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 법적인 부부 하자고. (57/100)


57. 법적인 부부 하자고.
2023.02.15.



 
잠에서 깬 세경이 눈을 껌뻑거렸다. 눈을 뜨자 바로 옆에 잠들어 있는 태조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이불을 덮지도 않은 채 자신의 팔을 괴고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석주 선배와 강 상무님은 어디에 두고 여기에 온 거람?

태조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세경은 잠기운이 조금 가시자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살짝 벌어진 커튼 사이로 희붐한 빛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몇 시…….’

침대 위를 더듬던 세경은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이제 막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을 테니, 태조가 잠이 든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거였다.

그녀는 태조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세수를 하고 1층으로 내려오자, 새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거실의 모습이 보였다.

미처 치우지 못한 술병들은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었고, 석주와 강 상무는 각각 소파를 하나씩 차지한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세경은 발끝을 세워 소파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두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술병을 치운 뒤 테이블을 간단히 정리해 놓았다.


“뭐 마실 게 없네.”

주방으로 들어간 세경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물밖에 없는 냉장고 안을 확인하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벽 내 어두웠던 하늘이 서서히 제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술도 많이 마셔서 속이 쓰릴 텐데.

세경은 눈으로 제가 치운 술병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숙소동에서도 꽤 마신 것 같았는데 여기서 비운 소곡주만 해도 세 병이었다.

아니, 세 사람 다 무슨 간을 강철로 만들었나. 석주 선배는 대체 술을 얼마나 사 왔기에 계속 술이 나오는 건지.


“식당에 가면 꿀이 있으려나?”

나가서 숙취 해소 음료라도 사 오고 싶었지만 편의점은 여기서 차를 타고 좀 내려가야 했다.

밴을 타고 왔으니 키는 당연히 제훈이 가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곤히 자는 태조를 깨워 차 키를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번 가 봐야지. 그 전에…….”

허기진 배부터 좀 채우고.

세경은 어제 사 온 빵을 하나 뜯어 입에 넣었다. 그때 위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태조가 내려왔다.


“언제 깼어? 여기서 뭐 하는…….”

“쉿.”

세경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을 두드렸다. 그리고 소파에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그가 뻗어 있는 두 남자를 한번 쳐다보곤 세경에게 다가갔다.


“습관이야. 늘 이 시간에 일어나서. 근데 옆에서 자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저도 좀 전에 일어났어요. 목마르시죠? 물 좀 드릴까요? 아, 일어나신 김에 저 차 키 좀 주시면 안 돼요?”

“차 키? 키는 왜?”

세경이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따라 태조에게 내밀었다.


“다들 많이 마셨잖아요. 숙취 해소제 같은 건 따로 준비 안 하셨죠?”

“응.”

“그럴 것 같아서 좀 나갔다 오려고요. 어제 올 때 보니까 편의점 가려면 차 타고 좀 내려가야 하더라구요.”

“편의점에서 헛개차 사다 주게? 술 깨라고?”

피식 웃은 태조가 물을 마셨다. 입술을 쫑긋 내민 세경도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같이 사 오고요.”

“저놈들 뭐가 예뻐서.”

“제가 예쁨 좀 받게요. 앞으로 고생하실 강 상무님한테 잘 보여야죠.”

“고생하라고 월급 주는 건데 그만큼 일해야지. 그동안 너무 편했어.”

물잔을 비운 태조가 컵을 내려놓았다.


“차 타고 나갈 거면 같이 나가. 내가 운전할게.”

“술 다 깨셨어요?”

“응.”

“늦게까지 마셨잖아요. 잠도 늦게 잔 거 같은데. 운전은 제가 할게요. 일어나신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러든가. 잠깐 기다려.”

다시 2층으로 올라간 태조가 세수를 하고 내려왔다. 그는 챙겨온 차 키를 세경에게 건네며 별채를 나섰다.

쾅.

문이 닫히자 소파 팔걸이 위에 올라와 있던 강 상무의 발이 꿈틀거렸다.


“어휴, 진태조 저 망할 놈. 내가 세경 씨 때문에 참는다.”

