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 커플링인데, 그거. (60/100)


60. 커플링인데, 그거.
2023.02.25.



“아무튼, 오여리 등장 한번 시끄럽네.”

턱을 괸 여자가 계단을 올라오는 오여리를 향해 비죽거렸다. 친구의 비아냥이 불쾌한 듯 인상을 쓴 그녀는 세경과 부딪친 곳을 털어내며 의자에 앉았다.


“짜증 나게 길을 막고 있잖아.”

여리의 앞에 앉은 여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길을 막긴. 사람이 갑자기 몰린 탓에 인도가 좀 좁아지긴 했지만 사람 하나 걸어 다닐 공간은 충분했다.


“짜증이 난 게 길을 막아서 그런 거야? 저 사람이 인기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선글라스를 벗은 여리가 맞은편에 앉은 친구를 노려보았다.


“알면서 뭘 물어봐? 뭐야, 저건? 인플루언서? 가수?”

“윤세경 씨라고 요즘 핫한 드라마의 주연 배우.”

“허,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배우 하나 보지?”

오여리가 가방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앞에 있던 친구가 그녀의 입에서 담배를 휙 빼앗아 갔다.


“실내 금연이다. 개념은 챙기자, 친구야. 그리고 그 개나 소엔 너도 포함되는 거 알지?”

“야, 민소영.”

목소리를 깐 여리가 인상을 썼다. 그녀도 한때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데뷔 초 금수저 집안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드라마에 조연급으로 출연했지만, 제대로 연기를 배웠던 것이 아니라 그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 저 여자 알아? 왜 안 어울리게 저 여자 편을 들고 그래?”

“알진 못하지만 너처럼 무조건적으로 불호인 건 아니라서. 그나저나 넌 어떻게 들어온 거야? 한국으로 못 오는 거 아니었어?”

“못 오는 게 아니라 안 들어온 거지. 집에선 몰라. 지금 나 한국 들어온 거.”

여리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쫓겨나듯 한국을 떠나야 했던 그녀가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은 게 근 6년 만이었다.


“슬슬 외국도 질려서. 조만간 정리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완전히? 마 여사님이 허락하셨어?”

소영의 말에 여리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허락? 뭘 굳이 허락까지. 6년 정도 떠나 있었으면 벌은 충분한 거 아니야?”

의자에 등을 기댄 여리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얼음을 까득 깨문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조 오빤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여리의 입술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서울의 하늘은 전과 다름없이 푸르렀다.


 

***

대기실로 들어오는 제훈의 얼굴이 뚱하게 불어 있었다. 유나는 자신의 매니저인 주형을 한 번 쳐다보고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훈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저는 아니고요.”

제훈이 쭉 내민 아랫입술로 세경을 가리켰다. 주형은 제훈의 손에서 커피 캐리어와 쇼핑백을 가져갔다.


“세경이? 세경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고요?”

눈을 크게 뜬 유나가 어디 다쳤나 싶어 세경의 몸부터 살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 캐묻는 말에 세경은 별일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누구랑 살짝 부딪쳤어.”

“살짝이라뇨! 일부러 와서 세게 부딪쳤어요. 누나 넘어질 뻔했다고요.”

“어쩌다? 아니, 누가 일부러 그래?”

“모르는 사람이야, 나도. 그냥 길에서 사진 찍고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그래서 사과는 받았어?”

유나가 묻자 제훈이 흥분해 소리쳤다.


“못 받았어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구는 거 있죠? 누나한테 길 막지 말라고. 옆에 충분히 지나갈 수 있었는데.”

“헐. 무슨 그런 또라이가. 그래서 그걸 가만뒀어?”

“그럼 같이 싸워? 주변에 사람도 많아서 그냥 미안하다 하고 왔어.”

세경이 포장해 온 샌드위치와 음료들을 꺼내놓았다. 유나가 그 말을 듣곤 울컥해 방방 뛰었다.


“아니, 이 맹추가! 네가 사과를 받아야지, 왜 하고 있어!”

“세경이 누님이 현명하신 거죠. 원래 미친개에게 물리면 답도 없다잖아요.”

차분한 어투로 평하는 말은 신랄했다. 세경은 각기 다른 스타일로 제 편을 들어주는 주형과 유나를 보곤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매니저 잘 뽑았다. 주형 씨가 차분하니 어른스럽네.”

“주형 씨가 차분하고 어른스러우면? 난 뿔난 망아지야?”

“아니라곤 못 하겠는데.”

세경이 이거나 먹으라며 유나에게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코끝을 찡긋거린 유나가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세경의 앞에 앉았다.


“진짜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널 치고 간 거야?”

“응. 아는 사람은 아닌데…….”

세경이 소스가 묻은 입가를 닦으며 말을 흐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훈이 나서 말했다.


