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 세경 씨 애인, 진 대표라고. (58/100)


58. 세경 씨 애인, 진 대표라고.
2023.02.18.



- 나 너네 회사에서 연락받았어.

전화를 받자마자 얼떨떨해하는 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조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던 세경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채고 웃음부터 삼켰다.


“우리 회사에서 무슨 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세경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흥분한 유나가 쉴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 나랑 계약하재. 조금 전 송 실장님한테 연락이 온 거 있지? 나 어디 소속사랑 계약했냐고. 아직 안 했으면 우리랑 할 생각이 없냐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 어…… 일단 조금 생각해보겠다고. 그 말 듣고 나도 좀 경황이 없었거든. 좀 갑작스럽기도 하고. 송 실장님하고 통화하다가 강 상무님하고도 잠깐 이야기했는데. 혹시 오늘 시간 되면 계약 관련해 이야기를 좀 하지 않겠냐 하시더라구.

“한번 이야기해 보면 좋지.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면 그새 다른 곳하고 계약한 거야?”

- 아니. 다른 곳이랑 계약한 건 아니고. 음, 실은 어제 좀 큰 소속사에서 연락이 오긴 했는데. 나도 요즘 좀 힘에 부치긴 해서 살짝 흔들렸거든. 그러던 중에 갑자기 너네 회사에서 연락이 오니까 쪼끔 고민되더라. 근데 너네 회사는 배우 쪽 매니지먼트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이번에 새 레이블을 만들어서 가수랑 예능인 쪽으로 영역을 넓힐 거래. 그렇다고 진 엔터랑 완전 별개인 건 아니고. 왜? 좀 꺼려지나? 배우 위주라 잘 케어하지 못할 것 같아서?”

- 그런 건 아니고. 새 레이블이든 뭐든 어쨌든 너네 회사가 큰 건 나도 아는데. 나는 다만 왜 갑자기 나한테 연락이 왔나 해서. 혹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유나가 말끝을 삼켰다.


“혹시, 뭐?”

- 네 입김이 들어간 거 아냐?

“나 그만한 영향력 없는데.”

태조에게 유나의 이야기를 흘리긴 했지만, 영입하겠다고 결정을 한 건 순전히 강 상무의 의사라고 했다.

그간 유나가 활동한 모습과 지난번 세경이 주희로 인해 곤란을 겪었을 때 선뜻 나서준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던 거 같다고.


“강 상무님한테 네 이미지가 꽤 좋았나 봐. 일단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오늘 한번 가서 이야기라도 해 봐. 계약 관련해서도 물어보고.”

- 음, 그럴까? 솔직히 나도 네가 진 엔터 소속이라 이쪽이 더 끌리긴 하는데. 넌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어? 다음에도 그쪽이랑 재계약할 거야?

“나야 뭐…….”

……평생 그곳에 속할 것 같은데?


“지금 매니저도 사람들도 다 마음에 들어서. 별일 없음 재계약도 쭉 하려고.”

- 음,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그럼 내가 일단 너네 회사 가서 이야기 좀 해볼게.

“우리 회사 사람들도 좋으니까. 너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 그럴게. 조건만 나쁘지 않으면 뭐. 나도 아는 사람이 있는 데로 들어가는 게 좋기도 하고. 암튼, 내가 갔다 오고 나서 다시 연락할게.

세경이 그러라며 전화를 끊었다.


“대표님한테도 살짝 말해줄까?”

핸드폰으로 턱을 톡톡 두드린 세경이 이내 태조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지이이잉.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서류를 보고 있던 태조가 고개를 기울여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요즘엔 고양이도 전화를 하나 보지?”

액정에 뜬 발신인을 본 우현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며칠 전 바꿔놓은 세경의 애칭이 화면에 떠오르고 있었다.

<앙큼한 고양이>

그 애칭의 주인공이 세경이란 걸 알아챈 우현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세경 씨지? 받아라.”

우현의 턱짓에 태조가 전화를 받았다.

앙큼한 고양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지 통화를 하는 태조의 입술이 연하게 풀려 있었다.


‘저 자식 원래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 모습이 신기한 듯 우현이 턱을 괴고 태조를 쳐다보았다.

