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지금 키스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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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지금 키스해도 되나?
2023.02.22.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되나요?”
“네. 여긴 간인하시고요.”
송 실장의 안내를 따라 유나가 마지막 페이지에 도장을 찍었다. 계약서를 확인한 태조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걸 환영합니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송 실장님은 계약서 따로 챙겨주시고, 강 상무는 언제 들어온답니까?”
“거의 다 도착했다고 금방 오실 거라 하셨어요. 유나 씨, 상무님이 사무실 안내도 해주고 직원들도 직접 소개해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요.”
“그럴게요.”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은 스케줄도 없어 급한 일도 없는 터였다.
송 실장이 회의실을 나가자 유나가 세경을 보며 씨익 웃었다.
“다른 회사에서도 연락을 많이 받았다 들었는데. 맨 마지막으로 연락한 곳이 우리였죠?”
“네.”
“대형도 있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우리 회사랑 계약한 건 세경 씨 때문인가요?”
“아무래도 큰 영향을 끼치긴 했죠. 솔직히 다른 곳은 어떤지도 모르겠고요. 그래도 여기엔 세경이도 있고, 나중에 재계약까지 할 생각도 있다고 하니 그런 곳이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믿어주니 고맙네요. 유나 씨가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게 최대한 서포트 할 테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줘요. 문제가 생길 때도 마찬가지고. 그래야 우리가 유나 씨를 도울 수 있으니까.”
“네. 그럴게요.”
유나가 입술을 늘여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세경의 눈치를 보았다.
“저…… 대표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질문이 있다는 듯 유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말씀하세요.”
“대표님은 진 엔터 설립 당시부터 쭉 여기 계셨던 거죠?”
“그렇죠.”
그건 왜 묻는가 싶어 태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문석주 배우님하고도 많이 친하신가요?”
“네. 친합니다. 석주도 저희 창립 멤버나 마찬가지니까.”
“유나야. 너…….”
유나가 뭘 물어보려는 건지 눈치를 챈 세경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혹시 문석주 배우님의 지인 중에 촬영장에서 세경이를 보셨던 분이 없을까요?”
“석주가 발이 넓어서. 지인이라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건지?”
“음, 한 3~4년 전쯤에 세경이가 문 배우님이랑 같이 출연한 드라마였을 거예요. 세경이가 저희 컴백 무대랑 드라마 출연을 겸하느라 잠도 못 잤었거든요. 그러다 촬영장에서 코피를 흘렸는데, 문 배우님과 아는 분이 세경이를 챙겨주셨다고 했거든요.”
“…….”
태조가 유나의 말을 복기하며 생각에 잠겼다.
드라마 촬영장에 나타난 석주의 지인, 코피를 쏟던 세경을 챙겨주던 사람.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져 태조가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아랫입술을 질끈 문 세경은 낭패감 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왠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 일 겨울에 벌어진 거 아닙니까?”
“겨울이요? 아! 맞아요. 그쯤이에요. 저희가 연초에 컴백을 했으니까. 아세요? 그분 아직 회사에 계신가요?”
“유나야, 그만…….”
곤란한 얼굴을 한 세경이 몸을 들썩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필 당사자에게 그 본인을 아냐고 물을 건 뭐란 말인가.
“회사에 있는지는 한번 찾아 봐야겠고.”
태조가 금방이라도 일어나 유나의 입을 틀어막을 듯한 세경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 사람은 왜 찾는 겁니까?”
“그분이 세경이의…….”
“왁!”
당황한 세경이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고라니 울음 같은 비명소리에 유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경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세경의 뺨이며 귓가가 석류알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쟤가 왜 이러지?’
유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왜? 너도 궁금하지 않아? 그분 손수건도 계속 가지고 있었으면서.”
“손수건?”
“네. 그때 코피를 닦아줬던 그분 손수건이요. 세경이 말로는 그분이 되게 잘생겼다고 했거든요. 연예인은 아닌 거 같고, 아마 문석주 배우님의 지인인 거 같은데.”
세경이 질끈 눈을 감았다. 고장 난 수도꼭지도 아니고. 유나의 입에서 숨기고 싶었던 과거 이야기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짐작 가는 사람은 있는데. 나중에 세경 씨한테 한번 확인해 봐야겠네요.”
확인하긴 뭘 확인해요. 벌써 다 눈치챘으면서.
