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우리 모르는 사이에 결혼이라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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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우리 모르는 사이에 결혼이라도 했어요?
2023.01.07.
호텔 연회장 옆, 대기실에 앉아 있던 세경이 핸드폰을 매만졌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 시작을 20분 정도 앞두고 있을 즈음, 어디냐고 보냈던 세경의 메시지에 태조의 답이 돌아왔다.
[청담동에서 출발하고 있어. 제작 발표회 시작할 때쯤 도착할 것 같아. 송 실장도 거기 있지?]
시선을 든 세경은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신 매니저만 동행하던 세경의 스케줄에 오늘은 송 실장도 함께였다.
“음?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눈이 마주치자 송 실장이 과자를 오독오독 깨물며 물었다. 고개를 저은 세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네. 지금 같이 있어요. 도착하시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운전 조심하시구요.]
메시지를 작성한 세경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때 송 실장의 앞에서 같이 과자를 축내고 있던 신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송 실장님은 왜 오신 거예요? 원래 배우들 스케줄 잘 안 따라오시잖아요.”
“일이 있어서. 근데 오늘 나만 오는 거 아냐. 이따가 대표님도 오셔.”
“대표님도요?”
태조가 온다는 말에 신 매니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왜요?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제훈이 휙 세경을 돌아보았다. 제작 발표회에 송 실장도 모자라 진 대표까지 온다고 하니 제가 모르는 사건이라도 터졌나 싶은 눈치였다.
“일은 무슨. 대표님이 차 피디님이랑 공 작가님하고 식사 약속이 잡혀 있어서 그래.”
송 실장이 세경을 대신해 답을 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지 제훈은 미간에 진 주름을 풀지 않았다.
“대표님이 피디님과 작가님을 왜 만나요? 촬영도 다 끝났는데.”
“촬영 끝났다고 다 끝난 거니? 공 작가님은 차기작 안 써? 차 피디님은 다음 작품 안 하시고? 실력도 중요하지만, 이 바닥에선 인맥도 무시 못 해. 게다가 우리 대표님은 콘텐츠 회사도 운영하시잖니.”
“아아.”
거기까진 생각을 안 했다는 듯, 감탄사를 흘린 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실장은 은밀히 세경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럼 송 실장님도 같이 식사 하시는 거예요?”
“아니. 피디님하고 작가님이랑 식사하는 건 대표님과 세경 씨만이야.”
“네 분 식사하시는 동안 저랑 송 실장님은 뭐 해요?”
“사무실로 돌아가든가 어디 가서 밥을 먹든가. 대표님이 오전 미팅이 있어 내가 온 건데……. 흠, 지금쯤 끝났는지 모르겠네. 시간에 맞춰 오시겠다고는 했는데. 일단 연락부터 해볼까?”
“대표님, 청담동에서 출발하셨대요.”
“어? 아, 그래요?”
세경의 대답에 송 실장이 신 매니저를 힐끗거렸다. 그는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아까부터 입을 삐죽거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지금 출발했으면, 대표님은 제작 발표회 시작 전에 못 오실 수도 있겠네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요. 그러니 송 실장님이 여기 남아서 대표님하고 잠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은데.”
턱을 긁적이던 송 실장이 세경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가 세경 씨랑 가고, 신 매니저가 여기 남아서 대표님 맞이하고 있어.”
“네? 제가요?”
“왜? 싫어?”
“아니요. 싫은 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린 제훈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저 짤리는 거 아니죠?”
“짤리다니? 왜, 뭐 잘못한 거 있어? 지금 말하면 정상참작 해줄 테니까 죄지은 거 있으면 빨리 털어놓고.”
“그건 아니고요. 그냥 요즘 송 실장님이 세경이 누나 스케줄도 관리하고 그러시니까……. 제가 누나 매니저에서 짤리는 건가 싶어서요.”
“지금 나한테 일 뺏겼다고 투덜대는 거니?”
남들은 일하기 싫다고 농땡이도 피우는 판에. 생각하는 게 참 귀엽다 싶어 송 실장이 제훈의 코를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안 짤려. 잘못한 거 없으면. 세경 씨도 네가 눈치 빠르게 일 잘한다고 칭찬하던데.”
