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오해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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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오해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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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오해의 불씨
2023.01.11.
공 작가가 혼란스러운 듯 당황한 눈을 껌뻑거렸다. 자신이 놓친 기사라도 있나 싶어 머리를 빠르게 굴리는 눈치였다.
“아니요.”
“…….”
세경의 대답에 공 작가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결혼은커녕 열애설 기사조차 보지 못한 거 같은데.
몰래 결혼을 한 것도 아니면서 아이는 가졌다고?
‘이거, 뭔가 많이 건너뛴 거 같은데…….’
“그래, 뭐.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생길 수 있지. 인생이 뭐 정해진 순서가 있나. 흘러가다 보면 이리저리 튀다 건너뛸 수도 있는 거지.”
뒤늦게 진정을 한 차 피디가 호탕하게 말했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세경 씨 사귀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기자들 눈 피해서 잘 만나고 있네?”
“다들 저한테 관심이 없나 보죠.”
차 피디의 너스레를 세경이 가볍게 받아쳤다. 공 작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세경에게 말했다.
“아직 기사도 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 우리한테 말하는 건 조만간 밝힐 생각인 거예요?”
“지금 바로는 아니고요. 드라마 끝날 때까진 숨길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드라마 관계자 중에선 두 분께만 미리 말씀드리는 거고요.”
“왜요? 우리가 외부에 알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말하면 제 기사 때문에 드라마에 영향이 갈 텐데. 두 분이 그러실까요?”
그녀가 두 사람을 믿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공 작가가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뭐 우릴 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그래도 말 안 할 수도 있었잖아요. 지금 세경 씨 보니까 그렇게 티도 나지 않고.”
“저희가 직접 밝힐 때까진 웬만하면 숨기고 싶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요. 누군가 제가 병원에 가는 걸 볼 수도 있고. 저도 생활 습관이 바뀌다 보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순간 세경의 머릿속에 예령과 식사했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그땐 정말 아찔했었다. 한번 그렇게 호되게 데이고 나니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제 임신 사실이 누군가에게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확 몰려왔다.
“저도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혹시라도 드라마 방송 중간에 기사라도 나면 곤란하니까요. 누군가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뭐, 그렇긴 하지. 모르고 있다가 접하면 뒤통수 맞는 기분이니까.”
팔짱을 낀 차 피디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개는 그런 일 있어도 다들 꾹 입을 다물던데.”
“…….”
“세경 씨가 속이 깊네. 우리 생각도 해주고.”
“아뇨. 저는 그냥 제 사생활로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해서…….”
“그게 속이 깊은 거야. 말마따나 사생활이니까 본인이 말해주지 않으면 우리가 아나? 나도 몇 번 겪어서 알아. 나중에 일 터지고 본인들은 수습한다며 연락도 안 되면 이쪽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거든.”
과거의 일이 생각나는지 차 피디가 진저리를 쳤다. 그가 세경에게 하소연하듯 지난 일을 말하자, 피식 웃은 공 작가가 태조를 쳐다보았다.
“일단 사정은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우리가 이런 걸 알고 있어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무니까, 나중에 외부로 누출되면 두 분 중 한 분이 흘린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공 작가가 태조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진 대표,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진짜 우리 쪽에서 새어 나가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드라마 끝날 때까지 함구하고 있을게요. 오늘 여기서 한 말은 룸을 나가는 즉시 잊는 걸로.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임신 사실이 밝혀지면 진 대표가 빠르게 수습해 줘요. 우리한테도 곧장 연락해 주고.”
“그러겠습니다.”
공 작가의 깔끔한 정리에 태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틀 후, 강남의 한 스튜디오 안.
1차 촬영을 끝내고 화장을 고치고 있던 세경이 한쪽 눈을 떴다. 옆에서 세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훈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쉬고 있었다.
“누나, 발목 괜찮으세요?”
“응. 아직까지는.”
세경이 왼쪽 발을 쓱 들어 올렸다.
엊그제 호텔에서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자 왼쪽 발목이 부어 있는 게 보였다.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퇴근한 태조는 세경의 발목이 부은 걸 보고 직접 찜질도 해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못 걸을 정도로 다리가 아픈 건 아니라는 거였다. 태조가 넘어지는 저를 잡아주었기에 이 정도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제 다리는 물론 앙꼬까지 위험할 뻔했다.
“걷기 불편하시면 찜질 팩이라도 가져올까요?”
