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음에는 결혼할 사람이나 데리고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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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다음에는 결혼할 사람이나 데리고 오렴.
2023.01.21.
“오늘은 안 늦었네요?”
차고와 이어진 계단을 올라오던 태조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마중 나온 건지 예령이 마당에 서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엔 늦으면 안 되죠. 형수님은 왜 나와 있어요?”
“도련님이 왔다고 해서. 근데 혼자 왔어요?”
누구랑 같이 안 왔나? 고개를 쭉 뺀 예령이 태조의 뒤를 바라보았다. 대놓고 세경을 찾는 모습이라, 태조가 눈썹을 들썩거렸다.
“이렇게 티 내실 겁니까? 그날 비밀로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한데. 오늘 같은 날 데려왔으면 좋았잖아요. 자연스럽게 소개도 하고. 어머님 생신 선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을 텐데.”
이러다 가족들 앞에서 다 티 내시겠네.
태조가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자 예령이 피식 웃었다.
“어휴, 눈빛 살벌해서 장난도 못 치겠네. 걱정 마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주의할 테니까. 그보다 세경 씨는 괜찮아요? 나도 기사 봤는데.”
“뭐,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중입니다.”
지난 한 주, 임주희의 동영상 때문에 회사는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같은 멤버였던 이유나의 인터뷰와 기정의 SNS 게시글로 상황은 빠르게 역전되었지만.
유나와 기정의 글이 빠르게 기사화되면서, 세경에게 날아오던 비난의 화살은 역으로 임주희에게 날아갔다.
임주희가 출연한 드라마 또한 그 영향을 피해가진 못했다. 게시판과 실시간 토크창은 드라마의 내용보다 세경과 임주희의 이야기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비난이 커지자 임주희는 뒤늦게서야 제 말에 오해가 있었다며 사과 영상을 올렸다.
자신은 좀 세경에게 서운했다 뿐이지, 싫어했던 건 아니라면서.
스태프가 쓴 댓글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쓴 거라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때늦은 변명에 파장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괜히 가만히 있는 세경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며 분노한 송 실장은 신 매니저와 합심하여 악플러들을 고소하겠다고 법무팀을 달달 볶고 있었다.
“뭐예요, 그 임주희란 여자는? 왜 뜬금없이 과거 이야기를 들먹여서 세경 씨를 곤란하게 했대?”
“같이 활동했을 때, 세경 씨만 잘 나갔던 게 배가 아팠나 봅니다. 듣기론 전부터 세경 씨를 못마땅해했다고 하더군요.”
“아, 이게 그런 건가? 남이 잘 나가는 게 배 아파서 깎아내리는?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럴 시간에 자기 실력이나 갈고닦지. 다른 사람 깎아 내린다고 그 자리가 자기 것이 되는 줄 아나.”
예령이 신랄하게 비아냥거렸다. 눈앞에 임주희가 있었다면 뺨이라도 한 대 날릴 기세였다.
“그 친구 가만둬요?”
“고민 중입니다. 마음 같아선 하나하나 다 잡아 고소장 날리고 싶은데. 세경 씨는 그래도 한때 같은 멤버이자 동료였으니, 고소까지 하는 건 보기 안 좋다 하더군요. 아이도 가졌는데 되도록 안 좋은 일은 피하고 싶다고도 하고.”
“우리 꽃사슴, 맘도 여리지. 나 같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못 하게 법의 쓴맛을 보여줄 텐데.”
예령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태조는 멀찍이 서서 예령을 바라보았다.
“…….”
아, 이분 학교도 한번 뒤집어 놓은 분이시지.
태조가 외면하듯 눈을 돌리자 예령이 휙, 그를 돌아보았다.
“잘 지켜봐요, 도련님. 그런 사람이 나중에 또 뒤통수치니까.”
“명심하죠.”
순순히 대답한 태조가 먼저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너넨 밖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니?”
다이닝 룸에 있던 마 여사가 두 사람에게 한마디 했다.
“도련님 사업 이야기요. 오늘은 그래도 시간 맞춰 왔네요.”
“그러게. 앉으렴. 예령이가 오늘 이거 준비하느라 고생했다.”
태조가 식탁 위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이거 다 형수님이 하신 겁니까?”