“진짜요?”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제훈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세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매니저로 오는 거 불편해.”
“그건 걱정 마세요, 누님. 제가 뼈를 갈아가며 모실 거라니까요.”
“으그, 오바하기는.”
그새 기분이 풀려 히죽거리는 제훈을 보고 송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홍보팀 직원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세경 씨, 곧 제작 발표회 시작해요. 홀 입구로 나오세요.”
“네. 바로 갈게요.”
세경이 벗어놓았던 힐을 갈아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훈이 따라 나오려 하자, 송 실장이 여기서 기다리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리 괜찮아요?”
세경의 곁에 선 송 실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임신한 세경이 신기에 굽이 가느다란 스틸레토 힐은 많이 불안해 보였다.
“조금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죠. 잠깐만 견디면 되니까. 어차피 사진 찍을 때 외엔 앉아 있기도 하구요.”
“그래도 조심해요. 괜히 보는 내가 다 불안 불안하네.”
혹시라도 넘어질까, 송 실장이 금방이라도 부축할 수 있게 세경의 옆에 가까이 붙었다. 홀 입구에 다다르자 먼저 도착한 차 피디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왔어, 세경 씨? 진 대표는? 오늘 점심 먹자더니 아직 안 보이네?”
손을 들어 인사를 한 차 피디가 세경의 뒤를 기웃댔다.
“대표님은 지금 오고 계시는 중이에요.”
“아, 아직 안 왔구나. 송 실장님은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게요. 제가 요즘 촬영장에 나가질 않다 보니. 그래도 차 피디님 작품은 매번 잘 챙겨보고 있습니다.”
“뭘 또 잘 챙겨봐요. 그냥 보면 되지. 그보다 우리 제작 발표회 끝나면 바로 식사하러 가는 겁니까? 나랑 공 작가만?”
“네. 이 호텔 한식당에 예약해 두었어요. 끝나고 바로 올라가시면 돼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랑 공 작가만 따로 불러요? 혹시 진 대표가 괜찮은 작품 판권이라도 샀나?”
판권은 무슨.
헛다리를 깊게 짚은 차 피디를 향해 송 실장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 저기 공 작가랑 다른 배우들도 오네.”
차 피디가 손을 흔들자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공 작가와 드라마에 같이 출연한 동료 배우 셋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세경 씨. 그간 잘 지냈어요?”
세경과 함께 촬영한 남자 주연 배우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 홍보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차 피디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 기자들도 오래 기다렸다고 하니 바로 들어갑시다.”
연회장 문이 열리자 세경이 차 피디를 따라 홀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다. 단상 위로 올라가 짧은 포토 타임을 가지자, 사회자가 연출진과 배우들을 간략히 소개했다.
제작 발표회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공 작가가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차 피디가 옆에서 촬영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그러면 옆에 앉은 세경과 다른 배우들이 호응하거나 관련 내용들을 덧붙였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 질의응답 타임이 시작되자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윤세경 씨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우아한 가족>이 방송되기 전에 같은 그룹의 멤버였던 임주희 씨가 출연한 <파멸의 꽃>이 방송되는데. 신경 쓰이지는 않으신가요?”
짓궂은 질문이었다. 여기서 꼬투리 잡힐 말을 하면 바로 그 문장이 연예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잡히리라.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세경이 혀로 살짝 입술을 핥았다.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자 좌중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도 그 친구가 어떤 모습으로 연기를 할지 기대하고 있어요. 다만 두 작품이 서로 상반되는 매력을 가진 만큼, 취향에 따라 어느 작품이든 즐겁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세경 씨는 어떤 작품이 더 시청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뭐 그런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을…….
“아무래도 <우아한 가족>이 아닐까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너무 재밌어서 꼭 하고 싶었거든요. 현장 분위기도 좋았고 재밌게 촬영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세경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도착했는지 송 실장의 옆에 태조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럼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마이크를 잡았다. 세경은 이따금씩 태조 쪽을 쳐다보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진행되던 제작 발표회는 티저 영상과 하이라이트 영상이 공개되는 걸로 끝이 났다.