“좀 얼굴이 익숙한 느낌이에요. 세경이 누나도 저도.”

“어떻게 생겼는데요?”

“선글라스를 써서 눈은 안 보였고, 웨이브 진 머리에 입술은 조커처럼 시뻘겋고……. 아무튼, 전반적으로 인상이 세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강렬한데, 누군지 모르겠다고요?”

제훈이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나가 세경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도?”

“응. 그게 신기하다니까. 인상이 흐린 것도 아닌데 이름이 딱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아주 잠깐 본 거 아냐? 두 사람 다 본 적이 있으면 뭔가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영화 촬영장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사람이라든가.”

“그런가?”

“아니면 예전에 활동하던 연예인이었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범위는 다 넓네. 됐어. 뭐 또 마주칠 일이 있으려고.”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다는 듯 세경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참, 너 부부이몽 방송한 거는 봤어?”

세경이 빨대로 주스를 쪽 빨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유나의 집에서 찍었던 부부이몽이 엊그제 방송을 탔었다.

방송의 효과는 제법 컸다. 인터뷰할 때 유나가 정란의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제주도에 있는 모친의 카페엔 평소보다 손님이 더 많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엄마한테 전화도 왔었어. 아침부터 카페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손님들한테 물어보니까 네가 엄마 이야기를 하는 거 보고 찾아온 거라고 했대.”

“앗, 진짜? 어머니 바빠지셨겠네. 그러고 보니 너희 어머니 뵌 지도 오래된 거 같다. 재작년이었나? 마지막으로 제주도에서 뵈었던 게?”

“그치. 엄마가 너 원호 씨랑 같이 한번 오라고 하셨어.”

“부르시면 또 가 봐야지. 나중에 스케줄 없을 때 남편이랑 시간 내서 한번 가 봐야겠다. 너는 언제 시간 낼 수 있어? 너도 같이 갈 수 있음 같이 가.”

“당분간은 좀 무리일 것 같아. 일이 많아질 것 같아서.”

세경이 태조와 사귄다는 사실을 밝힌 후, 강 상무와 송 실장은 머리를 맞대고 열애설을 터트릴 타이밍과 방법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동시에 세경의 몸이 무거워지기 전, 기존에 계약된 광고 촬영을 마치려 스케줄도 조율하고 있었다.

세경의 열애설은 대략 드라마가 끝날 때쯤으로 잡고 있었지만 문제는 방법이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열애 사실이 밝혀지면 좋겠지만, 그 와중에 태조의 신상이 드러나는 게 걱정이었다.

물론 태조는 어차피 기자들이 뒤를 캐느라 그 상대가 누군지 금방 알아차릴 거라 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늦게 알려지길 바랐다.


“하긴 이번에 드라마 대박 나서 바빠지긴 하겠더라. 시나리오도 엄청 들어왔다며. 벌써 차기작도 결정했어?”

“아직. 지금 보고 있는 중이야. 근데 주희한텐 연락 안 왔어?”

“음, 뭐 아직은.”

유나가 뺨을 긁적거렸다. 사실 이번에 부부이몽에 출연한 건 유나가 세경이 자신을 도와줬던 일을 알리려는 의도가 컸지만, 의외로 불똥은 다른 곳에서 튀어 올랐다.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은 몰랐네. 설마 우리가 활동할 때 영상을 찾아 올릴 줄은.”

최근 팬들은 예전 영상을 찾아 커뮤니티에 공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영상에 세경을 무시하거나 무안을 주는 주희의 행동이 담겨 있다는 거였다.

처음엔 예능이라 행동이 좀 과한 거라 방어하던 이들도, 비슷한 영상들이 몇 개씩 올라오자 파장은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오히려 주희가 세경을 그룹 내에서 따돌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쏟아냈고, 그 결과 지금 주희의 SNS와 드라마 게시판엔 그녀를 비난하는 글들이 잇따라 도배가 되고 있었다.


“그분 드라마 하차하거나 분량을 확 줄인다는 말도 있던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형이 툭 내뱉었다.


“…….”

세경은 무거워진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먼저 자신을 깎아내리고 궁지에 몬 것은 주희였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마음이 썩 좋진 않았다.

유나만큼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쨌건 7년간 한집에 살았고 같이 활동을 한 사이였다. 그런 친구의 몰락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표정 풀어. 우리가 뭐 나쁜 말 한 것도 아니고. 뿌린 대로 거두는 거지. 주희가 욕심이 좀 과해서 그런 거야.”

세경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유나가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맞다. 나 우리 나온 영상 댓글 보다가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뭔데?”

세경이 묻자, 유나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세경의 손가락을 쭉 훑었다. 그러곤 그녀의 왼쪽 손을 잡아 들고 물었다.