“나중에. 바로 촬영 들어갈 텐데 지금 하면 피부도 빨개지잖아.”
“그 정도는 후보정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아프면 잠깐이라도 해.”
세경이 사양하자 옆에서 화장을 고쳐주던 채 실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그 사진 봤어. 세경 씨 잡아주던 그 사람은 누구야?”
질문을 하는 채 실장의 눈이 흥미로 번뜩였다. 지난 화보 촬영 때 세경의 등 뒤에 붉은 흔적을 남겼던 사람이 그 남자가 아닐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저희 대표님이요.”
“대표님? 세경 씨 소속사?”
세경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 실장은 뭔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난 또. 그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 사람…… 맞는데요.
역시 대표님과 자신을 바로 엮어 생각하는 건 좀 무리인가?
“자, 화장 끝. 이제 옷 갈아입고 와.”
메이크업을 마친 채 실장이 세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포토그래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한 번 더!”
스튜디오엔 다른 모델의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세경이 다리가 불편한 듯 뒤뚱거리자, 제훈이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또 넘어질까 이러는 거예요?”
화보 촬영 담당자로 온 V 매거진의 문 과장이 세경을 보며 웃었다. 제작 발표회 때 넘어지는 사진을 본 건 채 실장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발목이 좀 부어서요. 한번 접질리면 다음에 또 같은 델 접질리기도 하고.”
“그건 그래요. 나도 예전에 힐 신다가 그날 하루 세 번을 접질렸다니까요.”
그날 발목이 아주 아작나는 줄 알았다며 문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세경의 옷매무시를 다듬어주고 있을 때, 앞선 촬영을 마친 포토그래퍼가 두 사람을 불렀다.
“문 과장님, 여기 사진 좀 체크해줘요. 세경 씨는 이쪽으로 오시구요.”
콘티 사진을 재차 확인한 세경이 턱이 있는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어시스턴트가 건네주는 가방을 들고 포즈를 취하자 잠시 정지되었던 촬영이 재개되었다.
“오케이. 좋아요. 얼굴은 그대로 두고 시선만 창가 쪽으로 살짝 돌리고.”
포토그래퍼의 지시를 따라 촬영을 이어가던 세경이 두 벌의 옷을 더 갈아입었을 때였다.
자세를 바꾸고 포즈를 취하던 그녀의 눈이 구석에 서 있는 스태프들에게 머물렀다.
‘뭐지?’
무심히 넘길 수 있음에도 자꾸만 그들 쪽으로 시선이 가는 건, 핸드폰을 보고 있던 그들이 세경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탓이었다.
문제는 제게 꽂히는 시선들이 썩 호의적이지 않다는 거랄까.
“세경 씨, 표정.”
세경의 신경이 다른 곳에 팔려 있자, 포토그래퍼가 여기에 집중하라는 듯 손가락을 딱딱 부딪쳤다.
세경이 어색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작게 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에게 꽂힌 시선을 무시한 채 다시금 촬영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 것은.
“이거 정말이야? 세경 씨가 이랬다고?”
“현장 스태프가 한 말이니 진짜지 않겠어요? 도대체 임주희한테 뭐라고 했길래 울기까지 했대요?”
세경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지금 임주희라고 했나? 왜 주희가 우는 거에 내 이름이 언급되는…….
“거기, 뭐 하는데 그렇게 시끄러워?”
세경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본 문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경도 포토그래퍼에게 양해를 구하고 촬영 현장을 벗어났다.
“저기…….”
“네, 네?”
세경이 다가오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스태프들이 긴장한 채 몸을 바짝 굳혔다.
“혹시 지금 보고 있는 거, 저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이, 이거요?”
핸드폰을 꽉 움켜쥔 직원이 자신과 같이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뭐야, 대체 뭘 보는데 이래?”
조금 전까진 참새처럼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대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문 과장이 직원의 손에서 핸드폰을 쏙 빼갔다.
“아, 과장님!”
“뭔데. 너네만 재밌지 말고 우리도 같이 재밌어 보자.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 보는 게…….”
핸드폰을 내려다본 문 과장이 인상을 썼다. 세경은 그녀의 옆으로 가 저들이 보고 있던 것을 읽어보았다.
화면에 뜬 건 연예면에서 나온 기사 중 하나였다.
세경의 이름은커녕 이니셜로 범벅이 된 기사라 처음엔 왜 이걸 보고 제 이름을 언급했나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보니 저들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제작 발표회를 가진 드라마의 여주인공. 걸그룹 출신의 배우. 최근 너튜브 채널을 개설해 동료가 밝힌 그룹 활동의 이야기와 한 예능 프로의 스태프가 적은 댓글 내용까지.
