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저게 대표야, 원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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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저게 대표야, 원수야?
2023.02.11.
세경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주춤거렸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딱 이런 심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곧장 뒤를 돌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같이 도망쳐야 할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맞잡고 있는 손이라도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세경은 손목을 살짝 비틀어보았다. 그러자 태조는 오히려 보란 듯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어, 음. 이러면 강 상무님의 화를 더 돋우지 않을까요?
세경은 태조의 옆에 바짝 붙어 강 상무를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꼼질거리는 커플의 손가락을 본 강 상무의 뺨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와, 내가 설마설마했는데.”
우현이 기가 찬 듯 헛숨을 내뱉었다.
총무팀 직원이 두 사람이 사귀냐 물었을 때만 해도 그게 뭔 헛소리냐며 손을 내저었었다.
그랬던 그가 그 헛소리에 혹하게 된 건, 세경과 태조가 손을 잡고 있는 걸 두 번이나 봤다는 목격담 때문이었다.
“이상한데.”
“이상하지?”
때마침 소리 없이 방을 나간 세경은 어딜 갔는지 돌아오지 않았고, 담배를 피우겠다며 나간 놈은 부싯돌로 담뱃불을 붙이는지 20분이 넘어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 술에 취한 직원들이 좀비처럼 비틀대며 쓰러지고 있을 즈음,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우현과 석주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 방을 나섰다.
하나 숙소동 주변엔 태조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세경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그녀가 어디 빈방에 들어가 잠이라도 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더랬다.
“아우, 추워.”
계절은 봄이라도 피부를 할퀴는 밤바람은 차가웠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나온 강 상무는 서늘한 바람에 몸을 떨며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워 넣었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른 두 사람이 태조를 찾는 걸 포기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
“…….”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 석주와 우현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고요해 그런지 별채와 이어진 꽃나무길 초입에 가까워지자 인기척과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두 남자는 나무 옆에 놓인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 커플의 얼굴을 확인했다.
종종 사내 연애를 하는 직원들이 여기에 오면 몰래 산책을 한다는 말을 듣긴 했었는데…….
그게 이 둘일 줄이야.
“진짜 둘이 손잡고 있네.”
우현이 세경과 태조를 번갈아 손짓했다.
“너 쓸데없이 스윗해진 게, 세경 씨랑 연애하고 있어서였냐?”
태조는 대답 대신 어깨만 들썩거렸다. 그러면서도 세경의 손을 놓진 않았다.
“야, 이…….”
눈으로 욕을 날린 우현이 입에 발동을 걸려 하자, 옆에 있던 석주가 그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 거야?”
태조에게 답을 듣긴 글렀다 싶었는지, 석주가 세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도 웃기만 할 뿐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조금 있다 따로 하고.”
어차피 여기에 서서 할 말은 아니었다. 태조는 허공으로 발길질을 하는 우현을 일별하고 숙소동 쪽을 눈짓했다.
“일단 저쪽 먼저 정리부터 하자.”
***
세경이 잔뜩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지만, 술자리는 이어지지 못하고 그대로 끝이 났다.
조금 더 술을 마시겠다는 이들은 배정된 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따로 이야기가 필요한 네 사람 또한 별채로 이동했다.
“우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강 상무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태조와 세경이 사귄다니. 아까 먹었던 술이 다 깨는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야? 두 사람 그런 낌새도 없었잖아?”
석주가 과자를 입에 넣으며 태조에게 물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강 상무와 달리 석주는 그래도 두 사람의 관계를 제법 쉽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
“정식으로? 그전엔 뭐 썸 같은 게 있었나 보지?”
썸만 있었으면 고민도 안 했지. 저들이 모르는 새 두 사람 사이엔 온갖 역사들이 이루어졌다.
“근데 왜 우리한테 말 안 했냐?”
강 상무가 뾰족한 눈으로 태조를 쏘아보았다.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들으니 서운한 마음이 반, 괘씸한 마음이 반이었다.
“원래는 조금 더 나중에 말하려고 했거든.”
