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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나만 재밌는 줄 알았는데. (53/100)


53. 나만 재밌는 줄 알았는데.
2023.02.01.


석주를 쫓아냈지만, 세경은 태조의 사무실에 오래 있진 못했다.

혹시라도 석주가 태조의 사무실에 장시간 머무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조의 사무실을 나오자 탕비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석주가 보였다.


“금방 나왔네? 태조가 뭐래?”

“별말 안 했어요. 오늘 드라마 첫 방인 거 축하한다고. 반 관장님한테 꽃 잘 받았다고 연락 한번 해주라는 말만 들었어요.”

세경이 미리 준비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사실 태조는 퇴근 후 세경과 같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마저도 세경과 같이 들어온 두 친구 때문에 다 망해버렸지만.


“그랬구나. 음, 혹시 태조가 너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니지?”

“대표님이요? 저한테 무슨……?”

세경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석주가 몸을 낮추며 작게 속닥거렸다.


“그…… 예전에 만취한 태조 호텔 방에 던져 놓은 날 있잖아. 실은 세경이 네가 룸에 들어간 것도 다 들켰거든.”

“아…….”

이미 석주 선배한테도 확인을 다 마쳤던 거구나.


“태조가 나한테 들었단 말 안 했어?”

“네.”

“그거 때문에 별말 안 들었고?”

그거 말고 다른 의미의 말들은 많이 들었죠.

세경이 입술을 늘여 웃었다.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 마주친 후 석주의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태조와 연인이 되고 제게는 새 생명이 찾아왔다. 이 모든 걸 석주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태조가 아무 말 안 했다면 다행이고. 난 또 그 일로 네가 한 소리 들었을까 봐. 최근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던데. 선배가 돼서 전화 한 통도 못 하고 미안하다.”

“바쁘셨잖아요. 이해해요.”

“그나마 일이 빠르게 수습되어 다행이야. 아, 지금 집으로 가는 거야? 내가 신 매니저 불려다 줄까?”

“아뇨. 제가 직접 불러도…….”

“됐어 됐어. 여기서 기다려. 신 매니저 나오라고 할게. 그리고 이번 워크숍에도 꼭 와. 내가 아주 맛난 전통주도 사가니까.”

손을 파닥거린 석주가 성큼성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왜 제 말은 안 들으시고…….


“저 요즘 술도 안 먹는데.”

세경은 꽃바구니를 품에 안고 피식 웃었다.

몸을 들썩이며 걷는 석주의 뒷모습이 흡사 꿀단지를 안고 걷는 곰돌이 같았다.

***

세경이 연한 분홍빛을 띠는 꽃잎을 매만졌다. 손끝에 비벼지는 감촉이 기분 좋게 보들보들했다.


“꽃 감사해요. 잘 받았어요.”

- 직접 만나서 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다음 전시 때문에 정신이 좀 없어서.

핸드폰 너머에서 아쉬움 섞인 한숨이 들려왔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세경은 감사 인사도 할 겸 예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사실 세경 씨 집으로 보내고 싶었는데, 내가 꽃 보낸다니까 도련님이 죽어도 주소를 안 알려주는 거 있지?

“그래요?”

몸을 뒤로 뺀 세경이 태조를 바라보았다. 소파에 앉은 그는 리모컨을 손에 든 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전시 때문에 바쁘시면 당분간은 시간 내시기 힘드시겠어요? 저도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 어머, 무슨 소리! 세경 씨가 보자고 하면 없는 시간도 쪼개야지. 시간은 언제가 괜찮을까?

“저는 내일이나 내일모레도 괜찮고. 다음 주 주말도 좋아요. 아니면, 갤러리 휴관일에 만날까요?”

- 아니. 어차피 전시가 끝나 휴관일이라도 쉬는 건 아니라서……. 음, 시간은 내일모레가 좋겠다. 세경 씨, 그날 스케줄은 어떻게 돼?

“내일모레는 스케줄 없어요.”

- 그럼 그날 점심을 먹을까? 이건 내가 미팅 시간을 좀 확인하고 다시 알려줄게요.

“네. 그럼 저는 내일모레 시간 다 비워둘게요.”

- 그래요. 그럼 그날 봐요. 내가 전날 다시 연락할게.

경쾌하게 인사를 한 예령이 전화를 끊었다. 세경은 핸드폰을 움켜쥔 채 태조에게 다가갔다.


“형수님 만나려고?”

