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실수는 의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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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실수는 의도적으로
2023.03.08.
“정말 커플링이야?”
턱을 괸 유나가 입을 삐죽거렸다. 쉬는 날이라 세경의 집을 찾아온 그녀는 서운해 죽겠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경이 끼고 있는 반지 때문이었다. 지난번 어디서 산 반지냐 묻는 말에 선물을 받은 거라 잘 모르겠다 얼버무렸는데…….
최근 세경의 반지가 커플링이었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자, 애인이 있는데도 자신에겐 말해주지 않았던 게 퍽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대. 커플링인 건 나도 최근에 알았어.”
“왜? 남자친구도 같이 꼈을 거 아냐.”
남자친구라. 태조에게 저 호칭을 매칭시키자 뭔가 어색하면서도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반지 줄 땐 그런 말이 없었거든. 다른 사람들이 알면 곤란해질까 그 사람은 반지를 따로 끼지도 않았고. 지금은 사이즈 조정하느라 숍에 맡겨놨대.”
“으흥.”
작게 콧소리를 낸 유나가 히죽 입술을 늘였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누군데? 언제 소개해줄 거야?”
밥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처럼 유나가 발을 마구 굴렸다. 세경은 잠시 고민했다. 태조는 강 상무와 석주도 알고 있으니 유나나 신 매니저에겐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걸 알려줘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응.”
세경의 대답에 유나는 눈동자와 같이 머리도 굴렸다.
“커플링인 게 들통나면 곤란한 사람이라. 혹시, 문 배우님?”
“아냐.”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부정에 유나가 몸을 움찔했다.
“설마 강 상무님이야?”
“아닌데.”
“그럼 이번에 같이 드라마에 출연한 그 남자 배우?”
아니, 석주 선배랑 강 상무님은 말하면서 왜 대표님은 건너뛰는 건데?
“그 사람도 아니네요.”
“아우, 속 터져! 그냥 말해줘. 누군데?”
세 번 연속 오답을 내뱉은 유나가 세경을 닦달했다. 세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대표님.”
“대표님?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대표가 어디 한둘……. 엉?”
“…….”
“대표님? 우리 회사 대표님?”
눈을 휘둥그레하게 뜬 유나가 재차 물었다. 싱긋 웃은 세경이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 계약서 쓸 때 같이 계셨던 그 대표님?”
“응. 진태조 대표님.”
“으헉!”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유나가 양손으로 제 볼을 꾹 눌렀다.
“너, 너, 너, 어, 어, 언제부터…….”
“좀 됐는데.”
“맙소사. 난 그것도 모르고 실수를…….”
인생의 종말이라도 본 듯 유나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어쩐지 세경이가 그날 고라니 울음 같은 비명을 내지르더라니!
“어떡하냐. 나 그것도 모르고 대표님 앞에서 네 첫사랑 얘길 해버렸는데.”
그것도 아주 신나게 떠들어 댔었다. 게다가 대표님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다 하였고.
“미안. 혹시 그 일 때문에 싸운 건 아니지?”
“싸우진 않았어.”
그냥 내가 수치사 할 뻔했지.
“그리고 하나 참고로 말하면.”
세경이 말을 잇자 유나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또 무슨 폭탄 발언이 나올까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그냥 잠자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계속 미안해할 유나를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그때 촬영장에서 나 도와준 사람도 진 대표님이야.”
***
태조가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기자들이 주차장을 점령했다더니, 며칠 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어 그런지 로젤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스윽.
부드럽게 열리는 자동문을 넘어 숍 안으로 들어가자, 태조를 발견한 성 매니저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오셨어요, 진 대표님?”
살짝 웃은 태조가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 했다. 그는 성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안쪽 응접실로 들어갔다.
태조에게 커피를 건네준 성 매니저가 이내 안쪽 룸에서 남색 케이스 하나를 가져왔다.
“말씀하신 대로 사이즈 조정해놨는데. 잘 맞는지 한번 껴보세요.”
케이스를 연 태조가 반지를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살짝 돌려보기도 하고 다시 뺐다 끼기도 한 그는 불편한 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네요. 전처럼 꽉 끼는 느낌도 없고.”
“다행이네요. 음, 애인 분은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반지가 크다거나 하진 않으셨구요?”
“네. 안 그래도 저 때문에 좀 곤란하셨다고.”
태조의 말에 성 매니저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곤란은요. 처음엔 무슨 일인지 몰라서 당황하긴 했는데. 저희는 돈도 안 들이고 가게 홍보를 한 거라.”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전에 그 상품을 본 고객분들이 저희 매장에 따로 연락을 주시기도 했고, 기자들은 와서 그 반지를 누가 사 갔냐고 묻기도 했죠. 아, 물론 대표님 이야기는 한 번도 흘린 적이 없고요.”
