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꿈처럼 느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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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꿈처럼 느껴질 만큼
2023.02.04.
“나 드라마 봤어요. 완전 재밌던데?”
예령이 디저트로 나온 복숭아 셔벗을 입에 넣었다.
새로운 전시 준비로 바쁘다던 예령은 오늘 오전에 외부 미팅이 하나 잡혔다며 세경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였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조금 민망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재밌는 거 같아요.”
“으음, 아니야. 자기 작품에 자부심 넘치는 거 그거 좋은 거예요.”
예령이 셔벗을 푸던 디저트 스푼을 휘휘 흔들었다.
“나랑 점심 먹고 난 뒤엔 뭐 해요? 오늘 스케줄도 없다면서요.”
“선물 좀 사려고요.”
“선물? 누구 거요? 도련님 거?”
“네.”
“갑자기 왜요? 도련님 생일도 아닌데.”
“저도 받은 게 있고. 그냥 해주고 싶어서요.”
“도련님한테 뭘 받았…….”
고개를 내린 예령의 시선이 세경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혹시 그거요?”
예령이 세경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가리켰다.
“네.”
“도련님이 프러포즈했어요?”
“프러포즈는 아니고, 어머니 선물 사러 갔다가 산 거라고 했어요.”
“어머니 선물? 아아.”
어디서 산 건지 알겠다는 듯 예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세경 씨는 뭘 사주려고요?”
“아직도 좀 고민 중이긴 해요. 시계도 생각해 봤는데, 웬만한 라인은 다 가지고 있는 거 같고. 구두를 살까 했는데, 신발은 또 의미가 좀……. 지금은 넥타이랑 커프스링크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정장을 자주 입으시니까.”
“남자들 선물 사주기가 살짝 까다롭긴 하죠. 종류가 많은 것도 아니고. 아, 이렇게 된 거 우리 같이 갈까요? 나도 오랜만에 남편 선물 좀 사게.”
“저는 좋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신규 전시 때문에 바쁘시다고 하셨잖아요.”
“선물 사러 갈 시간 정돈 있어요.”
한쪽 눈을 찡긋거린 예령이 어서 가자며 몸을 일으켰다.
“혹시 어디서 살지 생각해 둔 데 있어요?”
“브랜드를 정한 건 아니라서. 백화점 명품 숍부터 둘러보려고요.”
“명품 숍이라. 그럼 일단 내가 추천하는 데부터 가볼래요?”
남편이 자주 찾는 곳이라며 자신 있게 앞장서는 예령의 뒤를 세경이 따라나섰다.
***
태조의 집을 찾은 세경이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각각의 쇼핑백엔 예령과 같이 숍을 둘러보고 산 넥타이와 커프스링크가 담겨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떡하지?”
고심 끝에 고른 물건이었다. 올 초 컬렉션에 나온 신작이라지만 아마 태조가 가지고 있는 수십 개의 넥타이 중에 비슷한 색상은 있을 거였다.
커프스링크는 유행을 타기보다는 클래식한 디자인을 골랐지만, 막상 사고 보니 또 태조의 취향에 맞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별로라고 하면 바꿔야지, 뭐.”
한숨을 쉰 세경이 도어 록에 카드키를 갖다 댔다. 어제 태조가 그녀에게 건네준 거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집에 없으면 그걸로 먼저 들어와 있으라고.
철컥.
잠금이 해제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연 세경은 등 뒤로 쇼핑백을 숨기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윽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 소파에 걸쳐져 있는 정장 재킷.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듯 태조는 여전히 셔츠 차림이었다.
“저녁 드셨어요?”
“응. 회사에서 우현이랑 같이. 뒤에 숨긴 건 뭐야?”
“별건 아니고…….”
태조의 곁으로 다가간 세경이 식탁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대표님 선물이요.”
“내 선물?”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 눈을 작게 들썩인 태조가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내 생일도 아닌데?”
“대표님도 제 생일이 아닌데 주셨잖아요.”
세경이 반지 낀 손을 태조에게 보여주었다.
“뭐 받으려고 준 거 아니었는데.”
“저도 그냥 주고 싶었어요.”