모든 순서가 마무리 되자 자리에서 일어난 차 피디가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저희 드라마 기사 잘 부탁드립니다.”
차 피디가 유쾌하게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기자들의 요구에 배우들의 포토타임이 한 차례 더 이어졌다.
“세경 씨, 이쪽! 여기 좀 봐주세요!”
사방에서 이쪽을 봐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었다.
쉼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은 부시고, 다리는 욱신거렸지만 세경은 조금씩 위치를 바꿔가며 촬영을 마무리 했다.
“감사합니다.”
기자들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단상 옆에 선 태조를 보며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어?’
발목이 살짝 꺾이는 것과 동시에 힘이 풀린 다리가 휘청거렸다. 세경의 몸이 고꾸라질 듯 앞으로 기울어지자, 어디선가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세경 씨 조심……!”
기함한 송 실장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어딘가로 얼굴이 푹 파묻혔다.
“조심해.”
머리 위로 나직한 중저음이 떨어지자, 세경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은 아프지 않았다. 다만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느껴지는가 싶더니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태조가 세경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허공에 떠 있던 다리가 바닥에 닿자, 세경이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와, 놀래라. 세경 씨 괜찮아요? 대표님 아니었음 큰일 날 뻔했네.”
부러 큰 소리를 낸 송 실장이 태조의 품에서 떨어진 세경을 살폈다.
세경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미세하게 인상을 쓴 그의 시선이 뒤쪽에 닿아 있었다,
‘음? 대체 뭘 보는…….’
고개를 갸웃거린 세경이 의아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세경과 같이 출연했던 남자 배우가 서 있었다.
“뭐 하세요?”
“어? 아니, 내가 세경 씨를 잡아주려고.”
넘어지는 세경을 잡아주려 했던지, 그는 뻘쭘하게 뻗은 팔을 수습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고.
“가자.”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닥인 태조는 세경과 같이 몸을 돌렸다.
***
호텔 23층, 한식당.
미리 주문해 놓았던 음식들이 긴 테이블 위로 정갈하게 차려졌다. 아침부터 굶었다는 차 피디는 허기가 지는지 먼저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세경 씨. 다리는 괜찮아?”
아까 세경이 넘어지는 줄 알고 놀랐다며 공 작가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네. 괜찮아요. 지금은 굽이 낮은 신발도 신었고요.”
“진 대표가 빠르게 잡아줘서 다행이었지. 근데 세경 씨, 넘어질 뻔한 거 사진 다 찍혔더라.”
“진짜요?”
“응. 진 대표는 옆 모습이 좀 나왔고. 내가 아는 기자가 와서 묻더라고. 저 사람 세경 씨 개인 가드냐고.”
공 작가가 태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직접 대면하는 건 이번이 세 번째지만, 정말 회사 대표로만 있기엔 아까운 얼굴이었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따로 이렇게 식사 자리까지 만들고.”
차 피디가 조각낸 떡갈비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태조는 세경을 한번 쳐다보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드라마도 곧 방영할 시기라, 세경 씨가 두 분께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해서요.”
“할 말? 우리한테?”
공 작가와 차 피디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세경에게 향했다. 물 잔을 든 차 피디가 얼른 말해보라며 세경을 채근했다.
“듣고 놀라지 않으셨으면 하는데요.”
“무슨 말인데 놀라지 말라고 경고까지 해?”
“어휴, 입 좀!”
차 피디의 대꾸에 공 작가가 조용히 좀 하라며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세경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아이를 가졌거든요.”
“……응?”
“커헉.”
세경의 고백에 공 작가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을 마시던 차 피디는 예상치도 못한 말에 사레가 걸려 기침까지 해댔다.
“어, 언제 아이가……. 웁!”
“차 피디, 목소리 좀 줄입시다. 밖에 다 들리겠네.”
공 작가가 큰 소리를 내는 차 피디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거 참, 대체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어디서부터 짚고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녀가 태조를 한번 쳐다보곤 물었다.
“세경 씨, 혹시 우리 모르는 사이에 결혼이라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