“네. 근데 정말 여기서 보고 가실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제 옆에 앉으라며 소파를 두드렸다. 광고가 흘러나오는 티비 상단엔 <우아한 가족>의 타이틀이 떠 있었다.


“대표님이랑 같이 보기 좀 그런데.”

드라마가 방송하는 오늘만큼은 태조를 만나지 않으려고 했건만. 그의 집으로 가지 않자 이번엔 태조가 첫 방송을 같이 보자며 세경의 집을 찾아온 거였다.


“왜?”

“선생님을 옆에 두고 일기 쓰는 느낌이랄까. 민망하기도 하고 좀 쑥스럽기도 해서요.”

“새삼? 내가 세경 씨 연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그건 알지만, 옆에서 같이 보는 거랑 저 모르는 데서 대표님 혼자 보는 거랑은 느낌이 다르다고요. 모니터하면 고쳐야 할 부분이 산더미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그걸 대표님이랑 같이 봐요.”

“…….”

“그러니까 드라마 끝날 때까지 저 방에 혼자 있을게요.”

휙 돌아선 세경이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태조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나 혼자 볼 거면 여기 안 왔지.”

졸지에 태조의 다리 위에 앉은 세경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니 드라마 끝날 때까지 옆에 있어.”

“싫어요. 저도 부끄럽단 말이에요.”

세경이 다리를 바동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옴짝달싹 못 하게 허리가 잡힌 탓에 도망쳐도 그의 옆자리일 뿐이었다.


“…….”

수치심이라도 좀 줄여볼 겸 자포자기한 세경은 꿩이라도 된 양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태조가 웃고 있는지 맞닿은 몸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저 드라마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든가.”

태조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놓으면 세경이 도망칠까 허리를 옭아맨 팔을 풀지 않았다.

곧 지루한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고개를 반쯤 돌린 세경은 긴장한 듯 땀이 밴 손을 꽉 말아쥐었다.

차단된 시야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활짝 열린 귀에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궁금해.’

세경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직접 촬영을 한 세경의 머릿속엔 대사만 들어도 장면 하나하나가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태조와 같이 제가 나온 모습을 보는 게 부끄러운 건 차치하더라도, 편집본이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한 건 세경도 마찬가지였다.


‘공 작가님도 재밌다고 하셨는데…….’

질끈 눈을 감은 세경이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몸을 뒤척거렸다. 그러곤 아예 태조의 품에서 보기 좋게 자세까지 바꾸었다.

세경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조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드라마는 첫 화라 그런지 스토리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보니 초반엔 세경보다 조연들의 등장이 더 많았다.

하지만 다들 연기를 잘하는 데다 스토리가 워낙 스피드하게 잘 진행되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60분이 훌쩍 지나 드라마가 종반에 다다랐을 때, 세경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 연예면엔 일찌감치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일부는 클리셰적인 뻔한 드라마라고 혹평도 했지만, 대부분은 불필요한 전개도 없고 다음 내용이 기대가 된다고.

그럼 태조는 어떻게 봤으려나?

세경은 눈만 들어 태조를 쳐다보았다.

다음 편 예고까지 알차게 본 그는 세경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내렸다.


“어때요?”

“아직 초반이라 뭐라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한 시간 내내 지루할 틈은 없네. 세경 씨 분량도 오늘은 그렇게 많지 않고.”

대중적인 반응이었다. 드라마 토크 창에도 비슷한 말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도 같이 볼까?”

“싫어요.”

부끄러운 건 오늘 하루면 족하지.

싱긋 웃은 세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또롱. 또롱. 또롱.

아침부터 메시지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달게 자던 세경의 눈가가 가늘게 꿈틀거렸다. 모니터를 하느라 느지막이 잠이 들었던 그녀는 침대를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잠금을 풀자, 채팅앱 상단에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의 숫자가 떠올랐다.

364개. 그 와중에 눈을 한번 깜빡거리자 또로롱하는 소리와 함께 그 수가 증식하듯 늘어나고 있었다.


“뭐야, 또 무슨 일…….”

혹시 누가 제 임신 사실이라도 알아챘나?

순간 식겁한 세경이 벌떡 일어나 채팅창을 확인했다.


“아.”

다행히 우려했던 상황은 아닌 듯했다. 다들 세경이 출연한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며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메시지가 폭주하듯 들어온 걸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 세경은 그중 몇몇에게 답장을 보내고 기사부터 찾아보았다.


“어, 시청률이 꽤 많이 뛰었…….”

