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대표님이랑 세경 씨, 사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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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대표님이랑 세경 씨, 사귑니까?
2023.02.08.
오후 일정을 끝내고, 저녁을 먹고 나자 2차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소는 연수원 숙소동 1층의 가장 큰 방이었다,
우현은 술자리가 시작되자마자 한 자리를 차지했고, 태조는 대표가 같이 있으면 직원들이 불편할 수 있다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리고 석주가 왔다는 연락에 태조가 다시 방을 찾아왔을 땐,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얼큰하게 취한 이들이 몇몇 보였다.
“어, 진 대표, 여기!”
직원들 사이에 껴 있던 곰 한 마리가 태조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석주의 주변엔 따지 않은 술병이 수두룩했다. 무슨 지역의 전통주를 사 온다고 하더니, 몇 명을 골로 보내려는지 한두 병이 아니라 한 궤짝을 사 온 듯했다.
“대표님 이쪽으로 오세요.”
석주의 앞에 앉아 있던 송 실장도 태조를 불러 자리를 권했다.
다른 테이블에서 직원들과 술을 마시던 강 상무는 이쪽으로 오고 싶은지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넌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많긴. 여기 직원들한테 한 잔씩만 돌려도 금세 바닥날 거 같은데.”
전통주 두 병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석주가 다른 데에도 한 병씩 갖다주라며 매니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매니저가 술병을 품에 안고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자, 석주가 태조에게 새 잔을 주고 술을 따라주었다.
“오늘 세경이도 온다고 들었는데. 아직 안 왔나 보네?”
“그러게요. 좀 늦네요. 저녁 먹고 올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중간에 사고가 난 차량이 있어서, 차가 좀 막힌답니다.”
“아, 그래요? 대표님이 연락하셨어요?”
술잔을 기울인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태조가 잔을 비우기 무섭게 독한 술을 또 채워주었다.
“…….”
이 곰이 골로 보내려고 했던 게 나였나?
“천천히 좀 먹자.”
“어휴, 엄살은. 진태조 술 센 거 울 직원들이 다 아는데.”
잔을 부딪친 석주가 얼른 마시라며 태조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기울였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며 세경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온 세경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뒤따라온 신 매니저의 손에도 뭔가가 한가득이었다.
“어? 세경 씨. 와, 이게 다 뭐예요?”
태조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송 실장이 세경에게 달려갔다.
“술 안 드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서, 디저트 거리를 좀 사 왔어요. 오는 길에 야식 트럭도 보이길래 안주로 먹을 만한 것도 사 오고요.”
세경의 말에 신 매니저가 제 손에 들린 봉투를 쓱 들어 보였다.
“어머, 뭘 이런 걸 다 사 와요. 그냥 와도 되는데. 일단 여기 앉아요. 음식은 좀 덜어서 가져다줘야겠다.”
송 실장이 세경을 앉히고 어디선가 접시를 가져왔다. 멀찍이 앉은 태조와 눈을 마주친 세경은 그 앞에 있는 석주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다.
“누나, 저는 저쪽에서 먹고 있을게요.”
신 매니저는 안줏거리로 사 온 닭꼬치를 나눠주고 동료들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송 실장과 같이 움직인 세경도 몇몇 테이블을 돌아 태조와 석주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중간에 사고가 나서 차도 막혔다며?”
태조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주자 세경의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네. 선배님은 언제 오셨어요?”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자, 세경이도 한 잔 받아야지.”
“아, 저는…….”
세경이 석주가 주는 잔을 선뜻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응? 왜?”
“아까 저녁을 먹은 게 얹혀서. 지금은 술을 먹기가 좀 힘들 것 같아요.”
“체했어? 그럼 약 갖다줄까?”
“아뇨. 그냥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서요.”
“딱 한 잔도 못 할 것 같아? 드라마도 잘 된 거 같아서 축하주로 주려고 했더니.”
석주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짓자 세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받기만 해. 마시는 건 내가 할 테니. 속 안 좋으면 세경 씨는 이거 마시고.”
고개를 까닥인 태조가 테이블 한쪽에 둔 탄산음료를 따 세경의 앞에 놓아 주었다.
세경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송 실장도 괜히 석주의 눈치를 보다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요. 속도 안 좋으면 억지로 먹지 말고.”