“아니요. 셰프님 초빙했죠. 어머님 앞에서 어떻게 내 요리를 내밀어요. 민망하게.”
예령이 당당하게 말하자, 피식 웃은 마 여사가 숟가락으로 국그릇을 가리켰다.
“그래도 내 생일이라고 미역국은 예령이가 끓여줬다.”
“고생하셨네요. 형수님도 갤러리 일로 바쁘실 텐데, 다음엔 그냥 밖에서 먹어요. 아, 그리고 이거.”
식탁에 앉은 태조가 들고 온 작은 쇼핑백을 모친에게 내밀었다.
“내 선물이니?”
“네. 풀어보세요.”
마 여사가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다. 눈에 익은 브로치가 보이자 그녀가 태조를 쳐다보았다.
“어머, 내가 이거 갖고 싶어 한 건 어떻게 알고?”
“선물 사러 갔다가 성 매니저님한테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이거 보고 가셨다고.”
“고맙구나. 잘하고 다닐게. 그런데 난 이거보다 다른 선물이 더 받고 싶다만.”
마 여사가 싱긋 웃으며 태조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태조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음에는 이런 거 사 오지 말고, 결혼할 사람이나 데리고 오렴.”
“…….”
“풋.”
예령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그것 보라는 듯한 형수님의 눈빛에 한숨을 쉰 태조가 조용히 국을 퍼먹었다.
***
짝!
유나가 슬레이트 대신 손뼉을 치며 촬영의 종료를 알렸다.
오전부터 시작됐던 부부이몽의 촬영은 오후가 되어 끝이 났다.
우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촬영은 별 탈 없이 잘 진행되었다. 유나에게 요가를 배울 때 뻣뻣했던 몸이 아팠던 걸 제외하면, 음식을 먹는 중간 입덧도 하지 않았다.
“촬영하느라 수고했어, 세경 씨. 유나 씨도.”
“피디님도 고생하셨어요.”
인터뷰를 마친 유나가 세경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걸어왔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울다 웃기를 반복한 탓에 유나의 눈은 토끼처럼 빨갰다.
“유나 씨는 인터뷰하면서 왜 이렇게 울어.”
“그러게요. 괜히 옛날 생각이 나서.”
유나가 민망함에 코를 훌쩍거렸다. 세경과 촬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터뷰 내용엔 과거 이야기도 다수 포함되었다.
힘들었던 연습생 시절, 불안했던 20살 초반의 청춘, 기대를 안고 데뷔를 했지만 다른 팀에 비해 한없이 뒤처져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미래 같은 것들.
결국 그간 해왔던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세상 밖으로 다시 내쳐졌을 때, 유나는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제 또래의 친구들은 이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로 나가는데, 꿈을 위해 일찌감치 사회로 나갔다 쓴맛을 보고 돌아온 유나는 더 이상 무엇을 꿈꿔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절망스러운 시기에 유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제주도에 있던 세경의 연락을 받으면서 다시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녀는 세경의 모친인 정란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유나에게 정란은 자기 가게에서 카페 일을 한번 배워보라 했다고.
당장 돈이 궁했던 유나에게 정란의 제안은 그야말로 구원의 손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나는 석 달 정도 세경과 함께 제주도에 머물며 차분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리고 제주도를 떠나는 유나에게 정란은 알바비라는 명목으로 꽤 많은 돈을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언제든 힘이 들면 자신의 카페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왜 이렇게 유독 친한가 싶었는데, 그런 속사정이 있었네?”
“저한텐 세경이나 세경이 어머니 둘 다 은인이에요. 그러니까 피디님, 오늘 제가 한 이야기 하나도 빠짐없이 방송해 주셔야 해요?”
“그래. 알았어. 걱정 마. 세경 씨도 우리 방송이 드라마 첫 방 이후에 나가겠지만 제대로 편집해서 홍보해줄게.”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우린 촬영 장비 좀 마저 치울게. 둘이 이야기하고 있어.”
임 피디가 장비를 정리하는 스태프들 사이로 사라졌다. 두 사람만 남자 유나가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참, 나 인터뷰한 기사 나고 주희한테 연락 왔었다?”
“정말? 뭐래? 괜히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건…….”