세경이 어서 보라는 듯 쇼핑백을 눈짓했다. 상자에서 꺼내든 넥타이를 태조가 길게 쓸어내리자, 그의 표정을 살피던 세경이 긴장해 물었다.
“왜요? 별로예요?”
“아니. 괜찮은데.”
싱긋 웃은 태조가 세경에게 넥타이를 내밀었다. 이걸 왜 제게 주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태조가 지금 하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 식탁에 던져 놓았다.
“해줘.”
“뭘요?”
“그거.”
태조가 세경이 들고 있는 넥타이를 턱짓했다.
“저보고 넥타이를 매달라고요?”
“응.”
“지금요?”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일 출근하실 때 하면…….”
“선물을 줬으면 직접 매주기도 해야지. 나도 세경 씨 손에 직접 반지 끼워줬잖아.”
그거랑 이건 좀 많이 다른 거 같은데.
“저…… 넥타이 매준 적이 없어서 잘 몰라요.”
“한 번도?”
“네. 예전에 무대 의상으로 입었을 땐 이렇게 쭉 당기기만 하면 됐던 거라.”
세경이 우물쭈물하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어떻게 매는지도 몰라?”
“대충은 아는데. 예쁘게는 못해요.”
“예쁘게 안 해도 되니까, 한번 해 봐. 틀리면 알려줄게.”
태조가 세경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빨리하라는 무언의 채근에 그녀가 잠시 머뭇대다 손을 뻗었다.
셔츠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두르고……. 작은 손이 그의 목 아래서 야무지게 움직였다.
“…….”
태조는 코앞에서 세경이 고민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머리를 굴리느라 집중한 세경의 미간은 좁혔다 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래전, 촬영장에서 대본을 보고 있을 때도 저런 얼굴이더니,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아닌 거 같은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시는……. 읍!”
세경이 투덜대며 고개를 들자, 태조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부드럽게 뭉개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얼크러졌다.
세경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넥타이를 꽉 움켜쥐었다. 태조와 키를 맞추느라 들어 올린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아, 잠깐…….”
거듭 빨린 입술에 호흡을 하는 순간을 놓쳐 숨이 막혔다.
세경이 태조를 살짝 밀어냈지만, 그뿐. 다시금 덮쳐온 태조의 입술은 성난 파도처럼 세경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밀려오는 그의 힘에 세경이 버티지 못하고 몸을 휘청댔다. 태조는 뒤로 쏠리는 세경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몸을 쓸어내렸다.
“으음.”
입맞춤이 짙어지자 세경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절제력을 상실한 짐승이라도 된 것 같았다. 도톰하게 부을 정도로 세경의 입술을 탐하던 태조가 들끓는 욕망을 억누른 채 세경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가쁜 숨이 흘렀다. 몸이 붕 뜨는 것 같더니 어언간 세경의 시선이 태조와 비슷해졌다.
달뜬 분위기 속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태조가 느릿하게 세경의 입술을 쓸었다. 숨을 참느라 붉어진 얼굴, 서로의 입술을 탐하느라 젖은 입술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그는 세경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딪쳤다.
“이제 5주 정도 남은 건가.”
5주.
드라마의 마지막 방송일이자 태조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로 한 날이었다.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던 날도, 어느새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결혼식을 준비하는 건 좀 빠듯할 것 같은데.”
코끝이 비벼지고 태조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혼인신고부터 하고, 집부터 합칠까?”
속삭이는 그의 말에 세경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보라지. 벌써부터 혼인신고를 하자는 사람이 무슨 성격이 느긋하다고.
“너무 급한 거 아니에요?”
“급하긴. 앙꼬 녀석도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데.”
태조는 세경이 보여준 초음파 사진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처음엔 눈, 코, 입도 없어 쥐콩처럼 동그랗기만 하던 녀석이 어느새 쑥쑥 자라 손발도 생기고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5주밖에 안 남았으니,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요. 아이 때문에 저랑 결혼하는 건 아닌지.”
“저번에 말했잖아. 점점 자라는 앙꼬도 귀엽고, 윤세경도 귀엽다고.”
“…….”
“그래서 같이 살고 싶은 거니까.”
태조가 반지를 낀 세경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작 나는 제대로 못 들은 거 같은데.”
“뭘요?”
“네가 나와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지.”
“그야…….”
