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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같이 걷고 싶은 길 (51/100)


51. 같이 걷고 싶은 길
2023.01.25.



 
팔을 쭉 뻗은 세경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엔 심 원장이 했던 말이 반복적으로 맴돌고 있었다.


‘로젤이라고, 여기서 조금만 가면 대로변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의 쥬얼리 숍이 하나 있어요. 거기 사장님이 유명한 보석 감정사이자 세공사인데, 프랑스랑 미국에서 일하시다 5-6년 전 한국에 들어와 자기 가게를 내셨거든. 다루는 보석들이 다 최상급이라 거기 주 고객층이 재벌가 사모님이라고 들었는데. 서브 스톤도 다 최상급이라 거기 가격대가 좀 비쌀걸요?’

 
그렇게 말한 심 원장은 세경에게 반지를 돌려주었다.

알고 간 건지 아니면 우연히 들어갔다 덤터기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평범한 회사원인 줄 알았던 앙꼬 아빠에 대한 평가가 이로 인해 상향 조정된 듯싶었다.


“갑자기 손가락이 무거워진 느낌이네.”

가운데에 박힌 보석이 다이아냐고 묻는 말에 태조가 아무 답도 하지 않았을 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비싼 걸 받고도 가만히 있기는 좀 그랬다. 자신도 뭔가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세경은 태조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출근할 때마다 입는 쓰리피스의 슈트? 아니면 시계? 그것도 아니라면 구두를 사주는 건 어떨까?


“하지만 신발 사이즈를 모르는데.”

다음에 태조의 집에 갔을 때 몰래 구두를 한번 들춰 봐야 하나?


“어? 근데 대표님은 내 손가락 사이즈를 어떻게 아신 거지?”

세경은 손에 낀 반지를 한 바퀴 돌려보았다. 반지는 제 손가락에 맞춘 듯 너무 꽉 끼지도, 헐렁하지도 않았다.

태조에게 반지 호수를 말해준 적도 없고,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혹시 자신이 자고 있는 사이에 손가락 둘레라도 재간 건가?

지이이이잉-.

세경이 인터넷으로 검색까지 해가며 태조의 선물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화면이 바뀌며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사람의 이름이 액정 위에 떠 올랐다.


“응, 엄마.”

- 뭐 해? 지금 집이니? 밥은 먹었고?

전화를 받자마자 정란의 질문이 연달아 쏟아졌다. 세경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샜다. 애도 아니고, 매번 밥부터 먹었냐 묻는 걸 보면, 다 큰 딸이 굶을까 걱정이 되는 걸까?


“집이야. 밥은 먹었고 지금은 소파에 누워 있어.”

- 몸이 무거워도 밥 먹고 바로 눕진 말어. 속 버리니까. 너 혼자 있니?

“응.”

- 아이 아빠는?

“일이 있어서 어디 좀 갔어. 엄마는 카페 마감 다 한 거야?”

- 어. 이제 문 닫고 들어가려고. 넌 어때?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정란의 목소리가 근심으로 가라앉았다.

그녀 또한 세경과 주희의 일을 모르지 않았다. 기사를 접하고 나서 가장 속이 상했던 사람이 바로 정란이었으니.

딸을 향한 무차별적인 비난에 정란은 세경이 받을 상처를 걱정했고, 속상한 마음에 가게 뒤쪽에 숨어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더욱이 세경을 비난한 상대가 한때는 같이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주희였다는 사실에 굉장한 실망과 충격을 받았다고.


“나 아픈 데 없어. 우리 앙꼬도 잘 자라고 있고.”

아랫배를 가볍게 두드린 세경이 부러 밝은 소리를 냈다.


- 그럼 다행이고. 참, 나도 유나가 인터뷰한 거 봤다. 그렇게 선뜻 나서 주니 고맙더라. 요즘 방송에 자주 나오는 것도 아주 보기 좋던데.

“그치? 안 그래도 최근 유나랑 같이 촬영도 했어.”

- 어떤 거? 부부이몽?

“응.”

- 넌 결혼도 안 했는데, 거기 가서 뭘 찍었어?

세경이 뺨을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결혼도 안 했는데, 제가 왜 부부이몽에 출연하냐고.


“아니, 뭐 거기에 결혼한 사람만 출연하나?”

- 아니야? 엄마 볼 땐 결혼한 사람만 나오던데?

아니, 맞아요. 그건 맞는데…….


