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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불길한 징조 (44/100)


44. 불길한 징조
2022.12.31.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주희는 힐끔힐끔 저를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일로 부르는 걸까.’

대표실로 향하는 주희의 얼굴엔 걱정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할 말이 있다며 갑작스럽게 저를 호출한 안규학 대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였다.

현 소속사인 A&J 엔터와 계약을 한 게 이제 1년 반. 처음 계약을 할 때 본 걸 제외하면 주희가 안 대표와 마주친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소속사 행사에 참석해 스치듯 인사를 나눴던 게 전부였지, 웬만한 일은 실장급이나 매니저를 통해 이루어진 터라 그녀가 직접 대표를 만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이 호출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감이 오지 않았다.

물론 예전 소속사에서 대표에게 불려갔을 땐 늘 좋지 않은 소식들만 전해 들었다.

너희들 앨범 작업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구나.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앨범일지도 모르겠구나, 등등.

그리고 마지막은 아주 최악이었다. 그날은 계약 만료와 그룹의 해체를 알리는 자리였으니.


“안녕하세요.”

안 대표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비서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주희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인 채 용건을 말했다.


“대표님을 뵈러 왔는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화기를 든 비서가 안 대표에게 주희의 도착을 알렸다. 팔짱을 낀 주희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대표실 문을 노려보았다.


“주희 씨, 대표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비서의 말에 문 앞으로 걸어간 주희가 노크를 했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후, 하고 숨을 내쉰 주희가 뻣뻣하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문을 연 주희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무표정한 좀 전과 달리 입가엔 옅은 미소도 걸려 있었다.


“어. 거기 앉아.”

안 대표가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까닥거렸다. 무심한 응대에 표정을 굳힌 주희가 소파에 앉았다.


“여기 커피 두 잔만.”

비서에게 커피를 부탁한 안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상석 자리에 앉자 비서가 준비한 커피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요즘 뭐 힘든 거 없지?”

안 대표가 투박하게 잔을 집어 들고 커피를 마셨다. 쫙 벌린 손으로 잔 위쪽을 잡아든 모양새가 커피가 아닌 막걸리를 마시는 듯했다.


“네. 뭐, 아직까지는.”

“응. 그렇겠지. 일이 아주 많은 건 아니니까.”

웃는 낯이었지만 안 대표의 말엔 뼈가 있었다.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에 주희는 손에 쥔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


“요즘 네 친구들 잘나가더라?”

“제…… 친구들이요?”

“어. 이유나인가? 요즘 예능에 얼굴 자주 보이는 애 있잖아. 윤세경이야 뭐, 예전부터 배우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주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표정이 쉽게 풀어지지 않자 그녀는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윤세경은 이번에 너랑 비슷하게 드라마 들어가는 거 같더라? 아, 그쪽은 사전에 제작 다 해서 촬영도 없겠네. 그럼 홍보에 열을 올리려나? 참 아까워. 너네 계약 만료됐을 때 내가 먼저 윤세경을 잡았어야 했는데.”

진 엔터에 뺏긴 게 아쉬운지 안 대표가 짧게 혀를 찼다.

주희는 불쾌감에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짜증 나게, 왜 제 앞에서 윤세경을 띄우는 건지.


“이유나는 아직 소속사가 없는 거 같던데. 주희 너, 그 친구 연락처 알지?”

“유나요? 글쎄요. 연락처는 가지고 있는데 번호가 그대로인지는…….”

주희의 대답에 안 대표의 미간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뭐? 몇 년 동안 같이 활동했으면서 너넨 서로 연락도 안 하냐?”

“…….”

“아니. 네가 안 하는 건가? 윤세경은 이유나 결혼식도 가고 중간중간 이야기도 나오는 걸 보면, 지금도 계속 연락 하고 지내는 거 같던데.”

저를 힐난하는 안 대표의 말에 주희가 이를 으득 물었다.


