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여기에 맞추면 되겠네요.
(4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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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여기에 맞추면 되겠네요.
2023.01.04.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세경은 거실에 앉아 제작사 측에서 보내준 자료를 보고 있었다.
곧 <우아한 가족>의 제작 발표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이미 사전 제작을 다 한 터라 제작 발표회라기보다는 기자 간담회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첫방도 얼마 안 남았네.”
태조가 커피를 들고 세경의 옆에 앉았다. 포크로 애플망고를 찍어 먹던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세경은 포크를 입에 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여타 다른 작품도 첫 방송을 하기 전엔 늘 걱정이 되고 떨렸지만, <우아한 가족>은 유독 부담감이 더 컸다.
드라마 자체가 세경을 위주로 돌아가기도 했거니와 같이 일한 피디와 작가의 팬층이 꽤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드라마가 생각보다 잘 안 되면 비난의 화살은 온전히 제게로 떨어질 터였다. 거기에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게다가 이 드라마가 끝나면 태조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드리기로 하지 않았던가.
‘으음.’
세경은 일전에 본 마 여사의 사진을 떠올리곤 침음을 삼켰다. 그녀는 태조가 가져다준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왜?”
소파에 앉아 드라마 관련 자료를 보고 있던 태조가 세경과 눈을 마주쳤다.
“대표님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우리 어머니?”
뜬금없는 물음에 태조가 느리게 눈을 굴렸다.
“예전에 JK 푸드 대표로 있을 때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닐 텐데. 봤어?”
“인터넷은 아니고, 반 관장님이 보여주신 걸로요.”
“아아. 뭐. 그럼 본 대로…….”
태조가 모친을 표현할 마땅한 단어를 찾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강내강?”
“외유내강이…… 아니시고요?”
“사진 봤다며. 우리 어머니 스타일이 부드러워 보이진 않았을 텐데.”
네. 카리스마가 액정을 뚫고 나올 것 같긴 했죠.
“겉도 강해 보이시는데 속도 강하시지. 어머니가 푸드 회사 대표로 계실 때 별칭이 범 대표님이었으니까.”
“…….”
“아, 그렇다고 무서운 분은 아니야.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잘 챙기시거든. 가족들에게도 다정하시고.”
저는…… 아직 가족이 아니잖아요.
세경이 울상을 했다. 대표님 가족에게 인사드리는 거, 조금 미뤄야 하는 게 아닐까?
“대표님 가족들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형수님 반응하고 비슷할 거 같은데.”
세경이 꾸물꾸물 태조의 옆으로 다가갔다.
예령과 비슷한 반응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마 여사의 얼굴에 예령의 반응을 대입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그보다 형수님이랑 계속 연락하는 거야?”
“네. 나중에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
뭔가 못마땅한 듯 태조가 인상을 썼다. 세경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안 돼요?”
“아니. 상관은 없는데.”
태조가 세경을 허리를 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자주 만나지는 마.”
“왜요?”
“형수님한테 세경 씨 뺏길 거 같거든.”
태조의 대답에 세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그게.”
“농담 아니야. 동서 생기면 자기랑 놀 궁리만 하시던데.”
“좋네요. 그거. 대표님은 바빠서 나랑 못 놀잖아요.”
“왜 못 놀아. 앙꼬만 태어나 봐.”
태조의 손이 굴곡진 허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가늘게 몸을 떤 세경이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지긋이 떨어진 시선이 정염으로 물들었다. 고개를 내린 태조가 세경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할 거야.”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세경의 귓불을 살짝 깨문 태조가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목덜미로 떨어지는 입술을 따라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피부를 간질이는 느낌에 세경이 몸을 움츠리자 순간 태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
그가 눈만 들어 세경을 바라보았다.
달뜬 얼굴이 옅게 익어 복숭아처럼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게 귀엽다는 듯 몸을 세운 태조가 세경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으음.”
시선이 얽히고 숨결이 뒤섞였다.
