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의기투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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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8.
인터뷰를 마치고 태조의 집무실로 온 유나는 세경의 옆에 찰싹 붙어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동그란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 회사 사람들은 직원 뽑을 때 얼굴을 보고 뽑나?
인터뷰하고 나서 잠깐 본 강 상무란 사람도 호감 있게 생긴 것 같더니, 대표란 사람은 웬만한 배우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야, 너네 소속사는 대표 얼굴이 복지다, 복지.”
유나가 속닥거리며 하는 말에 세경이 웃음을 삼켰다. 그때 책상 앞에서 전화를 붙잡고 있던 태조가 통화를 마치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계속 전화가 와서.”
“아뇨. 저도 따로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세경이 얼굴도 봐서 좋은데요. 그보다 제가 오늘 세경이한테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소속사에서 입장문을 내도 때론 본인이 하는 말 보단 다른 사람의 말이 더 믿음을 줄 때가 있으니까요.”
“시간이 좀 더 넉넉했으면 제가 따로 영상이라도 만들어 올릴 텐데…….”
뭔가 아쉬운 듯 입술을 우물거린 유나가 세경을 쳐다보았다. ‘왜?’라고 묻는 세경의 눈빛에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태조에게 말했다.
“저, 이런 말씀 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오늘 인터뷰한 내용이나 소속사의 입장문도 결국은 텍스트로 된 해명일 뿐이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저는 이번 일에 대한 건 세경이가 직접 나서 한번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은 이 건에 대해 세경 씨가 직접 해명하는 영상을 만들어 올리라는 건가요?”
“뭐, 그것도 좋지만…….”
유나가 우물쭈물하며 세경의 눈치를 살폈다.
이 상황에 이런 제안을 해도 괜찮은 걸까?
잠시 고민하며 천장을 흘끔 올려다보던 유나는 일단 한번 저질러보자는 생각에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 예전에 한번 세경이한테 살짝 흘리긴 했는데. 제가 출연하는 예능에 세경이가 한번 나오는 게 어떨까요?”
“유나 씨가 출연하는 예능이라면 부부이몽 말인가요?”
태조가 제가 출연한 예능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 놀란 유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네. 얼마 전에 피디님하고 이야기하다 그런 말이 나왔거든요. 세경이 드라마도 새로 들어가니까 저희 부부 쪽 게스트로 한번 출연하면 좋을 것 같다고.”
“그랬어?”
태조가 세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유나와 통화했던 내용을 되새기며 대답했다.
“네. 저번에 통화하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긴 했어요.”
“그런데 왜 안 하고?”
“그땐 스케줄이 여러 개 잡혀 있어서……. 다음에 생각해보겠다고 했거든요.”
세경이 태조와 짧게 눈을 맞췄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유나를 옆에 두고 솔직히 다 털어놓을 순 없었다.
“저도 세경이를 이용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조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한 해명이랄까, 아니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저랑 같이 부부이몽에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유나 씨 말은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시기가 좀 애매하긴 하네요. 아무 일이 없을 때라면 모를까, 이 일이 금방 가라앉을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지도 모르는데. 자칫하단 예능에 출연해 이미지 세탁을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세경이가 직접 이 일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제가 세경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요? 주희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제가 예전에 세경이한테 도움을 받았던 걸 이야기하면 논란을 가라앉히는 데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유나가 조심스럽게 첨언하자 생각에 잠긴 태조가 턱을 매만졌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일단 피디님이 흔쾌히 허락을 하실지.”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이거 피디님이 먼저 제안하신 거라서요.”
“그쪽에서 먼저 말입니까?”
태조가 확인차 묻는 말에 유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임 피디님이 저랑 처음 미팅했을 때부터 세경이가 게스트로 한번 나오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때마침 이번에 새로 드라마를 시작하니까, 홍보차 나오면 좋을 것 같단 말씀도 하셨구요.”
“임 피디님이 세경 씨를 어떻게 알고요?”
“제가 처음 회의하러 갈 때 세경이가 같이 가줬어요. 제가 부부이몽에 출연한 것도 어떻게 보면 세경이 덕이 크고요.”
유나가 세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신혼여행 선물을 주러 갔다가 임 피디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부부이몽의 출연 제의를 받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일단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따로 논의를 해보고 말씀드리죠. 스케줄도 조정이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요.”
