서요? 대표님이 무슨 말이라도 하신 거예요?”

“으응. 그건 아니고. 저번에 가족들이랑 저녁을 먹는데 도련님 몸에서 어울리지 않게 달달한 향기가 나더라고요.”

“달달한 향기요?”

“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경 씨 향수 냄새랑 똑같은?”

향수 냄새라고?

세경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아마 태조에게 디퓨저와 향수를 전해줬을 때의 이야기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갤러리에서 만났을 때 예령이 제게 무슨 향수를 쓰냐고 묻기도 했었지. 그때 자신이 뭐라고 답을 했더라…….


‘향수 냄새일 거예요. 시중에 파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만든 거고요.’

 
커스텀 상품이라고 제 입으로 털어놓았구나. 하지만 어떻게 그걸 계속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그 향을 계속 기억하고 계셨어요?”

“도련님이 여자 향수 냄새를 온몸에 두르고 온 게 워낙 드문 일이라. 그 정도면 하루 종일 같이 있든가, 아니면 내내 끌어안고 있었나 싶을 정도였거든.”

아…… 대표님, 제 향수로 대체 뭘 하신 거예요.


“몇 시간 동안 맡았더니 그 향이 머릿속에 콕 박혀 버렸나 봐요. 내가 심 원장 병원에서 세경 씨랑 부딪칠 뻔한 적 있었잖아요.”

“네. 그때 절 처음 보셨다고.”

“아마 그날이었을 거예요. 세경 씨가 지나갔을 때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기가 났었거든. 바로 생각이 안 났는데, 시댁에 가서 어머니랑 이야기하다가 떠올랐어요. 그게 도련님한테서 맡은 향수 냄새라는 걸.”

“그럼 그때부터 의심하신 거예요?”

“두 사람이 사귀는 것까지는 몰랐고, 썸이라도 타는 줄 알았죠. 그래서 도련님을 찔러봤는데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아…….”

세경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녀는 이제 예령이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세경이 임신했다는 걸 눈치챈 것도 그렇고, 향수 냄새 하나로 태조와 자신의 관계를 추측한 것도 그렇고.

사람의 촉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는 건가?


“놀랐어요? 그것만으로 어떻게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했나 싶어서?”

“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경이 귀여워 예령이 웃었다.


“좋게 말하면 감이 뛰어난 건데. 이것도 집안 내력인가 싶어요. 우리 집안 사람들이 다 법조계 종사자라 뭔가 하나 의심스러운 게 있으면 계속 물고 늘어지거든. 고집스러운 면도 있고.”

“…….”

“솔직히 이것도 맞아야 감이 좋은 거지. 못 맞추면 그냥 헛다리 짚은 거예요. 사실 나도 심 원장 때문에 중간에 좀 혼란스러웠어요. 세경 씨는 애인이 있다고 하는데, 그 상대가 도련님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확신하신 거예요?”

“며칠 전에 도련님 집에 갔다가 물어봤거든요. 그 향수 주인하고 잘 되고 있냐고.”

그때를 말하는 거였다. 태조의 모친이 보내준 반찬으로 밥을 비벼 먹었던 날.

형수님이 오셨다는 말에 단순히 음식만 전해주고 간 줄 알았는데,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저런 말이 오갔었구나.


“그랬더니 도련님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요?”

“아뇨. 어머니께 올해 안에 소개해 드리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은 결혼하고 인연이 없는 걸로 아시라고 했대요.”

“…….”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세경의 심장이 들썩거렸다. 아직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세경과 달리 태조는 이미 그녀와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세경 씨 입덧 하는 거 보고 두 사람이 결혼에 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끝낸 줄 알았어요.”

“대표님 가족들에겐 나중에 알리려고 했어요. 그분들이 저를 반기실지도 잘 모르겠고…….”

세경이 보호하듯 자신의 배를 감쌌다.

예령은 생략된 말속에 숨겨진 세경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본인뿐만 아니라, 배 속의 아이까지 태조의 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겠지.

많이 변했다 해도 재벌가 사람들 중엔 여전히 이득과 조건을 따져가며 결혼하는 일이 빈번했고, 태조는 미혼의 신랑감 중에서도 노리는 이들이 많을 정도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세경 씨도 배 속의 아이도 다 좋아할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요. 나중에 세경 씨 인사 오면 내가 옆에서 편도 들어줄게요. 내가 우리 남편이랑 연애할 때 도련님한테 도움을 좀 많이 받았거든.”

나만 믿으라는 듯, 자신감 넘치는 예령의 모습에 세경이 웃었다. 막연히 두려워질 어느 순간에 저를 이끌어줄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것 같았다.


“아, 세경 씨는 우리 어머님 본 적 없죠?”

“네. 아무래도 뵐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사진으로도 본 적 없어요? 그래도 예전에 대표직에 있을 땐 언론엔 몇 번 노출 되었을 텐데. 다 홍보팀에서 나간 사진뿐이겠지만.”

언제 인사드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익혀 두라며 예령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핸드폰에 사진 하나를 띄워 세경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우리 어머님. 사진은 좀 무섭게 나오긴 했는데 실제론 아주 다정한 분이세요.”

“…….”

세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나…… 이분 앞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 우아한 검은색 정장과 어우러진 표범 무늬 실크 스카프.

흡사 한 마리의 맹수 같은 눈빛을 한 마 여사의 모습에 세경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

퇴근 후 태조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디저트를 먹고 있는 중이었다.


“도련님도 뭐 먹고 갈래요?”

“됐습니다, 저는.”