연애가 사람을 저렇게 변하게 만드는 건가 싶었다. 아니 연애가 아닌 사랑인가? 암튼 저렇게 좋아할 거 왜 진작에 애인을 만들지 않았던 건지.


“그래? 유나 씨가 그렇게 말했다고.”

태조의 입에서 유나의 이름이 나오자 우현이 ‘왜?’라고 물으며 눈을 크게 떴다.


“알았어. 일단 그렇게 말해둘게.”

태조가 전화를 끊자 삐딱하게 몸을 기울이고 있던 우현이 몸을 바로 세웠다.


“유나 씨가 왜? 우리하고 계약 안 하겠대?”

“아니. 방금 통화했는데 마음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진 거 같대. 때마침 혼자 일하는 것도 슬슬 버거워진 터라 소속사에 들어갈 마음은 생긴 것 같다고. 며칠 전 대형에서도 접촉한 모양이야. 조건만 나쁘지 않으면 우리와 계약할 생각도 있는 거 같은데?”

“그래?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잠깐 통화했었는데. 바로 세경 씨한테 전화 한 모양이네. 이렇게 된 거 세경 씨한테 미리 말해둘 걸 그랬다. 유나 씨 우리 회사 들어오게 설득 좀 잘해보라고.”

“유나 씨 설득은 네가 해야지.”

“와, 내가 뭔 말을 못…….”

똑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우현이 입을 다물었다. 바깥에서 송 실장이 찾아왔음을 알리자 태조가 들어오라 말했다.


“강 상무님, 방금 유나 씨한테 전화가 왔는데 촬영 끝나고 회사로 찾아오겠다네요. 계약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안 그래도 방금 세경 씨한테 연락이 왔었어요. 유나 씨랑 통화했다고. 마음이 우리 쪽으로 많이 기울였으니 조건만 잘 조율하면 될 것 같아.”

“그렇군요. 음, 근데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송 실장이 태조를 쳐다보자 그가 앉으라며 소파 쪽을 가리켰다.


“세경 씨 일로 논의할 게 있어서.”

연수원에서 세경에게 미리 죄송하단 말을 들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일이 이제 시작인가 싶어 송 실장이 긴장한 얼굴을 했다.


“저와 어떤 걸 논의하시려는 건지…….”

“드라마 끝날 때쯤에 세경 씨 열애설이나 결혼설을 흘릴까 하는데. 그 시기랑 대응책을 미리 좀 이야기해 볼까 하고요.”

“결혼……이요? 세경 씨 결혼한대요?”

아니, 물론 아이도 가졌으니 결혼은 하겠지만…….


“…….”

그녀는 앞에 있는 강 상무를 힐끔거렸다. 세경도 여기 없는데,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계속해도 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눈치 볼 거 없어요. 나도 다 알고 있으니까.”

그 눈빛을 읽었는지 강 상무가 먼저 나서 선수를 쳤다.


“아, 세경 씨가 털어놓은 건가요?”

“털어놓았다고 해야 하나? 들켰다고 해야 하나?”

“들켜요? 어쩌다가…….”

송 실장이 기함한 얼굴로 되물었다. 삐딱하게 입술을 끌어올린 강 상무가 태조를 흘겼다.


“어쩌다 걸렸겠어요? 좋아하는 거 티 내다 걸린 거지.”

“좋아하는 걸 티 내다뇨? 상무님은 세경 씨랑 마주치는 횟수도 적은데 어떻게 아시고요?”

“아, 송 실장님은 아직 모르시죠? 세경 씨 연애 상대가 누군지.”

송 실장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강 상무님은 아세요?”

“알지. 송 실장님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제가요? 그게 누구…….”

송 실장이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아니, 대체 강 상무님은 저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담? 자신보다 세경 씨랑 이야기한 횟수도 적으면서.


“지금 송 실장님한테 말해주는 건 다 비밀인 건 알고 있죠? 이거 아는 사람은 앞으로 고생 좀 하는 거야. 세경 씨 결혼설 터지고 나면 회사 전화 불날 텐데, 기자들 응대해야 하거든.”