좋아했다. 처음 그를 만나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하지만 그 긴 시간, 제가 품어왔던 그 마음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수십 번 사랑한다 속삭여도 모자랄 것 같은데.
“……해요.”
“뭐?”
목소리가 잠겨 앞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태조가 다시 말해달라며 가까이 다가오자, 세경은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좋아한다고요. 지금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태조를 마주 본 세경이 싱긋 웃었다. 고개를 기울인 그가 세경의 입술에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내일 가평 가면 하룻밤 자고 오실 거죠?”
“상황은 보겠다고 했지만. 아마 석주가 오면 혼자 나오는 건 힘들 것 같기도 해.”
세경을 품에서 떼어놓은 태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녁에 신 매니저랑 같이 올래?”
“가도 될까요?”
“거기 별채도 따로 있으니까. 힘들면 일찌감치 그곳에서 쉬면 되고. 거기 가고 싶어 했지?”
“거기 벚꽃길이 예뻐서, 대표님이랑 같이 걸어보고 싶기도 하고…….”
아직은 조심해야 할 시기라 바깥에서 따로 데이트도 하지 못했다. 아쉬워하는 세경의 표정에 태조가 말했다.
“거기가 밤에 조명을 켜놓으면 예쁘긴 하지. 그럼, 사람 없을 때 몰래 나와 잠시 걷든가.”
“그럼 제훈이한테 한번 말해볼게요.”
활짝 웃은 세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갈래요!”
양팔을 번쩍 든 제훈이 눈을 반짝였다.
지면 광고 촬영이 끝나고 저녁에 같이 가평 연수원에 가자고 하자, 제훈은 고민할 것도 없이 냉큼 긍정의 뜻을 보내왔다.
“좀 아쉽지? 일찍 가면 보물찾기도 할 수 있을 텐데.”
“아뇨, 그건 별로 아쉽지는…….”
“1등 상금이 현금 백만 원인데?”
“어, 그건 좀 탐나네요. 하지만 제가 뭘 잘 찾는 타입은 아니라서요.”
어깨를 으쓱인 제훈이 멋쩍게 웃었다.
“근데 거기 갈 때 빈손으로 가긴 좀 그래서. 석주 선배는 지방에서 올라올 때 전통주를 사 오신다고 했거든. 우리도 뭐 따로 사 갈 만한 게 없을까?”
“글쎄요. 웬만한 술이나 안주는 다 준비해놨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사 갈 만한 건?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술을 마시는 건 아닐 거 아냐.”
“아마도, 그렇겠죠?”
제훈이 이마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지 마땅한 답을 내놓진 못했다.
“여기서 저녁 먹고 가면 우린 9시쯤에 도착하려나?”
“촬영이 언제 끝날지가 관건이긴 한데. 차만 안 막히면 그쯤 될 거예요.”
“그럼 거기도 저녁을 먹은 후일 테니까, 디저트류는 어때? 이 근처 백화점 식품관에서 사가면 될 것 같은데.”
“아,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제훈이 박수로 세경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 좋은 건지, 아니면 제 말이면 무조건 좋다 하는 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가 먼저 간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한번 물어 봐줘. 따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넵. 그럴게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제훈이 분장실을 나섰다. 세경은 멀어지는 매니저의 등을 보며 태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늦은 밤, 태조와 단둘이 산책하는 게 기대가 되는 참.
“세경 씨, 슬슬 촬영 시작할게요.”
“네.”
분장실을 나가는 세경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걸렸다.
***
나무 그늘 아래 선 태조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세경에게서 9시쯤 가평에 도착할 것 같다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그는 넓은 정원에 퍼져있는 직원들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오전에 소강당에서 직원들이 강연을 듣는 동안, 강 상무는 정원 곳곳에 상품을 적어놓은 종이를 숨겨두었다.
이번 상금이 지난번보다 뛰자, 직원들의 참여도는 전보다 더 높아졌다.
덕분에 자신감이 넘친 강 상무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내년에도 상금을 올려야 하나?”
“그땐 네 월급 반납해라.”
태조의 말에 강 상무의 입이 험악해졌다.
회사 기둥을 뽑아 먹기 전에 치솟는 콧대를 좀 잘라줘야지.
몸을 돌린 태조는 만개한 벚나무 길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