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우릴 좀 더 도와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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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우릴 좀 더 도와줄 수 있습니까?
2023.01.14.
태조가 통화를 하는 동안 세경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몇 시간 사이 이니셜이 섞인 기사들은 세포 증식을 하듯 그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꼼수를 부려 연예면이 아닌 사회면에 올라온 기사들엔 이미 세경과 주희의 이름이 댓글에 언급되기도 하였다.
기사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희를 안타깝게 여겼고, 세경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갔다.
거기엔 스태프라고 칭한 사람이 올린 글도 한몫했다.
세경의 소속사에서 입장문을 올렸지만 봐주는 이는 없었고, 주희의 소속사에 항의는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
세경이 속으로 신음을 삼킨 채 입술을 깨물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배 안쪽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살짝 웅크린 채 배 속의 아이를 달래듯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후우, 괜찮아. 앙꼬야, 엄마 괜찮으니까…….’
자신이 느끼는 불쾌한 감정이 아이에게도 전해지는 걸까.
세경이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을 때쯤, 커다란 손이 두 눈을 감싸더니 세경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만 봐.”
태조가 포털 앱을 종료하고 세경의 옆에 앉았다. 눈을 가린 손을 떼자 세경이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오면서 계속 봤지?”
세경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오면서 주희가 올린 너튜브 영상과 댓글 그리고 기사까지 모조리 찾아본 터였다.
소속사에선 상황을 파악한 후 발 빠르게 대처했지만, 회사에서 내보낸 입장문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조금만 기다려봐. 송 실장이 그 예능 피디랑 통화 중이니까.”
“그쪽에서 도와줄까요? 그 댓글 쓴 스태프도 단기로 일한 거라 지금은 없다면서요.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는데. 그걸 감수하고 선뜻 나서 줄 리가…….”
“그래도 거기 막내 작가는 세경 씨 편이라던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익명 게시판에 글이라도 써주겠다고.”
“정말요?”
확인하듯 묻는 말에 태조가 고개를 한번 주억거렸다. 한숨을 내쉰 세경이 태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걸로 좀 가라앉으면 좋겠지만. 드라마 쪽은요? 차 피디님이 연락 안 하셨어요?”
“하셨지. 임신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건 다행인데, 이건 또 무슨 일이냐고.”
그러게. 이건 또 무슨 민폐람.
세경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자, 태조가 손끝으로 그녀의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기자들한테 전화가 와서 그쪽에서 알아서 대응했대. 자기들 드라마 촬영장에선 그런 일 없었다고. 그러면서 세경 씨한텐 미안하지만, 자기들은 예상치 못하게 드라마 홍보가 됐다며 호탕하게 웃으시던데.”
“그거 저 마음 편하라고 그러신 거잖아요.”
세경이 태조의 옷을 움켜쥐고 입을 삐죽거렸다. 그가 장난스럽게 세경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차 피디님 말대로 좋게 생각하자고. 예상치 못한 노이즈 마케팅 정도?”
“…….”
“지금 영상 보고 기사 검색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굳이 안 좋은 거 볼 필요 없고. 일은 우리가 수습하고 있으니까 세경 씨는 마음 편히 가져. 엄마가 스트레스받으니까, 앙꼬도 걱정돼서 아프게 하는 거 아냐.”
“맨날 쥐콩만하다고 놀리면서…….”
피식 웃은 세경이 태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태조의 심장 소리와 그의 몸에서 풍겨오는 시원한 체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잔뜩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혔다.
지이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세경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태조가 발신인을 확인하고 세경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유나 씨네.”
태조의 품에서 떨어진 세경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유나…….”
- 와, 이게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자마자 황당과 분노가 혼재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경은 괜히 태조를 쳐다보며 입을 쫑긋거렸다.
“혹시…… 봤어?”
- 임주희 영상? 당연히 봤지! 내가 어, 촬영하느라 이제 봤는데. 진짜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유나가 흥분한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 갑자기 디엠이 폭주하고 메시지가 우르르 들어와서, 또 내 정보가 어디서 털렸나 했더니. 허, 이게 뭔 일이야?
“그러게. 나도 좀 갑작스러워서…….”
- 그 스태프가 말하던 것도 그날 말하는 거지? 너 주희랑 예능 찍었다는. 내가 너한테 청첩장 주던 날!
울분에 찬 유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옆에 있는 태조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어, 맞아.”
- 와, 대박. 내가 그 영상 보고 말문이 막혀서 정말. 그런 영상을 올리면서 어떻게 나한테 같이 너튜브에 출연하자는 말을 할 수가 있지? 양심 어디? 우리 나라 로켓 쏠 때 같이 우주로 쏘아 보냈나? 아, 그리고 그 스태프는 뭐니?
“단기로 일했던 스태프래. 주희가 나랑 이야기한 뒤에 울며 나가는 걸 보고 오해한 것 같아.”
- 꼭 그런 사람이 있지. 제대로 상황 파악도 안 하고 자기가 옳은 줄 알고 떠들어 대는. 네 드라마가 곧 방영되니까, 주희가 경계한답시고 이런 거 만들어 올린 모양인데. 음, 걔도 참 용감하다. 그룹 멤버가 저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쩜 이렇게 쉽게 뽀록날 거짓말을 다 하지?
“다들 쉽게 나서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겠지.”
- 다른 애들이야 이제 연예계 활동을 안 하니 굳이 나서지는 않겠지만. 나는? 나도 입 다물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한창 방송 활동에 물이 오른 유나였다.
가만히 있어도 일이 잘 풀릴 텐데, 굳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일에 끼어들진 않을 거라 생각했을 터.