잠꼬대처럼 중얼거린 우현이 몸을 돌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

늦은 시각까지 술을 먹었기 때문인지, 아침 일정은 자유로웠다.

쉬고 싶은 사람은 숙소동에 남아 짐을 챙겼고, 해장국으로 뜨끈하게 속을 달래고 싶은 사람들은 차를 나누어 타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드라마 촬영이 있어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석주는 세경이 사 온 숙취 해소제를 입에 물고 밴에 올랐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입덧을 하는 세경을 위해 태조는 별채에 남아 따로 사 온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을 통솔해 같이 식사를 하고 온 건 강 상무였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숙소동 앞뜰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넌 괜찮아?”

어젯밤 알게 된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세경은 제일 먼저 자신의 매니저부터 챙겼다.


“네. 술은 다 깼는데……. 어제 문 배우님이 가져오신 술이 세긴 했나 봐요. 목 넘김이 예사롭지 않다 싶었더니, 아침부터 목이 좀 부은 것처럼 아프네요.”

제훈이 쓰라린 목을 만지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감기 온 거 아니고? 여기 새벽 날씨가 좀 쌀쌀하던데.”

“그런가? 아우, 어제 오자마자 술 먹고 바로 뻗어서 저 꽃길은 구경도 못 했네요.”

“그렇게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구경하고 와. 어차피 우리는 따로 출발하니까.”

“그럴까요? 누나, 그럼 저 5분만요. 빨리 보고 올게요!”

세경의 제안에 제훈이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방정맞게 뛰어다녔다. 동료들을 데리고 사진을 찍는 매니저를 보다 세경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모여 있는 사람들과 좀 동떨어진 곳에 강 상무가 한 남자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간간이 고개를 주억이며 강 상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다 세경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는지,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허둥거리다 이내 세경에게 고개를 꾸벅거렸다.

살짝 웃은 세경도 직원에게 인사를 되돌렸다. 아마도 저 사람인 듯했다. 강 상무에게 태조와 세경이 사귀냐고 물었던 사람이.

말을 섞어보진 않았지만 얼굴이 아예 낯설지 않은 걸 보니 몇 번 스치듯 본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태조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들킨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깐 마주쳤던 거 같기도 하고.

근데 그날 저 사람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설마, 그 사람들도 다 뭔가 눈치채고 있는 거 아닐까?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나. 사내 연애는 당사자들 빼고 주변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거라고.


“세경 씨.”

누군가 어깨를 톡 건드리자 세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생글생글 웃은 송 실장이 세경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침 먹었어요? 식당에선 안 보이던데.”

“혹시 몰라서, 따로 별채에서 먹었어요.”

“그랬구나. 아, 숙취 해소제 세경 씨가 사 왔다면서요? 고마워요. 나도 아까 하나 먹었는데.”

“저 때문에 요즘 송 실장님 바쁜 거 생각하면……. 별거 아니죠.”

“에이 바쁘긴 무슨. 근데 세경 씬 어제 술도 못 먹어서 많이 심심했겠다.”

심심하긴요. 어제도 버라이어티한 일이 있었는걸요.


“세경 씨는 매니저랑 밴 타고 가죠?”

“네.”

태조는 세경과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강 상무가 극구 반대했다. 둘이 같이 차를 타고 싶으면 아예 지금 직원들에게 다 밝히고 가라면서.


“오늘은 스케줄 따로 없으니까 집에 가서 푹 쉬어요. 원래 지금이 제일 조심해야 할 땐데. 이래저래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그러게요.”

세경이 송 실장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태조가 말하기를 강 상무가 세경의 임신 사실을 아는 송 실장을 불러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석주를 팔아먹겠다는 말도 했었는데. 어떻게 팔아먹을 건진 아직 듣지 못했다.


“송 실장님.”

“음?”

“미리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뭐가요. 불안하게 왜 이래?”

겁먹은 얼굴을 한 송 실장이 세경의 옆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저 때문에 또 바빠지실 거 같아서요.”

“뭐 또 터지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세경이 말끝을 흐렸지만 송 실장의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터트릴 타이밍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이고.”