“네. 저도 피디님한테 다시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그래요. 그럼 여기까지 오셨는데 세경 씨랑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아, 저도 그러고 싶지만…….”
유나가 세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말고 다음에 먹을게요. 그런 기사가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괜히 사람들 있는 데서 밥 먹다 안 좋은 소리라도 들으면 어떡해요.”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단호하게 반박한 유나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제가 또 도울 일이 있으면 연락주시고요.”
유나가 가방을 챙겨 일어서자, 태조도 그녀를 배웅할 겸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일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뵀으면 좋겠네요.”
“저도 또 뵈면 좋을 것 같은데……. 그때는 이런 일이 아니라 좋은 일로 뵀으면 하네요.”
인사를 한 유나가 태조의 집무실을 나섰다. 굳이 나올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세경은 꿋꿋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 나왔다.
“넌 여기에 좀 더 있다 가니?”
“응. 아무래도,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
“너무 걱정 마. 나도 글 올리고 기정 씨도 그날 일 해명하는 글을 남겼다며. 그게 기사화되면 이 상황도 잦아들 거야.”
“그래야지.”
자신을 위로하는 유나를 향해 세경이 살짝 웃어 보였다.
“너 꼭 우리 프로에 나왔으면 좋겠다. 애가 마음고생 했다고 얼굴이 그새 반쪽이 됐네. 내가 너 좋아하는 장어를 실한 거 사서…….”
“저기, 유나야.”
“응?”
“나 장어는 좀…….”
세경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자, 유나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제 장어 싫어졌어?”
“싫어졌다기보단. 요즘은 해산물이 별로 당기지 않네.”
세경이 어색하게 웃자, 유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산물만? 소고기는 괜찮지?”
“응.”
“알았어. 그럼 내가 너 오면 마장동부터 들를게.”
유나가 다부지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그녀는 같이 타려는 세경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배웅은 여기까지 해. 나 갈게. 나중에 연락하고.”
“응. 조심해서 가.”
세경이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아래로 내려가자, 태조가 세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좋은 친구네.”
“그룹 활동할 때도 제일 마음이 잘 맞았던 친구예요. 연습할 때 절 잘 챙겨주기도 했고.”
“그럼 부부이몽도 한번 나가 보지 그래?”
“그래도 괜찮을까요? 관찰 예능이라 카메라가 내내 돌아가는데.”
세경이 주위를 획획 돌아보더니 태조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다 또 반 관장님 때처럼 들키면 어떡해요?”
“그건 피디님이랑 유나 씨랑 이야기해 봐. 문제가 될 장면은 편집해 달라고 하고, 식사라도 할 거면 해산물류는 피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안 그래도 저 오면 장어를 준비한다고 해서, 요즘은 해산물은 별로라고 했어요.”
“그럼 괜찮겠네. 한번 나가봐도.”
“너무 쉽게 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 반 관장님한테 들킬 때,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그때의 제 심경을 모른다며 세경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때 태조의 뒤에서 송 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몸을 튼 두 사람이 송 실장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태블릿을 흔들며 소리쳤다.
“조금 전 인터뷰한 거 기사 떴어요!”
***
“와, 여기 태세 전환하는 것 좀 보소.”
기사를 빠르게 훑어보던 유나가 댓글들을 확인했다.
세경에게 불리했던 여론이 뒤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희의 영상 내용과 스태프의 댓글로 도배가 됐던 연예면은 기정의 SNS의 글과 유나의 인터뷰로 하루 만에 반전 상황을 맞이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오해가 풀린 건 아니었다.
여전히 주희의 말을 믿고 악플을 다는 사람은 존재했고, 도를 넘는 행동에 세경의 소속사에서는 열심히 고소장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경 씨, 신작 드라마 방송되기 전에 액땜 한번 크게 하네.”
임 피디가 커피를 마시며 세경에게 말했다. 부부이몽의 촬영이 결정되고, 세경은 본 촬영 전 사전 미팅을 위해 방송국을 찾아온 터였다.
“그러게요.”
“주희 씨는 왜 그랬을까? 이렇게 거짓말이 금방 탄로 나면 본인만 손해일 텐데.”