“유나는 해체하고 연예계 활동을 안 해서 연락할 일이 없었어요. 사이가 나쁜 건 아니고요.”

“그럼 이유나랑 연락은 가능해?”

“네. 번호가 바뀌었으면 다른 멤버한테 물어보면 돼요.”

주희가 발끈해 대답하자 안 대표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그러면 네가 이유나한테 연락해서 한번 말해봐라. 우리랑 계약할 생각 없냐고.”

“계약…… 이요?”

“그래. 조건은 다른 데서 요구하는 거 최대로 맞춰 주겠다고 하고.”

“그걸 왜 제가…….”

자기가 직원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주희가 인상을 썼다. 그러자 안 대표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여러 곳에서 접촉은 했는데 이유나가 아직 결정을 못 했다 하더라고. 그래도 한때 같은 멤버였는데, 네가 슬쩍 말이라도 흘리면 이유나도 우리 쪽에 더 관심을 가지지 않겠어?”

지금 저를 부른 게 고작 이유나의 계약 때문이었나?

치솟는 짜증을 삼키며 주희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일단 말은 해볼게요. 너무 기대는 마시고요.”

“그래. 말만 한번 해 봐.”

“하실 말씀은 그게 다예요? 그럼 저 이만 가 봐도 되죠?”

잔을 내려놓은 주희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안 대표가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다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앉아. 아직 본론은 시작도 안 했어.”

엉거주춤 일어나 있던 주희가 안 대표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유나 계약 건도 중요한 거긴 한데.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다른 용건이 있어서야.”

“말씀하세요.”

“윤세경, 이유나에 비해 아직 네 인지도가 한참 떨어지는 거 알지?”

면전에 대고 저를 깎아내리자 주희의 뺨이 파르르 경련했다.

인지도가 떨어지다니. 그래도 데뷔를 했을 때 그룹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내 말에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고. 냉정하게 현실을 보라는 거야.”

“그거야 제가 연기를 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죠. 저도 곧…….”

“곧? 곧 언제? 10년? 20년 뒤? 너 드라마 출연한 것도 꽤 돼. 근데 한 번도 화제가 안 됐어. 게다가 얼마 전부터 예능에 나오는 이유나보다도 사람들이 몰라보잖아.”

주희가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왜 자꾸 자신과 두 사람을 비교하는 건지. 할 수만 있다면 제 손에 든 가방을 안 대표의 얼굴에 집어 던지고 싶었다.


“저도…… 기회가 없을 뿐이지. 예능에 나가면 유나 정도의 인기는 금방 얻을 수 있어요.”

“그래서 윤세경이랑 나간 예능에서 활약은 좀 하고 들어왔나?”

“…….”

“기회는 본인이 만들어야지. 예능에 나갔으면 가서 좀 망가지기도 하고. 재미도 없는데 무슨 예능 프로에서 섭외가 오겠어.”

안 대표가 비아냥거리며 주희의 속을 긁어댔다.

자존심이 상한 주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말인데, 주희 너 너튜브 할 생각 없어? 채널 하나 만들어서 그거라도 찍어 봐. 이유나도 하나 가지고 있더만.”

말끝마다 이유나와 윤세경!

아주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좋으면 걔들과 계약을 하지, 왜 자신과 계약을 해서는!


“저는 찍고 싶은 것도 없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일을 하나 더 잡는 게 낫지.”

“뭘 찍을지는 앞으로 고민할 일이고. 지금은 일상 로그라도 찍어 올리라고. 뭐라도 해서 널 알려야 일이든 뭐든 잡을 거 아니야.”

안 대표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주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테이블만 내려다보았다.


“한번 고민해 봐. 할 생각 있으면 제작팀 있으니까. 이 팀장에게 말하고.”

“…….”

“가 봐.”

제 용건은 그게 끝이라는 듯, 안 대표가 축객령을 내리며 손을 내저었다.

주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짜증 나.’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복도를 걷는 주희의 구두 굽 소리가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

벌어진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꿈지럭거리며 어딘가로 파고들던 세경은 단단한 무언가에 막히자 눈가를 찡그렸다.