“에이, 아쉽네. 세경이도 술 잘 먹는데. 그래 속 아프면 술은 다음에 같이 하고. 그래도 건배는 한번 하자. 시청률도 잘 나왔는데.”
“네. 그 정도는 뭐…….”
세경이 술잔을 들자 석주가 방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자, 다들 짠 한번 같이합시다. 이번에 세경이 드라마 시청률 1위도 했는데.”
석주의 돌발 행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세경에게 모아졌다.
아, 이렇게 주목을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선배, 그냥 조용히 짠하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술도 먹지 않았는데, 이미 술 댓 병은 비운 것처럼 술기운이 올라오는 듯했다.
“세경 씨, 축하해요.”
앞에 앉은 송 실장을 비롯해 사방에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세경은 연신 고맙다는 듯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거렸다.
“선배도 참…….”
“내가 뭐. 이렇게 좋은 일은 사방에 다 알려야지.”
석주가 세경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치곤 술을 쭉 들이켰다. 태조는 조용히 세경의 잔을 제 앞으로 가져가곤 그녀 앞에 물을 채운 소주잔을 놓아주었다.
“짜식, 챙기기는. 야. 세경이 것도 네가 다 먹어야 한다.”
“알았어.”
태조가 세경의 것을 포함해 술 두 잔을 연달아 비워냈다.
괜히 저 때문에 무리하는 거 아닌가 싶어 세경이 걱정스럽게 태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앞에 있는 음료수를 먹으라는 듯 탄산 캔을 눈짓했다.
“참, 이번에 보물찾기 1등 상금 송 실장님이 타셨다면서요?”
“오, 어떻게 알았어요?”
맥주를 마시던 송 실장이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빳빳한 5만 원짜리 지폐 스무 장을 부채처럼 펼쳐 보였다.
“짜잔. 나 올해 운 다 썼나 봐요. 나한테도 이런 일이 다 생기네?”
“어디서 찾으셨어요?”
“갈라진 나무 틈 사이? 손이 안 닿아서 나 나무도 조금 탔다니까요?”
그러다 생긴 영광의 상처라며 송 실장이 까진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눈도 좋지. 어떻게 그걸 봤는지.”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강 상무가 술잔을 들고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강 상무님이시죠? 그 종이 숨겨 놓으신 거.”
강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잘 숨겼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던 그가 세경을 쳐다보았다.
“세경 씨, 드라마 시청률 1위 한 거 축하해요. 음? 근데 세경 씨 잔은 어디 가고…….”
테이블 위를 훑던 강 상무의 시선이 태조의 앞에 높인 술잔 두 개에 머물렀다.
“넌 입은 하나면서, 왜 술잔이 두 개냐?”
“세경 씨가 속이 아프다고 해서.”
“그래서, 네가 흑기사를 자처한다고?”
저 곰이 대신 마셔주는 거라면 모를까, 언제부터 지가 세경 씨를 챙겼다고?
“너 요즘 수상해.”
“뭐가?”
“쓸데없이 스윗해져. 재수 없게.”
강 상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서 술잔을 홀짝거리고 있던 석주가 눈을 크게 떴다.
“태조가 스윗해? 왜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 따돌리고 몰래 전화를 받는 것도 그렇고. 저번엔 여기 사진을 찍어서 누군가한테 보내는 거 같더라고.”
“진짜?”
석주가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듯 눈을 빛냈다. 강 상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불어라. 너 여자 생겼지?”
“……쿨럭.”
태조의 옆에서 사이다를 마시고 있던 세경이 사레가 걸려 기침을 해댔다. 송 실장이 생수병을 따서 세경에게 내밀었다.
“에고, 세경 씨 여기 물 마셔.”
연거푸 기침을 해댄 탓에 세경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송 실장이 주는 티슈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들었다.
“아니, 왜 세경 씨가 사레가 걸리고 그래? 뭐 찔리는 거 있어?”
“……아뇨. 제가 찔리는 게 뭐가 있다고.”
시치미를 뗀 세경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물끄러미 세경을 보던 우현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태조를 추궁했다.
“솔직하게 털어놔라. 너 여자 생긴 거 맞지?”
“남의 사생활에 뭐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태조가 관심 끄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우현은 석주와 눈빛을 교환하며 술병을 집어 들었다.