그녀는 태조의 어깨를 붙잡은 채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사이, 셔츠 위를 배회하던 손이 은근슬쩍 안으로 파고들었다.
세경은 맨살을 쓸어내리는 감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누가 엉큼한 건지…….’
세경이 웃자 태조가 입술을 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힘에 밀려 기우뚱거린 세경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왜 웃어?”
세경의 위로 몸을 기울인 태조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진짜 엉큼한 게 누군가 싶어서요.”
“그러게 왜 건드려서는.”
“누가요? 먼저 입 맞춘 건 대표님인…….”
반박하는 세경의 입을 태조가 입술로 막아버렸다. 세경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각도를 바꿔가는 키스에 코끝이 부딪치고 입술이 비벼졌다.
거듭 붙었다 떨어진 두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태조가 세경의 입술을 문지르며 다시금 고개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연속해서 몸을 떨어대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두 사람의 행위도 잠시 멈추었다.
“……세경 씨 거네.”
테이블을 곁눈질한 태조가 아쉬운 듯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핸드폰을 건네주자 세경이 전화를 받았다.
“어, 유나야.”
세경이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태조는 그녀를 일으켜주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 뭐 해? 집이야?
“어, 그게…….”
뭐라고 말을 할까. 세경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까 전 태조가 보고 있던 드라마 자료를 쓱 끌어왔다.
“곧 있을 제작 발표회 대답 준비하고 있었어.”
세경이 흠, 헛기침을 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괜히 목이 잠겼다.
- 제작 발표회? 사전 제작 드라마라더니. 첫방 전이라고 홍보차 하는 건가 봐?
“제작 발표회라고 해도, 방송 전에 하는 기자 간담회 같은 거지. 너는 뭐 하고 있어? 오늘도 촬영이야?”
- 어. 잠깐 쉬는 시간에 할 일도 없어서 너한테 전화하는 거야. 아 참, 너 혹시 주희한테 전화 왔었니?
“주희? 아니, 안 왔는데. 왜? 너한테 전화 왔었어?”
- 어. 웬 낯선 번호가 뜨길래 작가님이 줄 알고 전화를 받았더니, 임주희라네? 그러더니 아직 소속사 어디 갈지 결정 안 했으면 자기네 회사랑 계약할 생각이 없냐고 하더라.
“그래? 주희가 어디 소속산데?”
- A&J인가? 암튼, 나도 잘 모르는 데야. 근데 좀 웃기더라. 몇 년 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뜬금없이 전화해서 자기네 소속사랑 계약하자 하는 것도 그렇고. 자기 너튜브 채널도 개설했는데 나중에 같이 촬영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요즘 유나가 활동 영역이 넓어지니 관심이 좀 생긴 건가?
“그래서 뭐라고 했어?”
- 아직은 생각 없다고. 지금은 내가 바빠서 너튜브 같이 찍기도 힘들 것 같다고 하니, 그냥 알았다면서 끊더라고.
“네가 잘나가니까, 그쪽 소속사도 관심을 보이나 보네.”
- 그런가? 그럼 뭐 해. 내가 관심이 없는걸. 알았어. 난 또 혹시 너한테도 연락을 했나 해서. 제작 발표회 준비 잘하고, 내가 다음에 또 연락할게.
“응. 촬영 잘 해. 수고하구.”
세경이 전화를 끊자, 태조가 얼음물을 들고 걸어왔다.
“예전에 같이 활동했던 유나 씨?”
“네.”
“새로 소속사 찾는 중인가 봐?”
“요즘 활동이 많아져서요. 지금은 혼자 다니는데…….”
세경이 말끝을 흐리며 태조를 바라보았다.
“우리 회사는 무리일까요?”
진 엔터는 배우 위주의 매니지먼트사였다. 물론 그중에는 예능 프로에 출연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소속 연예인의 주 활동 영역은 당연히 다들 드라마나 영화 쪽이었다.
“왜? 유나 씨가 우리 회사에 왔으면 해서?”