“당연히 좋은 소리는 안 했지. 다짜고짜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 네 인터뷰 때문에 내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다. 투덜투덜, 징징징.”
유나가 입을 비죽인 채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도 그랬지. 너는 어떻게 세경이한테 그럴 수 있냐고. 사람이 도리가 없어요. 자기는 솔로 음반도 내서 시원하게 말아먹었으면서. 네 개인 활동 가지고 불만이네 뭐네. 그 투자금은 어디서 나왔는데? 네가 밖에서 벌벌 떨며 연기해서 벌어온 거잖아.”
말하다 보니 또 열이 받는지 유나가 사과를 와그작 깨물었다.
“나야 네가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마운데.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괜히 너 곤란해지는 건 아닌가 해서.”
“내가 곤란해질 게 뭐가 있어. 그리고 혹시 이번 일로 문제가 생기면 그 송 실장님인가? 그분이 자신한테 연락 달라고 했어. 도와주겠다고.”
“아직 아무 일 없다면 다행이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해. 나도 발 벗고 나설 테니까.”
“걱정도, 참. 아, 그보다 나 너희 소속사 하니까 생각난 건데. 혹시 송 실장님은 아실까?”
“음? 뭐, 어떤 거?”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나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한눈에 반한 그 직원분?”
“…….”
“아으, 내가 그날 물어봤어야 했는데. 상황이 심각해서 말도 못 꺼내 봤어.”
발을 동동 굴린 유나가 핸드폰을 쓱 꺼내 들었다.
“혹시 지금 문자로 물어보면 실례일까?”
“응. 하지 마. 요즘 송 실장님 엄청 바쁘셔.”
냉큼 대답한 세경이 유나의 핸드폰을 뺏어 식탁 위에 엎어 놓았다.
***
어두컴컴한 초음파실 안,
유나의 집에서 나온 후, 곧장 심 원장의 병원을 찾아온 세경은 모니터에 뜬 앙꼬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지난번, 임주희의 일 때문에 유독 배가 아팠던 것이 떠올라 다른 때보다 앙꼬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걱정했던 거에 비해 상태는 괜찮네요. 앙꼬 잘 자라고 있는 거 보이죠? 심장 소리도 봐요, 아주 우렁찬 거.”
심 원장이 안심시키듯 앙꼬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다른 때보다 유독 배가 아파 걱정이었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요렇게 조그마해도 얘들이 예민하거든. 엄마가 스트레스받는 걸 기똥차게 알아차리는 거 봐요. 앙꼬가 마음 편하게 가지라고 미리 신호를 보내잖아.”
검사를 마친 심 원장이 세경의 배에 묻은 젤을 닦아주었다. 몸을 일으킨 세경이 옷을 끌어 내렸다.
“어머, 그건 못 보던 반지네요?”
초음파실을 벗어나, 진료실로 들어온 심 원장이 세경의 손에 걸린 반지를 보며 물었다.
“웬 거예요? 어디 협찬받은 거예요? 아니면…….”
심 원장이 말끝을 늘이자 세경이 제 손을 내려다보곤 웃었다.
“혹시 결혼반지?”
“결혼반지는 아니고 선물 받은 거예요.”
“선물? 누가? 앙꼬 아빠가요?”
“네.”
“어머, 선물로 반지라니 센스 있다. 근데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당장 결혼반지 싸 들고 프러포즈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앙꼬 아빠가 성격이 느긋한 편인가?”
대표님의 성격이 좀 느긋했던가? 제가 아이를 가진 걸 알고 바로 결혼하자고 한 걸 보면 그렇진 않은 거 같은데.
“어디 브랜드 거예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대…… 아니, 앙꼬 아빠가 사 온 거라서요.”
하마터면 대표님이라고 말할 뻔했다. 심 원장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눈치를 봤지만, 그녀는 반지에 시선이 팔려 별다른 이상을 못 느낀 듯했다.
“잠깐 봐도 돼요?”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반지를 빼서 건네주었다. 세경의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심 원장은 링 안쪽에 적힌 브랜드숍의 이니셜을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잉? 로젤? 이거 청담동에 있는 주얼리 숍 상품이었어요?”
“네?”
……그게 어딘데요?
심 원장의 반응에 세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