“아, 그럼 전 그냥 안 듣고 발 빼면 안 될까요?”

“안 되죠. 송 실장님은 이미 세경 씨 임신 사실도 알고 있다면서요. 벌써 한발 들였는데 나머지 발도 마저 들여야지.”

여기가 무슨 서해 갯벌인가요? 발 한번 잘못 들였다가 고생길이 훤히 열리네요.


“네. 뭐, 세경 씨한테 미리 미안하단 소리도 들었으니. 그래서 누군데요?”

그 아이 아빠가?


“송 실장님 옆에 있는 사람이요.”

“네?”

제 옆에 있는 사람?

송 실장이 얼떨떨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집무실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셋. 상석엔 태조가 앉아 있었고, 강 상무는 자신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리고 제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고.


“제 옆엔 아무도 없는데요?”

“왜 없어요. 바로 옆 말고, 조금 더 멀리 봐 봐요.”

“조금 더 멀리?”

고개를 갸우뚱거린 송 실장이 다시금 좌우를 훑었다. 그러다 허공에서 태조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은 진 대표밖에 없긴 한데.

근데 지금 세경 씨 연애 상대를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세경 씨 애인이면서 아이 아빠이기도 하다고.


“어, 그러니까…….”

과부하가 걸린 머릿속이 사고를 정지했다. 그녀가 태조를 가리킨 채 강 상무를 응시했다.


“세경 씨 애인이…….”

송 실장이 얼빠진 얼굴로 묻자, 강 상무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진 대표라고.”

“네에에에에?”

놀란 송 실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엘리베이터에 탄 세경이 긴 숨을 내쉬었다. 강 상무와 송 실장을 만나 계약 사항을 조율한 유나가 오늘 정식으로 도장을 찍으러 회사를 찾아온다고 하였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다는 말에 겸사겸사 회사로 찾아오긴 했지만, 세경의 얼굴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태조가 송 실장에게 두 사람의 관계를 털어놓았다는 말을 들은 탓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한동안 넋이 빠져 있었다고.

하긴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을 털어놓은 순간, 태조가 아이의 아빠라는 것도 알아차렸을 테니 그녀가 놀라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으, 송 실장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강 상무나 석주에게 들켰을 때와는 기분이 좀 달랐다. 뭔가 머쓱하면서도 쑥스러운 기분이랄까.

그녀는 긴장으로 굳은 뺨을 주물럭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송 실장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

“…….”

때마침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던 송 실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미소를 입에 건 세경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눈을 가늘게 뜬 송 실장이 들고 있던 서류를 팔락거리며 세경에게 다가왔다.


“어쩜, 두 사람 다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요?”

“…….”

“와, 난 그것도 모르고…….”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세경이 배시시 웃으며 사과하자, 송 실장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뭐, 세경 씨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살짝 눈치라도 주지 그랬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진짜 놀랐잖아요.”

“처음엔 저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근데 강 상무님한텐 어떻게 들킨 거예요?”

“연수원에서 같이 산책하다가요. 그리고 직원 중에 한 분이 눈치를 챘다고.”

“아아. 그건 나도 들었어요. 강 상무님이 입단속은 시키셨다고 하셨는데.”

송 실장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식은 올해 안 올린다면서요?”

“너무 촉박하게 쫓기듯 하는 건 싫어서요.”

“그건 그래요. 일생에 한 번 하는 건데, 시간에 쫓겨서 하는 것보단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좋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참, 유나는 아직 안 왔나요?”

“왔어요. 안 그래도 내가 지금 계약서 뽑아 들어가려던 중이었거든. 같이 가요. 회의실에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송 실장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세경아!”

반가운 듯 환하게 웃는 유나를 향해 세경이 손을 흔들었다. 송 실장은 가지고 온 계약서를 유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천천히 읽어보고 사인해요, 유나 씨.”

종이를 넘긴 유나가 다시금 계약서를 확인했다.

회의실엔 강 상무 대신 태조가 앉아 있었다. 송 실장은 태조의 옆자리에 세경을 앉히고 유나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

유나는 계약서를 꼼꼼히 훑어보고 맞은편에 있는 세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결심이 선 듯 마지막 장에 제 이름을 적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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