“으음.”

목을 울린 세경이 머리를 비비다 살며시 눈을 떴다. 반개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탄탄한 근육과 헐벗은 상체였다.


‘누가 이렇게 벗고 있는…….’

응? 벗어?

순간 잠이 확 깬 세경이 눈을 부릅떴다. 눈을 몇 번 깜빡인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태조가 자신을 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아니, 그새 가운은 어디 가고…….’

세경이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 윙체어에 태조가 입고 있던 가운이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잘 때는 옷을 벗고 잔다더니.

저와 같이 자려면 가운이라도 걸치고 있으라는 말에 마지 못해 입고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결국 불편해 벗어버린 모양이었다.


‘뭐, 지금은 자고 있으니까.’

세경은 다시금 침대에 누워 태조를 바라보았다.

어쩜 자는 모습도 이렇게 잘생겼나 싶었다.

짙고 긴 속눈썹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코끝, 가끔은 얄밉지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입술까지.

세경은 조용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다 이마에 남은 희미한 상처 자국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언제 다친 거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태조의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 올렸다. 꽤 심한 상처였는지 상흔은 이마에서 머리 위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처가 난 거람.

제가 겪은 일도 아닌데, 괜히 아팠을 그때가 떠올라 세경이 몸을 떨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태조의 상처를 관찰하다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시지?’

핸드폰을 찾아 고개를 돌린 세경이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오전 9시 45분.

주말이라 늦잠을 자긴 했지만,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었다.

세경은 제 허리에 올려진 태조의 팔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매번 태조가 제 식사를 차려주니 그가 일어나기 전에 간단히 아침이라도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두 팔을 뻗어 굳은 몸을 푼 세경이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앗!”

발라당 뒤로 넘어간 세경의 몸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떼어놓은 태조의 팔이 어느새 세경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었다.


“이, 일어나셨어요?”

“응.”

대답하는 태조의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었다.

그가 세경의 등 뒤로 몸을 바짝 붙여왔다. 얇은 옷감을 사이에 두고 아침부터 건강한 태조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좀 놔주시면……. 저 아침 차리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세경의 목덜미로 지분거리는 입술과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간질간질한 그 느낌에 발끝이 꼼지락거렸다.


  


“저기요, 대표님.”

태조의 손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오자 세경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가 세경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목덜미를 움켜쥔 세경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뭘 그렇게 봤어?”

태조의 물음에 세경의 시선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아까요? 자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계속 꼬물거리면서 품으로 들어오는데 잘 수가 있어야지.”

고양이?

아, 나 말이구나.


“그때부터 깨어 있었으면서 왜 안 일어나시고요.”

“나 자고 있으면 뭘 할까 궁금해서.”

태조가 세경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렸다.


“가운은 왜 벗으셔선.”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이제 익숙해져야지.”

익숙해지기 전에 제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요.


“여기 이마에 있는 거 상처 맞죠?”

세경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태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가 세경의 손이 닿는 곳을 더듬어 보았다.


“아, 이거?”

“네. 어쩌다 다친 거예요?”

“음, 별로 좋은 이야긴 아닌데.”

태조가 상처 부위를 문지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었는데요. 혹시 싸웠던 거예요?”

“싸웠다기보다는 휘말렸었지. 질 나쁜 취객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다쳤어. 이건 그때 난 상처고.”

“어떻게 휘말리면 이렇게 상처가 남을 정도로 다쳐요?”

“아는 사람이 그 술자리에 있었는데, 그걸 빼 온다고 나섰다가 이런 거야.”

아는 사람? 그게 대체 누구기에…….


“이거 봐. 이런 얼굴 할까 봐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 얼굴이 뭐 어떤데요.”

“속상해 죽겠다는 얼굴.”

“…….”

“걱정 마.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니까.”

태조가 뚱해진 세경의 볼을 툭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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