태조를 취하게 한 후, 뭐라도 캐보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아우 씨, 저 미친 주량…….”
문제는 태조의 주량이 그들을 뛰어넘는다는 데 있었다.
“…….”
세경은 경쟁하듯 술을 마시는 세 남자를 보며 사이다를 홀짝거렸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세경은 술에 취해 하나둘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조와 짧게 눈을 맞추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나도 담배 한 대만.”
태조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손을 휘적거린 우현이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독한 놈. 두 배를 먹었는데 취하지도 않네.”
“양주를 사 왔어야 했나? 저번에 스트레이트로 먹으니까 좀 뻗는 거 같던데.”
태조가 나가고 우현이 석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곁으로 한 사람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저기요, 강 상무님.”
“응?”
우현을 찾아온 건, 총무팀에 소속된 남자 직원이었다.
“저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직원은 세경과 태조가 나간 문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속닥거렸다.
“저번에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걸 봐서 그런데.”
“…….”
“혹시 대표님이랑 세경 씨, 사귑니까?”
***
사람이 없는 고요한 정원엔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술에 취한 사람이 반, 일찌감치 잠이 든 사람이 반이다 보니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쁘다.”
숙소동에서 나온 세경은 꽃이 만개한 벚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태조의 말대로 조명이 켜진 꽃나무 길은 밤의 고즈넉함과 어울려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춥지 않아?”
곧바로 따라 나왔는지 태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어깨 위로 그의 향이 한껏 밴 재킷이 걸쳐졌다.
“조금 쌀쌀한 정도예요. 그보다 대표님은 괜찮아요? 술 많이 드셨는데.”
“아직은 멀쩡해.”
세경의 손을 잡은 태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새삼 태조의 주량이 세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태조와 강 상무, 석주 세 사람이 비운 술병만 해도 열 병이 넘은 것 같았는데.
“피곤하진 않아? 이 길로 쭉 가면 별채 하나가 있어. 우리 가족들이 가끔 오는 곳이라 침대도 다 마련되어 있고. 피곤하면 거기서 먼저 자도 돼.”
“저도 아직은 멀쩡해요. 근데 대표님은 뭐라고 하고 나오신 거예요?”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온다고.”
“그럼 빨리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천천히 들어가지, 뭐. 잠깐 술 깨고 왔다고 하면 되니까. 이제 겨우 단둘이 있는 거잖아.”
솨아아.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떤 나뭇잎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연약하게 붙어 있던 꽃잎들이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눈처럼 나부끼자, 세경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러 허공에 손을 뻗었다.
“밤에 보는 벚꽃도 예쁘네요.”
“그러게. 다른 땐 별다른 감흥도 없었는데.”
“이렇게 예쁜 풍경을 보고도요?”
“매년 보는 풍경인데 새삼 감탄할 일이 있나? 그냥 또 꽃이 피는 계절이구나 하고 넘어갔지.”
“지금은요?”
세경의 물음에 태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긴 하네. 내년엔 이 풍경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하기도 하고.”
태조의 대답에 세경이 설핏 웃었다. 그녀도 궁금했다. 세상의 빛을 본 앙꼬와 태조, 그리고 자신이 함께 걷는 이 길은 어떤 풍경일지.
“그나저나 우리 너무 오래 자리 비우는 거 아니에요?”
풍경에 취해 안쪽으로 더 깊게 들어가던 세경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이만큼 걸어왔는지 숙소동의 건물과 두 사람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슬슬 돌아가요. 둘 다 너무 늦게 돌아가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태조가 걸어온 거리를 가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세경과 같이 별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도 안에서 기다릴 석주와 우현이 신경이 쓰였다.
“돌아가면 세경 씨는 가방 챙겨서 별채로 가서 쉬어.”
“제가 거기로 가면 이상하다 여기지 않을까요? 강 상무님이랑 석주 선배가 그쪽에서 자려고 할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여기 빈방 아무 데나 던져 놓으면 돼.”
두 사람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꽃나무 길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쯤, 태조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가지 않느냐고 물으려던 세경은 태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앞에 낯선 그림자 두 개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온다더니.”
세경은 앞에 선 이를 확인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
산책로의 초입, 팔짱을 낀 강 상무가 삐딱한 자세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