“나는 게스트로 나간 거야. 유나 부부 쪽에. 이번에 일 터지고 나서 유나가 직접 해명차 예전에 나한테 도움받았던 일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거든. 드라마 홍보도 겸사겸사하고. 유나가 중간에 엄마 이야기도 한 거 같으니 나중에 한번 봐 봐.”

- 걔는 뭘 했다고 방송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니? 크흠, 그보다 유나한테 언제 한번 남편이랑 같이 제주도에 오라고 해.

정란이 툴툴거리자 세경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리는 걸 보니, 방송에 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퍽 쑥스러우신 모양이었다.


“유나가 요즘 나보다 바빠서. 다음에 여유 있을 때 한번 찾아가 보라고 할게.”

- 그래. 유나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주고. 넌 밥 잘 챙겨 먹고 지내. 나중에 엄마가 또 서울에 올라갈게.

“응. 그래도 무리해서 올라오진 말고.”

- 무리는 무슨. 딸 보러 가는 건데. 쉬렴. 나중에 또 연락할게.

“네. 쉬어요, 엄마.”

세경이 전화를 끊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집안을 점령한 적막감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음.”

다시 핸드폰을 든 세경이 통화 목록을 훑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태조의 이름 위에서 맴돌았다.


“몇 시쯤에 올라오시는지 물어볼까?”

곧 있을 워크숍 때문에 태조는 점검 차 강 상무와 같이 가평에 있는 연수원에 가 있었다.

세경은 시계를 흘끔거리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강 상무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연결음은 꽤 길게 이어졌다.

혹시라도 전화를 받기 곤란한 상황인가 싶어, 세경이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였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통화음 대신 태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세경 씨.

“혹시 지금 전화 받기 곤란하세요?”

강 상무의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 세경이 귀를 쫑긋 세웠다.


- 아니. 괜찮아, 말해.

“가평에 계시는 거죠? 강 상무님이랑 같이.”

- 어. 조금 전에 연수원에 도착해서. 한번 둘러보고 갈 거야.

“옆에 강 상무님은 안 계시는 거예요?”

- 지금은 좀 떨어져 있어.

일부러 멀리 떨어진 건지, 아주 작게나마 투덜거리는 강 상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제훈이가 말하기론 거기 벚나무가 늘어선 길이 그렇게 예쁘다고 하던데. 어때요? 거기 꽃은 다 피었어요?”

- 여긴 좀 늦게 펴서. 다는 아니고. 우리 올 때쯤이면 만개할 거 같긴 하네.

“어떤 곳인지 궁금한데. 사진 찍어 보내주시면 안 돼요?”

- 보내줄게. 마침 그쪽에 서 있어서.

솔직히 사진보단 대표님이랑 같이 거길 걷고 싶은데.

세경은 속에서 몽글거리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서울엔 언제쯤 오실 거 같아요?”

- 아무리 빨라도 자정은 넘길 거야. 기다리지 말고 자. 내일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들를게.

“알았어요. 운전 조심하시고, 내일 봐요.”

그럼 오늘은 못 보겠구나.

세경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몸을 뒤척거리던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틀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풍경이 화면에 떠올랐을 때, 세경의 핸드폰도 짧게 울렸다.


“와.”

세경은 태조가 보낸 사진을 보며 짤막한 감탄을 쏟아냈다. 캄캄한 밤, 조명이 켜진 거리엔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벚나무가 낭만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

찰칵.

통화를 마치자마자 태조는 제가 서 있는 길목의 사진을 찍었다. 세경에게 바로 사진을 보내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강 상무가 다가와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뭐 하냐?”

태조가 핸드폰을 살짝 기울인 탓에 누구에게 사진을 보내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강 상무는 미심쩍은 눈으로 태조를 훑어보았다.


“누구야?”

“뭐가?”

“방금 통화한 사람.”

오리처럼 튀어나온 입술이 태조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가리켰다.

발신인을 확인하자 저를 떼어놓고 전화를 받는 폼이 영 수상쩍었다.

방금 한 행동은 또 어떻고. 난데없이 사진을 찍어 전송하더니, 또 제가 볼까 봐 핸드폰 화면이 보이지 않게 슬쩍 숨기기까지 한다.

이거 하는 행동이 꼭…….


“너 연애하냐?”

“뭐래.”

심드렁하게 강 상무의 말을 튕겨낸 태조가 재킷 안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빨리 돌아보고 가자. 피곤하다.”