세경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태조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강 상무가 들어왔다.
“아이고. 미안해요, 유나 씨. 내가 좀 일찍 오려고 했는데 중간에 차가 막혀서.”
사과부터 한 강 상무가 회의실에 있는 태조와 세경을 순서대로 훑었다.
“두 사람도 여기 있었네. 송 실장은?”
“사무실에. 계약서에 도장 찍었고 내가 확인했어.”
“그래? 난 또 유나 씨 혼자 있으면 어쩌나 했더니. 세경 씨도 같이 있어서 어색하진 않았겠네요. 근데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세경 씨 첫사랑 이야기.”
“엥? 세경 씨 첫사랑?”
그런 걸 태조 앞에서 말해도 되는 건가?
눈을 굴린 우현이 고개를 푹 숙인 세경과 그 옆에 앉아 팔짱을 낀 태조를 보며 히죽 웃었다.
왠지 모르게 고소한 느낌이었다. 현 애인을 옆에 두고 첫사랑 이야기라니. 진태조 속이 꽤 뒤집히겠는걸?
“갑자기 세경 씨 첫사랑 이야기는 왜?”
“그 사람이 우리 회사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오호.”
우현이 흥미로운 표정을 하곤 눈을 빛냈다. 태조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픽 웃었다.
“유나 씨한테 회사 안내랑 직원들 소개해준다며. 안 가?”
태조가 어서 꺼지란 말을 돌려 하자, 우현이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아, 가야지. 유나 씨 일단 나랑 한 바퀴 돌고 옵시다. 직원들이랑 유나 씨 담당 매니저도 소개해줄게요.”
“네. 세경아, 나 갔다 올게. 여기서 기다려.”
세경이 울상을 한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이 회의실을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태조가 책상에 걸터앉아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호감이 생긴 건 얼마 안 됐다고 하지 않았나?”
“…….”
“손수건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태조가 세경이 한 거짓말을 하나하나 들춰내자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유나가 계약한다 했을 때, 마냥 좋아할 게 아니라 저 입부터 단속해야 했는데.
“그런데 내가 세경 씨 첫사랑이었다?”
“……그만 하세요.”
수치사 할 것 같으니까.
“…….”
입가를 가린 태조가 세경의 귀가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이런 거짓말이라면 몇 번이고 속아주겠지만. 진짜, 이 귀여운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나 좀 봐 봐.”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아 내렸다. 바닥만 뚫어지게 보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조에게 제 속이 낱낱이 까발려진 게 부끄러운지 세경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지금 키스해도 되나?”
“뭐, 뭐, 뭘 해요?”
당황한 세경이 말을 더듬었다.
여기 회의실인데요. 지나가다 직원들이 보면 어떡하려고 이러세요?
그녀가 뭐라 말도 못 하고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자, 태조가 회의실 밖을 한번 쳐다보곤 고개를 숙였다.
촉.
짧은 순간 태조의 입술이 세경의 입술에 부드럽게 겹쳐졌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세경과 눈을 맞춘 그가 뭔가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지, 직원들이 보면 어떡하려고…….”
“아무도 없는 거 확인했어.”
태조가 다시 고개를 들어 바깥을 확인했다. 그때 매니지먼트 팀이 있는 사무실에서 나오던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
언제부터 저기 있었는지, 태조를 보는 우현의 시선이 영 탐탁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즈긋들이…….”
어금니를 꽉 깨문 우현이 이를 갈았다.
아니, 왜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올라오나? 송 실장한테도 말했겠다, 이제 사방팔방 다 티 내겠다 이건가?
“강 상무님?”
강 상무가 회의실을 뚫어지게 노려보자 유나가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보고 있던 태조가 유나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목례를 하고 있었다.
“에효, 갑시다.”
우현의 입에서 체념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태조를 향해 눈으로 욕을 한 그는 유나를 데리고 회의실 반대편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진 엔터의 레이블인 ‘J-list'와 계약을 마친 유나는 소속사의 케어를 받으며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스케줄 조정이며 의상 등 모든 걸 혼자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유나는 매니저와 코디의 도움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새 프로그램의 MC로도 들어가게 되었다.
세경도 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우아한 가족>의 드라마가 어느덧 중반을 달려가기 시작했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드라마는 꾸준히 시청률이 올라 화제성 면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에서 세경이 맡은 역할이 재벌가 상속녀이다 보니, 그녀가 입은 옷이며 가방 등도 자연히 화제가 되었다.