“나중에? 왜?”
“몇 가지 고려할 게 있어서. 더 확실해지면 그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
“뭘 고려하는데? 아니, 숨길 거면 아예 제대로 숨기던가. 그러면서 회사에선 손잡고 다니며 티 내고 있었냐?”
강 상무가 같잖다는 듯 헹 코웃음을 쳤다.
“아니, 무슨 이벤트라도 있었으면 몰라.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관계가 휙휙 바뀔 수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진태조가?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벤트는 있었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어?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형수님이 세경 씨한테 꽃도 보내셨잖아?”
“어? 그러네. 그럼 형수님도 너랑 세경이가 사귀는 걸 아시는 거야?”
우현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뜬 석주가 말했다. 태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 상무의 눈의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형수님도 아셔? 야, 너 어쩌려고…….”
“결혼할 생각이야.”
“……뭐?”
말문이 막힌 우현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저 X끼가 9년 동안 부처처럼 살았더니, 살짝 맛이 간 건가?
“진짜예요, 세경 씨? 진 대표 혼자 헛소리하는 거 아니고?”
정신 나간 놈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한다 생각했는지, 강 상무가 타깃을 바꿔 세경에게 물었다.
진태조의 입에서 헛소리가 나왔길 바랐건만, 세경은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그의 바람을 무참히 뭉개버렸다.
“네.”
“오 마이…….”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강 상무가 눈을 질끈 감았다. 태조는 고개를 한번 흔들어 정신줄을 붙잡는 친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둘 게 있는데.”
“뭔데?”
태조가 세경을 돌아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 눈을 맞춘 세경이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세경 씨, 아이 가졌어.”
“……으엉?”
과자를 입에 문 석주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야 이 X끼야!”
연이어 터진 핵폭탄급 소식에 폭주한 강 상무가 결국 뒷목을 부여잡았다.
***
“정말 저 혼자 올라와도 돼요?”
침대에 누운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한숨을 푹푹 쉬는 강 상무의 한탄이 이어지는 동안 세경은 뒤늦게 몰려오는 졸음을 견디느라 필사적이었다.
낮에 일을 하나 마치고 가평까지 내려와 여태껏 버티고 있었으니 임신한 몸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자리를 지키는 세경을 본 태조가 그녀에게 먼저 올라가 잘 것을 권했다.
석주 또한 피곤하면 세경에게 먼저 올라가라 하였다. 강 상무는…… 제 말이 그렇게 졸릴 만큼 지루하냐며 서글픈 눈을 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같이 있을 때 했으니까.”
“대표님은 어디서 주무실 건데요?”
“이따 보고. 일단 저 녀석들이랑 이야기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강 상무님은 많이 놀라신 거 같던데…….”
“놀라봤자지. 지가 뭐 어쩔 거야. 내가 대푠데.”
이제 그만 하고 자라는 듯 태조가 그녀의 몸을 도닥거렸다. 설핏 웃은 세경이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얼마 가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 세경의 입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태조는 잠이 든 세경을 잠시 내려다보다 이불을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맨정신으로는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석주가 사 온 소곡주 한 병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강 상무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 나간 놈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경 씨가 태조랑 사귄다고. 형수님은 이미 알고 있는 데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도 생겼다고오…….”
석주가 신음하는 강 상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마른 안주를 입에 던지며 태조를 돌아보았다.
“세경이는 자?”
“어.”
태조가 맞은편에 앉자 우현이 그를 노려보았다.
“너, 이쒸……. 사고도 아주 트리플로 칠래?”
“남녀가 연애하는 게 무슨 사고야?”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면 말도 안 해. 어떻게 우리 소속사 배우랑……. 연애만 하면 내가 이렇게 놀라지도 않아요. 근데 뭐? 결혼에 아이?”
“…….”
“야, 이 망할 놈아!”
우현이 제 옆에 놓인 쿠션을 집어 태조에게 던졌다. 태조가 제게 날아온 쿠션을 무심히 받아내고 우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조용히 해. 세경 씨 자니까.”