예령의 권유를 단박에 튕겨낸 태조가 세경의 옆에 앉았다. 세경이 제 몫의 케이크를 태조 쪽으로 밀어주자, 그가 괜찮다며 세경에게 어서 먹으라 눈짓했다.


“형수님. 세경 씨한테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니시죠?”

“이상한 소리라니. 날 뭐로 보고.”

예령이 퍽 억울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태조는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 듯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나마 예령을 더 추궁하지 않는 건 세경의 표정이 썩 나쁘지 않아서였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시죠.”

세경이 디저트 접시를 비우자 태조가 말했다. 예령도 잔을 내려놓으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래요. 도련님은 요 앞으로 차 가지고 와요. 나랑 세경 씨는 5분만 있다가 같이 나갈게.”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경이 그의 팔을 잡았다.


“정말 아무것도 안 드셔도 괜찮겠어요?”

“괜찮아. 별로 생각 없으니까. 천천히 나와. 앞에서 기다릴게.”

세경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놓은 태조가 먼저 룸을 나섰다. 턱을 괴고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예령이 생글거렸다.


“와, 우리 도련님 눈에서 꿀 떨어지겠네.”

보기 좋다는 듯 장난스럽게 말한 예령이 빌지를 챙겼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낸 예령은 아까 전 강탈한 태조의 카드를 세경에게 건넸다.


“오늘은 사과의 의미로 내가 살게요. 도련님 카드는 세경 씨가 가지고 있어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걸로 마구 긁고.”

“저번에도 관장님이 사셨는데. 오늘은 제가 낼게요.”

세경이 빌지를 가져가려고 하자 예령이 손을 뒤로 뺐다.


“안 돼요. 세경 씨가 살 거면 도련님 카드로 긁지, 내가. 그보다 계속 관장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거리감 느껴지게.”

“그럼 어떻게 부를…….”

“심 원장처럼 예령 언니라고 불러요.”

이, 이렇게 갑자기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세경이 입을 달싹거렸다. 그녀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자 예령이 웃었다.


“지금 당장 입이 안 떨어지면 다음부턴 그렇게 부르고. 나가요. 도련님 기다리겠다.”

예령이 빌지를 흔들며 룸을 나섰다. 세경도 가방을 챙겨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레스토랑 앞에 서 있는 태조의 차가 보였다.


“들어가요, 세경 씨. 다음에 또 보고.”

“네. 조심히 가세요.”

예령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차에 올랐다. 태조가 조수석 차창을 내리고 예령을 쳐다보았다.


“형한텐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알았다니까.”

“…….”

“진짜로.”

거참,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예령이 비밀은 지키겠다며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갈게요.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형수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태조가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로 예령의 모습을 지켜본 태조가 세경에게 물었다.


“형수님하고 무슨 얘기 했어?”

“별말 안 했어요. 미리 형수님이라고 알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참, 대표님 카드도 저한테 주셨는데.”

세경이 카드를 꺼내자 태조가 옆을 힐끗거렸다.


“결제 문자가 안 왔던데.”

“레스토랑에선 관장님이 내셨어요.”

“그래? 그럼 그건 세경 씨가 갖고 있어.”

“제가요? 왜요?”

“필요할 때 쓰라고. 왠지 형수님이 또 세경 씨를 불러낼 것 같거든.”

세경이 카드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이렇게 받아도 되나.


“대표님은 사귀는 사람한테 막 카드도 주고 그러세요?”

“아니. 안 그러지.”

세경이 슬쩍 태조를 쳐다보자, 그도 시선을 내려 세경과 눈을 맞췄다.


“결혼할 사람이면 몰라도.”

“결혼…….”

세경이 그의 말을 되뇌었다. 이따금씩 흘리듯 말했던 ‘결혼’이란 단어와 지금의 말은 다가오는 의미가 달랐다.

책임감에 하는 결혼은 싫다고 하자, 태조는 그 이후 직접적으로 세경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앙꼬의 아빠로, 연인으로서 그녀를 챙기며 세경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렸을 뿐.

사실 태조와 사귀면서 이따금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면 어쩌나.

원치 않게 생긴 아이를 그가 귀찮다고 여기면 어느 날 제게 이별을 고하고 마음을 접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불안 같은 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심 마음 한구석엔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태조가 오히려 자신을 가족들에게 소개할 생각이 있다는 것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어쩌면 아이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기 위한 각오가 부족했던 건 자신이 아니었을까.


“세경 씨, 이제 큰일 났네.”

“뭐가요?”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는 태조의 집 주차장에 들어섰다. 엔진 소리가 꺼지자 차 안엔 적막함이 감돌았다.


“형수님이 우리 관계를 알아차렸으니, 이제 발 빼기도 힘들겠어.”

핸들에 팔을 괸 태조가 입술을 끌어올렸다.

큰일 났다는 말은 왠지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태조가 저 말을 하면서 더 즐거워 보이는 걸까.


“아직도 저랑 결혼하고 싶으세요?”

“응. 처음 결혼하자 했을 때보다 더.”

“…….”

“앙꼬 자라는 것도 귀엽고 윤세경은 더 귀여워서.”

태조가 세경의 얼굴로 팔을 뻗었다. 부드럽게 뺨을 감싼 손이 붉은 입술을 탐내듯 문질렀다.


“그래서, 세경 씨는 아직도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직은 조금 성급한 것 같단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도 싶었다.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내 아이의 아빠라고.

그리고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한다고.


“이번에 드라마 방송 끝나면.”

세경이 태조의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세경의 입술에 태조의 몸이 흠칫거렸다.

그녀는 태조와 눈을 맞춘 채, 그의 손바닥 위에서 속삭였다.


“태조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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