첫 방도 나쁘지 않았지만, 드라마 2회차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정확히 말하면 2화 말미에 나간 3화의 예고편이 사람들의 흥미를 더 부추긴 듯했다.

2화에선 재벌가로 들어간 세경이 안하무인 격으로 구는 가족들에게 당하는 고구마 구간이었다면, 3화부터는 그녀가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도하는 스토리였다.


“나만 재밌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재밌게 본 건가?

반응이 좋은 거 같아 입꼬리가 절로 씰룩댔다. 세경은 제멋대로 풀리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몇 개의 기사를 더 확인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짤막한 회차 줄거리와 시청률, 드라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적혀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드라마 시작 전에 불거진 세경의 인성 논란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분명 첫 방까진 주희의 드라마가 시청률 1위였던 거 같은데…….”

그런데 그 순위가 방송 2회차 만에 뒤집혔다. 지금은 세경이 출연한 <우아한 가족>이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라고 하였으니.


“그쪽 드라마는 반응이 어떤지 모르겠네.”

세경은 주희의 드라마를 검색했다. 하이라이트로 올라온 영상을 플레이하며 댓글을 본 세경의 입술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주희가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발끝이 초조하게 떨렸다. 엉망으로 짓씹힌 손톱만큼 그녀의 미간도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짜증 나.”

세경의 기사를 본 주희가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우아한 가족>이 방송되면서, 주희 또한 다른 의미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자신이 올린 너튜브 영상과 스태프가 쓴 댓글로 인해 세경의 인성 논란 기사가 나왔을 땐, 솔직히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라 좀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이 점점 세경에게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면서 한편으론 제겐 좋은 기회다 싶었다.

<우아한 가족>의 첫 방을 앞두고 있는 시기였다.

그 기사로 인해 세경에 대한 인성 논란이 번지자 사람들은 주희의 SNS를 찾아와 위로의 글을 남겼고, 세경이 나오는 드라마는 보고 싶지 않다며 방송 중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안 대표도 주희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자, 이 기회를 잘 이용하자며 추가 영상을 제작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그 말이 나오고 하루가 지났을 때, 상황은 다시 반전을 맞이했다.

원인은 당연 이유나가 SNS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

유나가 저를 배신하고 세경의 편을 들어줄 줄은 몰랐다.

세경보다 자신을 알고 지낸 시간이 더 길었다. 연습실에서 함께 울고 웃은 게 몇 년인데.

그간 피땀 흘려 일군 자신의 팀에 갑작스럽게 굴러온 돌은 윤세경이 아니었던가.


“멍청하긴. 낄 때 안 낄 때 구분도 못 하고.”

주희가 이를 갈았다. 이유나가 나대는 바람에 요즘 주희의 입장은 아주 곤란해졌다.

처음 기사가 났을 때, 촬영장에서 자신을 위로해 주던 사람들도 이유나의 인터뷰 기사가 난 뒤엔 은근슬쩍 저를 피하고 있었다.

덕분에 요즘 그녀는 촬영장만 가면 아주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다들 저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피디는 아예 그녀에 대한 하차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며 대놓고 나무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희는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연신 사과를 하고 다녔다.


“그나저나 매니저는 왜 안 오는 거야?”

화풀이 대상을 찾은 주희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카메오로 출연하기로 한 드라마의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현장까지 가라면 빨리 출발해야 하는데, 집으로 오기로 한 매니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시간 하나 딱딱 지키지 못하고. 매니저를 바꿔달라 해야 하나.”

주희가 신경질적으로 통화 목록을 살피던 순간이었다. 화면이 바뀌며 소속사 연락처가 떠올랐다.

또 무슨 일이지?

삐딱하게 눈썹을 세운 주희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네. 임주희예요.”

- 주희 씨, 나 오 주임이에요.

“예,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저 지금 늦어서 매니저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생략하고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뜻이었다.


- 아, 주희 씨 매니저 지금 다른 곳에 보냈어요. 우리가 일손이 부족해서.

“네? 그게 무슨……. 저도 촬영하러 가야 하는데, 매니저를 다른 데 보내면 어떡해요?”

허락도 없이 제 매니저를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는 말에 주희가 버럭 성을 냈다.


-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연락했어요. 오늘 드라마 카메오 촬영 하나 있었죠?

“네.”

주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 그런 예감은 늘 적중했다.


- 그거 안 가도 돼요. 주희 씨 촬영, 취소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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