“지 애인 숙면은 중요하고 친구 멘탈 나가는 건 걱정도 안 되나 보지?”
우현이 빠득 이를 갈았다. 석주는 느긋하게 술병을 따 태조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근데 의외긴 하다. 뭐 언젠간 너도 여자가 생기고 결혼도 할 줄은 알았지만. 그게 세경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담담히 말하는 석주를 보며 우현이 눈썹을 팔(八)자로 세웠다.
“나는 너도 의외다. 난 되게 놀랐는데 두 사람 사귀는 거에 넌 별로 안 놀란 눈친데?”
“나? 아니. 나도 되게 놀랐는데.”
어디가? 우현이 석주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곰 가죽은 남들과 좀 다른가? 놀랐다는 놈이 무슨 표정 하나 안 바뀌어?
“놀랐다는 녀석이 반응이 이래?”
“그럼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데?”
“나처럼 한숨도 쉬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태조한테 화풀이도 해야지.”
“에이. 나는 너랑 입장이 다르지. 세경이는 내가 아끼는 후배고 태조 저놈은 대표이기 전에 오래 알고 지낸 친구잖아. 둘 중 하나가 인간 말종이라 절대 엮이면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나도 한숨 쉬며 말리겠지만, 그게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욘 없지.”
“야, 그렇게 말하면…….”
……길길이 날뛴 내가 인간 말종 같잖아, 이 속 편한 곰탱아.
“물론 나도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냐. 결혼에 혼전 임신 이야기까지 나오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이 나오겠지. 하지만 개인적으론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해. 내가 아는 두 사람이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긴 거니까. 세경이가 스무 살 때부터 활동을 해서 그렇지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까 보니 두 사람 잘 어울리지 않았어?”
“잘 어울리긴 했……. 야, 이게 아니잖아! 이거 어떻게 수습하냐고. 세경 씨 열애설도 없었는데! 어? 결혼한다 발표하고 곧장 임신한 것도 터트려? 엉?”
“야이씨, 연예인은 사람 아니냐. 사람이 사랑하다 보면 결혼하기 전에 아이도 생길 수 있고, 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 속 편한 곰이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쉽게 말하네. 소속사 전화통 터지는 건 어쩔 거고, 태조 신상 털리는 거랑 세경 씨 기사에 달리는 악플러 잡는 건 다 누가 할 거야?”
“그건 월급 많이 받는 네가 해야…….”
“싸우자는 거냐?”
우현이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살발한 눈을 하자 석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발악하듯 작게 항의했다.
“그래도 뭐, 나쁜 짓도 아니고. 자기들이 좋아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는다는데, 그걸 뭐라고 해. 나쁜 건 아이 낳고 책임도 못 지는 사람들 아냐?”
“누가 그게 나쁘대? 나도 저 부처 같은 놈 결혼하는 거 좋다 이거야. 근데! 순서 좀 차근차근 밟아가면 안 되냐고. 뭐 9년 동안 수도승처럼 살았더니, 자제력이 바닥났나? 왜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질주하냐고.”
태조를 흘긴 우현이 입을 비죽거렸다.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제 속을 다 쏟아낸 게 시원했던지, 우현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풀려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말했잖아. 세경 씨랑 결혼한다고.”
“결혼한다고 말만 하면 다냐? 식은? 아이 가진 지는 몇 개월 됐는데?”
“아이는 3개월 차.”
“뭐? 벌써? 식은 언제 올리려고? 아니, 형수님은 아신다고 했고. 부모님께는 인사드렸냐?”
“세경 씨 어머님께 인사는 했고, 우리 부모님은 드라마 끝나고 난 뒤에 인사드리려고.”
드라마 끝나고? 그럼 아이를 가진 지 넉 달 정도 지나지 않나?
“끄응.”
팔짱을 낀 우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는 골이 아프다는 듯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이고, 두야. 저게 대표야, 원수야?”
“일단은 너한테 월급을 주니 대표겠지.”
옆에서 술잔을 홀짝거린 석주가 얄밉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