‘……근데 좀 웃기더라. 몇 년 동안 연락 한 통 없다가 뜬금없이 전화해서 자기네 소속사랑 계약하자 하는 것도 그렇고. 자기 너튜브 채널도 개설했는데 나중에 같이 촬영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세경은 지난번 유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제 곁으로 다가온 제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훈아, 핸드폰 좀.”
“여기요.”
제훈이 핸드폰을 건네주자 세경은 검색창에 임주희의 이름을 쳐보았다. 주희의 프로필에는 그 전엔 보이지 않았던 너튜브 채널이 연결되어 있었다.
“…….”
세경은 곧장 링크를 타고 들어가 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댓글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 이게 사실이면, 그룹 망하는데 윤세경이 일조한 거 아님? 자기 개인 활동한다고 그룹 활동은 소홀히 한 거잖아.
└ 중립 박는다. 워낙 통수 맞은 게 많아서. 이건 윤세경 말도 들어봐야 함.
└ 나 즐토 예능 스태프였음. 얘네 사이 안 좋은 건 맞는 거 같음. 저번에 윤세경이랑 임주희 촬영했는데, 카메라 안 돌면 둘이 말도 안 함. 게다가 윤세경 성격도 별로인 게, 촬영 끝나고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하는데, 임주희가 울면서 나갔음.
거기엔 기사에 적힌 내용과 똑같은 댓글이 쓰여 있었다.
***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턱을 괸 태조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면엔 임주희가 너튜브에 올린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사실 그룹이 해체된 건 계약 기간이 만료됐기 때문인데. 솔직히 다른 이유도 있긴 했죠. 저희 팀이 특정 멤버의 개인 활동이 유독 심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신곡 연습 때 그 친구는 연습실에 잘 나오지도 않고. 그러니까 멤버들 사이에선 불만도 많았어요.]
이름만 밝히지 않았을 뿐 세경을 겨냥한 말이었다. 임주희가 속한 그룹 내에서 개인 활동이 많았던 건 세경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진짜, 어떻게 이런데요? 한때 같은 멤버로 활동까지 했으면서. 세경 씨 드라마 첫 방이 코앞인데, 아주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도 유분수지!”
송 실장은 임주희의 영상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추후에 문제가 생길까 댓글은 달지 않았지만, 속으론 임주희의 머리채를 이백 번 정도 잡고 흔드는 중이었다.
“세경 씨는요?”
“지금 촬영 끝나고 오는 중이래요.”
갑갑한 마음에 송 실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소속사에서 기사와 영상의 존재를 파악했을 때, 제훈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세경이 기사와 영상의 존재를 알았다고 하였다. 꽤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남은 촬영을 담담히 마무리 지었다고.
“스태프라고 댓글 단 사람은 찾았습니까?”
사실 임주희의 영상이 문제의 불씨가 된 건 맞지만,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건 스태프의 댓글이었다.
“일단 즐토 예능팀에서 기사 보고 연락을 줬는데요. 알아보니 지금은 현장에 없고 잠깐 단기로 일했던 사람 같다 하더라고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누군지 특정은 가능하다 했고. 아니면 저희 쪽에서 법적 조치 들어가며 IP 추적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신원은 꼭 파악하세요. 무슨 의도로 이런 걸 쓴 건지 확인해야 하니까. 우리 쪽 입장문은 기사 나갔습니까?”
“네. 홈페이지랑 세경 씨 대표 SNS에 입장문도 올렸는데. 쉽게 가라앉지를 않네요. 아직은 임주희 영상에 대한 기사 뷰수가 더 높기도 하고요.”
“우리 쪽에서 낸 입장문이야, 별 흥미를 끌지 못하겠죠. 믿는 사람도 드물 테고. 그 스태프처럼 차라리 제삼자가 나서 해명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태조가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신 매니저에게 들었던 내용을 천천히 되새겨보았다.
그날 예능 촬영이 끝나고 세경이 임주희와 트러블이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 댓글을 단 스태프는 그때 일은 언급한 것일 터.
“거기 예능팀에 연락해서 혹시 그날 촬영 후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지 알아봐 달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송 실장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몸을 움찔거렸다.
“아, 세경 씨…….”
태조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잔뜩 어두운 표정을 한 세경이 그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