“그냥 우리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되냐? 여기 남아도는 게 방이잖아.”

가평의 연수원 건물은 JK 그룹에서 관리하는 곳이었다.

소규모 워크숍이나 신년 연회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곳으로 리조트 같은 숙소만이 아니라 강당과 식당 같은 부대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수원 건물 옆, 벚나무가 심어진 안쪽 길을 따라 더 깊숙이 들어가면 태조의 가족이 별장으로 썼던 2층 건물이 숨어 있었다.


“우리 여기 자러 온 거 아니거든?”

“안다, 알아. 넌 뭐 서울에 꿀단지 숨겨놨냐? 저번엔 그냥 자고 갔으면서 왜 오늘은 못 올라가서 안달이야?”

꿀단지는 안 숨겼지만, 애인은 숨겨놓았지.

태조는 투덜대는 우현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너 안쪽 별채도 보고 올 거냐? 워크숍 때 여기서 머물기로 결정한 거야?”

“글쎄.”

말끝을 흐린 태조가 벚나무가 심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사진까지 찍어 보내달라는 걸 보면 세경도 여기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스케줄을 끝내고 와도 상관은 없겠지만, 다시 서울로 돌려보내는 건 걱정이었다.

만에 하나 신 매니저가 같이 온다 해도 어차피 술을 먹어 차를 끄는 건 무리일 터였고.


“아, 세경 씨는 올 수 있나? 다른 배우들은 그래도 대충 다 참석 여부를 들었는데, 세경 씨만 못 들었네.”

“상황 봐서 오겠지. 그나마 작년처럼 하루 종일 촬영이 잡힌 건 아니니까.”

“최근 심란한 일도 있었으니 와서 바람 한번 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술도 좀 같이 마셔주고. 참, 세경 씨 하니까 생각난 건데. 네가 전에 유심히 보라고 했던 이유나 씨 있잖아.”

문득 떠오른 듯 우현이 손뼉을 짝, 마주쳤다.


“어. 어땠어?”

“방송 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고. 피디님들 사이에 평판도 꽤 좋은 거 같구. 예전에 세경 씨랑 그룹 활동하는 거 보니 노래도 꽤 하는 거 같던데?”

“그래?”

“응. 팀에서 메인 보컬이었나 봐. 직접 들은 건 아니라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그 실력 그대로면 그냥 묻히긴 아까울 정도던데?”

한번 살펴보라고 언질을 주긴 했지만 과거 활동까지 찾아봤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긴 강우현이 가끔 행동이 가벼워 보여서 그렇지, 일할 때는 태조 못지않게 깐깐한 구석이 있었다.


“지난번에 세경 씨 도와준다고 회사에도 왔었잖아. 그때 잠깐 인사도 했는데 첫인상도 좋더라고.”

“그래서 계약을 권해볼 생각은 있고?”

“음, 반 이상 기울긴 했는데. 그 전에 세경 씨랑 한번 이야기 좀 해보려고. 두 사람 친한 거 같아서 좋은 얘기만 나올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이유나 씨랑 대면한 시간이 짧아서 어떤 사람인지 다 파악이 되지 않았거든. 그나마 7년 동안 같이 활동한 세경 씨가 좀 알겠지. 요즘 잠잠해지면 인성 논란이 터져서 계약할 때 좀 신중해지긴 해.”

우현이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연예계만큼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또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건 뭐,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도 난데없이 돌을 던지고 있으니.

이럴 때 보면 단순한 곰 같은 석주 팔자가 제일 속 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석주는 촬영 마치고 저녁에 온댄다. 그 녀석 촬영하는 데서 전통주 하나 기가 막힌 거 발견했다고 그거 사서 올 거래.”

“넌 이번에도 남으려고?”

“어. 석주가 사 온 술도 먹어 봐야지.”

히죽 웃은 우현이 입맛을 다셨다.


“직원들 술 먹는데 눈치 없게.”

“에이, 뭐 우리가 권위 세우며 꼰대처럼 구는 것도 아니고.”

“꼰대 아니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꼰대라던데.”

픽 웃은 태조가 걸음을 옮겼다. 입을 댓 발 내민 우현이 투덜대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아오, 이 좋은 길을 내가 진태조하고 걷고 있다니!”

우현의 목소리가 고요한 연수원에 울려 퍼졌다. 조용히 뒤를 돌아본 태조가 웃으며 쏘아붙였다.


“나도 싫어, 이 X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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