“오면 좋죠. 하지만 제가 원한다고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우리 회사에 소속된 사람들은 거의 다 배우이기도 하고.”
“그렇긴 한데. 시작이 배우들 위주라 그렇지 딱히 선을 그어놓은 건 아니야. 이번에 새로 레이블 만든 곳은 가수와 예능인 위주로 키울 생각이기도 하고. 다만, 그쪽은 강 상무가 전담하는 거라 내가 하고 싶다 해도 우현이 의견도 들어봐야 해.”
음, 역시 좀 무리였나.
세경이 아쉬운 듯 코끝을 찡긋거리자 태조가 말했다.
“그래도 우현이한테 이야기는 한번 해둘게. 이유나 씨 한번 주의깊게 보라고.”
차가운 물을 들이켠 태조가 세경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
정오에 가까워지자 높아진 태양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오전에 미팅 하나를 마친 태조가 청담동에 위치한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11시라.”
태조는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우아한 가족>의 제작 발표회 겸 기자 간담회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일정이 끝나는 대로 작가와 피디를 만나기로 했으니,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진 대표님.”
태조가 고급스러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여성이 웃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성 매니저님.”
“그러게요.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미리 전화 주셨으면 저희가 필요한 걸 준비해뒀을 텐데.”
“저도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어머니 생신이 얼마 안 남아서, 선물로 드릴 만한 걸 추천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마 여사님께 선물하시려고요? 혹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실까요? 브로치나 목걸이, 아니면 세트 상품도 있고요.”
“작년에 목걸이를 해드려서. 이번엔 브로치가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럼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마 여사님 취향을 고려해서 몇 개 가져와 볼게요.”
태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 매니저가 안쪽에 있는 은밀한 공간으로 사라졌다. 그는 쇼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는 보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반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태조의 다리가 중간에 우뚝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상품에 집중되었다.
“대표님, 안쪽 응접실로 들어가시겠어요?”
고급스러운 가죽 케이스를 손에 든 성 매니저가 태조에게 물었다.
“그거 여기서 봐도 될까요?”
“앉아서 보시는 게 더 편하시지 않겠어요?”
“다른 것도 볼 게 있어서.”
태조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매니저가 쇼케이스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하곤 싱긋 웃었다.
“그러세요.”
쇼케이스 안쪽 공간으로 들어간 성 매니저가 가지고 온 박스를 열어 태조의 앞으로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다이아와 진주, 루비, 토파즈 등을 박아 만든 7개의 브로치가 담겨 있었다.
“이건 예전에 마 여사님이 보고 가신 거예요.”
태조가 신중하게 브로치를 살피자 성 매니저가 추천하듯 말했다. 그녀가 가리킨 건 우아한 풀잎 모티프의 사파이어 브로치였다.
“따로 구입은 안 하셨고요?”
“네. 저번에 오셨을 때 브로치는 보기만 하시고 다른 걸 사 가셨어요.”
“그럼 이걸로 포장해 주세요. 그리고…….”
태조가 좀 전부터 보고 있던 반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 좀 보고 싶은데.”
“이 커플링 말씀하시는 거죠?”
매니저가 쇼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태조에게 보여주었다.
“대표님이 착용하시는 건가요?”
“네.”
“이거 요번에 나온 신제품인데. 저희가 자체 디자인해 제작한 거라 지금 딱 한 점밖에 없어요.”
“그래요?”
태조가 반지를 제 손에 끼며 웃었다. 그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 성 매니저가 물었다.
“사이즈를 알려주시면 저희가 조절해 드리는데. 여자친구분 반지 사이즈는 알고 계세요?”
“반지 사이즈요?”
태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반지를 사러 온 게 아니었으니, 사이즈를 미리 알아 왔을 리가.
“음.”
한 이쯤 되나?
세경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생각하며 그 두께를 가늠하던 찰나였다. 뭔가를 떠올린 태조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여기에 맞추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