임 피디가 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주희도 몰랐겠죠.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몇몇 기자와 통화를 한 태조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이번 일이 이렇게 크게 기사화된 건 주희의 영상에 달린 스태프의 댓글 때문이었을 거라고.
하필 주희가 자신의 개인 활동으로 팀에 피해가 갔다고 털어놓은 게, 그 스태프가 쓴 인성 논란과 교묘히 엮여 세경을 비난할 빌미를 준거라고 했다.
“오히려 그 영상에 달린 댓글 때문에 논란이 더 커진 거래요.”
“아아, 나도 그거 봤어. 기정 씨가 해명한 부분 말이지? 도대체 그 스태프는 왜 그렇게 쓴 거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거야말로 오해였죠. 주희가 저랑 대화한 뒤에 울면서 나갔던 건 사실이니까요. 그때 기정이도 그랬거든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가 울린 줄 알겠다고.”
“주희가 원래 자기 불리할 땐 눈물부터 쏟아요. 그럼 사람들이 자기한테 약해지니까. 그리고 세경이한테 묘한 경쟁의식? 아니, 질투나 시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어요. 세경이가 드라마 출연하면서 광고도 찍고 인기도 많아지니까, 자연스럽게 회사에서도 세경이를 더 챙겼거든요.”
기사를 보고 있던 유나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책상을 탕, 내리쳤다.
“근데 내가 화가 나는 건. 왜 자기 불만을 멤버들까지 싸잡아 가며 이야기를 하는 거냔 말이에요.”
“맞아. 그랬지. 멤버들도 다 불만이 있었다고. 나도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했어. 두 사람 친해 보이던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하고.”
“제 말이요! 사실 계약 만료되고 연락 한번 안 했던 사람이 걔라고요. 임주희! 그런데 얼마 전에 연락 와서 나랑 너튜브 같이 찍자 이러더니. 그렇게 사람 뒤통수 후려치는 짓을!”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 듯 유나가 뒷목을 움켜쥐고 발을 마구 굴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피디님. 우리 이번에 세경이 억울함도 풀어주고, 세경이 드라마도 좀 홍보해줘요. 시청률도 팍팍 높이고!”
“그러자고. 그럼 어떤 주제로 촬영을 하는 게 좋을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며 회의에 들어갔다.
윤세경을 게스트로 섭외했으니, 열심히 굴려보자는 말도 드문드문 들려오는 참.
‘나 정말 출연해도 괜찮은 걸까?’
바짝 기합이 들어간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세경은 왠지 이 촬영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왔어?”
터덜터덜 거실로 들어온 세경이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태조는 잔뜩 지쳐 보이는 세경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스케줄이라곤 부부이몽의 사전 미팅밖에 없었는데. 아침에 봤을 때만 해도 생기가 넘치던 얼굴이 그새 홀쭉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 두 사람 텐션이…….”
태조의 옆에 앉은 세경이 지친 듯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텐션?”
“유나랑 임 피디님이요. 회의를 세 시간 넘게 했어요. 이것도 해보자, 저것도 해보자. 의욕이 넘쳐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라니까요.”
“촬영은 언제 하기로 했는데?”
“다음 주요. 방송은 드라마 시작하고 나서 할 거 같아요.”
“그래? 그럼 잠깐만.”
태조가 세경을 품에서 떼어놓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좇던 세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피곤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 뒤,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옆자리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의 손을 가져가는 태조의 손길과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가 끼워지는…….
응? 손가락에 끼워? 대체 뭘?
눈을 번쩍 뜬 세경이 소파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고개를 내리자 태조에게 잡혀 있는 제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짝거리는 물체는…….
“다행히 딱 맞네.”
“이게…… 뭐예요?”
세경이 얼떨떨한 눈으로 태조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선물 사러 갔다가 예뻐 보여서.”
“…….”
“부부이몽 촬영할 때 그거 끼고 가라고.”
세경이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링 가운데 박힌 영롱한 보석 하나가 제 손에 떨어진 별빛인 양 유난히 반짝거렸다.
“혹시 프러포즈 반지예요, 이거?”
“아니.”
“그럼 여기 가운데에 있는 거 다이아는 아니죠?”
세경이 반지를 가리키며 물었지만.
“…….”
태조는 어깨만 으쓱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