물론 촬영은 이미 몇 달 전에 끝났던 터라 해당 상품들이 매장에 남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상품 판매에 대한 문의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고.
그러다 보니 아직 드라마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세경에게 들어오는 광고와 시나리오도 차고 넘치기 시작했다.
강 상무는 제 키만큼 쌓이는 높은 시나리오의 산을 보며 굉장히 아쉬워했다. 세경이 임신한 상태라 당장 촬영에 들어갈 만한 작품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연히 그에 대한 원망은 태조에게 향했다. 다만 그가 제 월급을 쥐고 있기에 멱살까지 잡진 못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세경은 촬영 일정에 좀 여유가 있는 작품들 위주로 시나리오를 골라 보고 있었다.
“누나, 우리 여기서 먹을 것 좀 사 가지고 갈까요?”
차를 타고 상암동으로 향하는 길, 운전석에 있는 제훈이 길가에 위치한 카페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유나는 뭐 먹었으려나?”
“주형이 형이 사 오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유나 누님 거까지 사 오고요.”
“그래. 넉넉하게 사 와. 남으면 다른 사람도 주고 아니면 우리가 간식으로 먹으면 되니까.”
“넵. 그럼 제가 샌드위치랑 커피 좀 사 올게요. 누나는 과일 주스가 좋죠?”
“응.”
그새 세경의 취향까지 파악한 제훈이 길가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린 그가 세경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
그렇게 5분여 정도가 지났을 때, 차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있던 세경이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꺾어댔다.
오전에 남양주 스튜디오에서 촬영 하나를 마치고 온 터였다. 서울로 오는 내내 차에 앉아 있었더니 몸이 굳은 듯 뻐근한 느낌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세경은 제훈이 카운터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곤 차에서 내렸다.
굳은 몸을 풀 겸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세경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같이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요?”
“네. 그래요.”
조심조심 물어오는 사람에게 세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세경이 몇몇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코가 아릴 만큼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더니 돌아서는 세경의 어깨를 누군가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아!”
어깨가 뒤로 쏠릴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세경의 몸이 넘어질 듯 휘청거리자, 카페에서 나오던 제훈이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달려왔다.
“누나!”
제훈이 넘어질 뻔한 세경의 몸을 한쪽 팔로 받아냈다. 어깨를 움켜쥔 세경은 제 앞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길게 웨이브 진 머리, 검은색 선글라스에 짙은 붉은색 립스틱. 여자는 전체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앞 좀 잘 보고 다녀요. 누가 보면 여기가 그쪽 땅인 줄 알겠네.”
삐딱하게 세경을 내려다본 여자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자신의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사진을 찍느라 길을 막은 세경을 비난하는 말투였다. 그 모습을 본 제훈이 욱해 소리쳤다.
“이봐요. 지금 누가 할 소릴! 방금 그쪽이 일부러 와서 부딪친…….”
“제훈아.”
제훈의 팔을 잡은 세경이 화를 내는 그를 말렸다. 세경은 여자를 한번 쳐다보곤 굳어 있던 얼굴을 살짝 풀었다.
“미안해요. 제가 길을 막았나 보네요.”
“…….”
“지나가세요.”
몸을 옆으로 튼 세경이 길을 내주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대며 여자를 힐끗거렸다. 제훈도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흥.”
그 모습들이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친 여자가 세경을 지나쳐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작게 한숨을 쉰 세경은 얼어붙은 주변의 공기를 풀 겸 사람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팬들에게 인사를 한 세경이 차에 오르자, 뒤따라 운전석에 탄 제훈이 입을 삐죽거렸다.
“왜 말리셨어요, 잘못한 건 저 사람인데.”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일 크게 만들 필요 없잖아. 그리고 저런 사람하고 엮이면 피곤해져.”
“그건 알지만……. 어휴, 억울해서 그러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요? 분명 자기가 일부러 와서 부딪쳐 놓곤!”
제훈이 조수석에 커피와 쇼핑백을 내려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근데요, 누나. 아까 그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아요?”
“너도 그랬어?”
룸미러로 눈을 맞춘 제훈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어 확신은 못 하지만, 세경도 분명 여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제훈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하면, 이쪽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인 듯한데.
“흠.”
대체 그 사람을 어디서 봤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