어쩐지 백만 원이 제 손에 떨어지더라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듯해 송 실장이 질끈 눈을 감았다.

***

출발은 같이했지만, 태조가 집으로 들어온 건 늦은 저녁이었다.

일찌감치 서울에 도착해 한숨 자고 일어난 세경은 뒤늦게 태조의 연락을 받고 그의 집을 찾았다.


“늦으셨네요?”

“우현이가 보내주질 않아서.”

강 상무와 같이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시달렸는지, 태조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세경이 아일랜드 식탁에 앉자 태조가 오렌지 주스를 따라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잔을 매만지며 태조에게 물었다.


“강 상무님이랑은 무슨 얘기 하셨어요?”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 그것도 아직 대략적이지만.”

“대략적이라면?”

“열애설과 결혼설을 언제 터트려야 하나. 둘을 동시에 터트릴까? 아니면 열애설은 건너뛰고 바로 결혼설을 흘려야 하나.”

“아…….”

“근데 아직 우리가 뭘 정한 건 없잖아. 강 상무는 아이 낳기 전에 식을 올릴 거냐고 묻던데? 그럴 거면 시간이 별로 없어서 준비하기도 빠듯하다고. 우리가 어떻게 일정을 잡느냐에 따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서 오늘 같이 이야기해 보라고 하더라고.”

“음, 그러네요. 부모님께 인사만 드린다고 하고 그 외엔 정하지 않았으니까.”

턱을 괸 세경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제 배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직은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심 원장이 말하기를 한번 나오기 시작하면 배가 부르는 것도 순식간이라고 하였다.

앙꼬를 품은 지 이제 석 달 정도. 드라마가 끝날 즈음이면 넉 달을 넘길 텐데. 그 후에 결혼식을 준비하기는 좀 무리일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대표님 부모님께 인사도 못 드렸는데. 올해 안에 준비해서 식을 올리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긴 하네요.”

“그럼 아이 낳고 해도 되고.”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올해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도?”

“나는 올해든 내년이든 상관은 없어. 그 사이 신부가 도망가는 것만 아니라면.”

태조의 농담에 세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남들처럼 결혼식 올리고 아이 낳겠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거든. 식을 나중에 올린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태조가 뒷말을 삼키자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뭐요? 뭐 걸리는 거라도 있나요?”

세경이 묻자 잠시 뜸을 들인 태조가 입을 열었다.


“식은 나중에 올려도 그 전에 집은 합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집을 합치자는 건 동거부터 하자는 거예요?”

“동거가 아니라.”

“…….”

“혼인 신고부터 하자는 거지. 사실혼 말고 법적인 부부 하자고.”

법적인 부부라니.

가슴이 파도를 타는 것처럼 묘하게 술렁거렸다.

태조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했을 때도, 그와 결혼을 한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났었는데.

그의 입에서 부부라는 단어가 나오자 뭔가 현실감이 확 느껴졌다. 자신이 정말 태조와 한 가족이 된다는 느낌이.


“혼인 신고하면 집은 어떻게 해요?”

“당연히 합쳐야지. 따로 신혼집을 구하든가, 아니면 두 사람 집 중 한 곳을 다시 리모델링 해도 되고.”

“…….”

“지금도 반동거 생활 중이긴 하잖아. 서로의 집에서 자고 가기도 하니까.”

“그, 그건…….”

세경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물론 지금도 거의 매일 같이 태조와 만나긴 하지만…….

같이 살게 되면 가끔 보던 장면들도 자주 보게 되겠지.

가령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조의 모습이라든가, 상의를 벗고 옆에서 잠이 든 그를 매일 같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렇게 얼굴이 빨개질까?”

“아, 아무 생각도요.”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뺨을 감싼 세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픽 웃으며 커피를 머금었다.


“아, 그리고 조만간 이유나 씨한테 연락이 갈 거야.”

“유나한테요? 무슨 일로요? 아…… 혹시!”

세경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을 빛냈다. 그녀가 생각한 게 맞다는 듯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가 유나 씨랑 계약하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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