“이 반지, 어디 거야?”

 

***


 
세경의 이름을 검색한 태조가 연예면에 뜬 기사를 확인했다.

<우아한 가족>에 이어 세경이 게스트로 나온 부부이몽에 관한 기사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창 드라마가 인기가 오르고 있는 덕에 세경이 나왔을 때의 부부이몽의 시청률도 소폭 상승한 상태였다.

그렇게 몇 개의 기사를 살피던 그는 부부이몽의 하이라이트 영상에 달린 댓글 창을 확인해보았다.

그러던 중, 태조의 손이 한 댓글에서 멈추었다.

└ 윤세경이 끼고 나온 반지, 어디 건지 아시나요?

태조가 영상을 플레이하고 세경이 낀 반지를 확인했다. 그가 선물해준 반지가 세경의 손가락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요즘 세경이 드라마에서 입고 나온 의상이나 소품들에 대한 문의가 많다고 하더니. 실제 세경이 착용한 물건에도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람들에게 알려진 브랜드 상품으로 커플링을 맞출 걸 그랬나?

로젤에서 산 반지는 자체 제작한 거라 한 점밖에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반지를 알아볼 사람도 없을 테고.


“좀 아쉽네.”

태조가 턱을 매만지며 다른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의외로 세경의 반지에 관심을 가진 이는 한둘이 아닌 듯했다.

그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송 실장과 강 상무가 들어왔다.


“대표님, 세경 씨 부부이몽에 나온 거 반응이 좋은 거 같아요.”

한동안 죽을상을 하고 있던 송 실장이 오랜만에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도 방금 기사 봤습니다.”

“요즘 세경 씨가 착용한 옷이나 가방도 다 인기가 있다 보니, 다들 자기네 제품 협찬해 주겠다고 난리예요. 기자들도 제품 어디 건지 확인하느라 계속 전화하고.”

“그래요?”

태조가 웃으며 소파로 걸어왔다. 강 상무는 그렇게 좋냐는 듯 가늘게 뜬 눈으로 태조를 흘겼다.


“애인 칭찬해주니까 아주 좋단다. 난 아까워 죽겠는데.”

“뭐가, 또?”

“시나리오, 광고 다. 들어온 게 몇 갠데.”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던 강 상무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차피 시나리오가 백 개 들어와도 그중에 하나밖에 못 해.”

“알아, 인마. 뭐 개중에 또 괜찮은 걸 찾아봐야지. 아, 세경 씨는 너랑 결혼해도 계속 활동하는 거지?”

“본인이 하고 싶다면야.”

“하고 싶다면……이 아니라! 꼭 해야지! 이번 드라마로 출연료도 높아지고, 연기 폭도 넓어졌는데!”

강 상무가 태조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가 따갑다는 듯 눈을 찌푸린 태조가 새끼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긁적거렸다.

두 사람의 투닥거림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송 실장이 태조에게 물었다.


“대표님, 세경 씨가 이번에 부부이몽에 끼고 나온 반지요. 혹시 어디 건지 아세요?”

“왜요?”

“아니. 어떤 기자가 세경 씨가 입은 옷이랑 착용한 소품에 관해서 기사로 쓴다고 물어봤거든요. 이번에 부부이몽 촬영할 때 세경 씨가 끼고 나온 반지가 어디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에요. 실제로 문의하는 글도 종종 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이 무슨 명품 브랜드에서 협찬받은 거라고 써서 확인해 봤는데. 그 브랜드엔 세경 씨 반지가 없더라고요.”

“당연히 없겠죠. 협찬이 아니니까.”

“그럼…….”

“내가 준 거예요.”

태조의 대답에 강 상무가 입을 떡 벌렸다.


“그거 프러포즈 반지였냐?”

“아니.”

태조의 부정에 강 상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커플링인데, 그거.”

“커플링이요?”

반문한 송 실장이 태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표님은 반지 안 끼셨잖아요?”

“대놓고 티 내면 이놈이 뭐라고 할까 봐.”

태조가 손가락으로 강 상무를 가리켰다.


“사람들한테 알려지고 나면 나도 끼려고 했어요.”

“어……. 커플링이면 곧 세경 씨 애인 있다고 소문나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커플링인지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 거 같아서.”

“왜요?”

“브랜드 상품이 아니거든요. 그 반지 청담동에 있는 개인 브랜드 숍에서 구입한 거예요. 상품도 딱 한 점 있던 거고.”

“그래서 모를 거라고?”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눈썹을 들썩거린 강 상무가 송 실장을 쳐다보았다.


“난 왠지 누구 하난 알 것 같은데…….”

“저도요.”

송 실장이 냉큼 동의했다. 강 상무는 왠지 모를 찝찝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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