거기다 홀로 활동 하는 유나에게 문제라도 터지면 따로 나서 수습해줄 소속사도 없으니, 더더욱 이런 일엔 나서지 않을 거라 여겼을 거였다.
- 날 그렇게 의리 없게 봤다 이거지. 아니, 너도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을 했어야지!
“……미안. 나도 경황이 없어서.”
가만있다 혼쭐이 난 세경이 유나에게 사과했다.
- 스태프 건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우리 활동했던 부분에 대해선 내가 SNS에 일부 해명할게. 진짜 우리 같이 활동할 때 제일 고생했던 게 넌데. 어떻게 그걸 가지고 멤버들을 싸잡아 불화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냐.
“그래 주면 나야 고맙구.”
- 고맙긴. 내 말이 영향이나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SNS에 올릴 글을 써서 보낼 테니까, 네가 한 번 봐봐. 혹시 더할 말이나 뺄 말이 있는지. 그리고 너네 소속사에서 뭐 더 첨부할 내용은 없어?
“글쎄, 잠깐만…….”
세경이 태조를 쳐다보았다. 뭐 더 할 것이 있냐는 눈빛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조가 핸드폰을 이리 달라 손짓했다.
“전화요?”
“응.”
제 핸드폰을 힐끗 내려다본 세경이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야, 우리 대표님 좀 바꿔줄게.”
- 엉? 대, 대표님? 내가 거기 대표님과 왜…….
당황한 유나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세경이 태조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이유나 씨?”
- 네? 아, 네. 안녕하세요.
통화 상대가 바뀌자 유나가 긴장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안녕하세요. 세경 씨 소속사 대표, 진태조라고 합니다.”
- 예에. 그런데 무슨 일로…….
“제가 세경 씨 옆에 있다 통화 내용을 좀 들어버려서요. SNS에 해명 글을 올려주신다고.”
- 네. 뭐, 문제라도 있나요?
유나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뇨. 문제 될 건 없고.”
태조가 세경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해하는 세경과 눈을 맞추며 태조가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우릴 좀 더 도와줄 수 있습니까?”
***
“세경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나가 세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금 더 도와달라는 태조의 말에 촬영을 마치자마자 세경의 소속사로 급히 달려온 터였다.
“미안. 여기까지 오게 해서.”
“아니야. 음, 근데…….”
세경과 인사를 한 유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찾느냐는 세경의 말에 유나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까 내가 통화했던 그 대표님은?”
“어, 우리 대표님은…….”
세경이 입을 떼는 순간 회의실에 있던 태조가 송 실장과 함께 나왔다. 그가 세경의 옆에 있는 유나를 발견하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유나 씨. 조금 전 통화했던 진태조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유나가 악수를 청하는 태조의 손을 덥석 잡아 쥐었다. 그러곤 세경을 향해 소리 없이 와, 하고 감탄을 쏟았다.
“왜요?”
“네? 어, 그게…….”
태조가 묻자 유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의 소속사에 와서 대표님이 잘생겨서 놀랐다는 말을 하기가 뻘쭘했기 때문이었다.
“대표님이 멋지셔서. 흠, 그보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제가 한 말이 민망했던지 유나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태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터뷰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10분 뒤에 기자 한 분이 이쪽으로 올 건데. 이번 일에 대해 유나 씨랑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네. 뭐, 그 정도는 어렵지 않죠.”
“그 기자가 유나 씨 SNS에 올린 글도 확인하고 기사화했다고 해요. 몇 가지 질문도 미리 작성해 보내줬는데, 그건 여기 있는 송 실장이 알려줄 겁니다.”
유나가 쓱 고개를 돌리자 송 실장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송지화예요.”
“이유나입니다. 아, 그럼 혹시 그 인터뷰지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일단 여기 회의실로 들어가시죠.”
“네. 세경아, 그럼 이따 봐.”
세경에게 손을 흔든 유나가 송 실장을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사무실 안에 있던 신 매니저가 태블릿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누나, 이것 좀 보세요!”
“뭔데?”
신 매니저의 표정이 좋은데도 세경은 제훈이 내미는 태블릿을 섣불리 받아들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태조가 태블릿을 들고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신기정 씨 SNS인가?”
“네. 그날 세경이 누나랑 계속 같이 있으시더니 이렇게 써주셨어요.”
기정의 이름이 나오자 세경이 태조를 쳐다보았다. 그가 직접 보라는 듯 들고 있던 태블릿을 세경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화면에 뜬 기정의 SNS 내용을 확인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왜 세경이 인성이 별로라고 하시는지? 아니, 그럼 자기 분량 안 챙겨줬다고 징징거리는 걸, 세경이가 다 받아줘야 합니까? 왜요?
다 큰 어른이 그러지 맙시다.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 먹어야지. 같이 즐기지 못할망정 밥 떠먹여 주지 않았다고 우는 건 뭔데요?
그리고 세경이가 그 친구 무시한 줄 아는데, 반대예요. 카메라 꺼지자마자 돌아선 것도 그 친구고, 촬영이 끝나고 악수 청하는 세경일 무시한 것도 그 사람입니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세경은 태블릿을 움켜쥔 채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람들의 오해에 상처를 받아도, 누군가 저를 믿고 편을 들어주는 게 이토록 힘이 되는 건가 싶어서.
“제훈 씨, 이거 송 실장에게도 알려요. 인터뷰 딸 때 이것도 참고해서 내달라고 하고.”
“네.”
고개를 끄덕인 제훈이 회의실로 달려가자, 태조는 조용히 세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
세경의 발밑이 눈물로 젖어 들고 있었다. 태조는 훌쩍거리는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