“알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나왔으면 진작 회사로 연락이 왔을 테니까요.”
여상히 대답한 태조가 커피를 마셨다. 그가 반지를 빼 다시 케이스에 넣는 것을 보며 성 매니저가 물었다.
“저번에 큰 사모님하고 반 관장님이 같이 방문하셨는데. 아직 큰 사모님은 모르시는 건가요? 반 관장님은 아무 말 말라고 하시던데.”
“예. 아직은. 조만간 인사를 드리긴 할 겁니다.”
“어머나. 그럼 곧 좋은 소식도 들리겠네요.”
그는 별말 없이 웃기만 했다. 성 매니저도 눈치껏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직원들도 이 반지, 제가 사 간 거 알고 있죠?”
“몇몇은요. 저번에 반 관장님이 말 나가지 않게 해달라 하셔서, 그날 바로 직원들에게 공지는 해놓았어요.”
“당분간 부탁드릴게요. 바깥에 새지 않도록.”
“걱정 마세요. 혹시 저희 쪽에서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구요.”
반지 케이스를 안 주머니에 넣은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까지 따라 나온 성 매니저가 그를 배웅하자, 직원 한 명이 그녀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매니저님, 저분…….”
“쉿. 조용히 해.”
성 매니저의 단속에 뻘쭘해진 직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차에 오르는 태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미끄러지듯 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
호텔 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러 온 곳은 화정 그룹이 운영하는 갤러리 화온(畵溫)의 1층 커피숍이었다.
혜영은 차를 마시며 모임에 참석한 이들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원래는 여섯으로 시작했던 소규모 모임은 그 수가 늘어 열일곱이 되었다.
월에 한 번, 둘째 주 수요일에 열리는 이 사교 모임의 멤버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의 안주인들이었다.
시작은 오래전 혜영을 중심으로 친분이 있는 부인들이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친교 모임이었다.
한데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이 늘었기 때문일까. 지금은 모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 듯했다. 이렇게…….
“마 여사님, 둘째 아드님은 아직도 결혼할 생각이 없대요? 저번에 제가 추천한 사람도 다 거절하셨잖아요.”
몇 번 보지도 못한 사람이 제 아들을 걱정하는 척, 제 속을 긁으려는 걸 보면.
“본인이 아직 생각이 없다는데 어떡하겠어요.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죠. 내가 재촉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그러지 마시고, 주변에서 소개해준다고 할 때 여사님이 나서서 밀어붙이세요. 그렇게 손 놓고 있다 괜찮은 아가씨들 다 놓쳐요. 물론 진 대표가 자기 사업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지만, 그게 언제까지 잘 될지도 모르잖아요.”
찻잔을 기울이던 혜영의 손이 멈칫거렸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건설사 회장의 와이프라고 했던가. 방 여사인지 빵 여사인지. 넉 달 전 누군가의 소개로 모임에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방 여사님, 아드님 일이야 마 여사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무슨 걱정이에요. 게다가 진 대표 훤칠한 데다 능력 좋은 거 다 아는데.”
“하지만 결혼도 다 때가 있는 거잖아요. 얼른 자식들 결혼시켜서 귀여운 손주들 재롱도 보셔야죠.”
옆에 있는 사람이 그만하란 눈치를 줘도 방 여사는 꿋꿋이 제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곤 옆에 앉은 며느리의 손을 잡아 톡톡 두드렸다.
속이 빤히 보이는 노골적인 도발이 같잖게만 느껴져 혜영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자애로운 시어머니인 척, 제 앞에서 가식을 떨고 있으나 저 여자는 그저 제게 자랑을 하고 싶은 거였다.
제 아들은 일찌감치 결혼까지 한 데다 며느리는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고.
가증스러운 면상에 대고 한마디 해줄까 하다 혜영은 옆에 앉은 방 여사의 며느리를 보곤 마음을 접었다.
배가 볼록하게 솟은 방 여사의 며느리는 누가 봐도 만삭의 임산부였다. 곧 출산을 앞둔 여자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욘 없었다.
“…….”
혜영은 방 여사를 무시하며 다시 차를 마셨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니 이 모임에 더는 나오지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 여사의 반응이 심드렁하자 방 여사가 목표를 바꿔 예령에게 말을 걸었다.
“참, 반 관장은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이제 4년 차 됐습니다.”
“4년? 꽤 됐네요? 근데 아직 아이 소식은 없나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싸늘해졌다. 무시로 일관하던 혜영도 좀 전과 달리 방 여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반 관장은 일하느라 바빠서 그런가? 그래도 아이는 가져야죠. 마 여사님도 손주 보는 거 기대하실 텐데. 우리 수아는 다음 달에 출산 예정이라. 한동안 모임에 못 나올 것 같아 내가 오늘 무리해서 데리고 나온 거예요.”
“저기, 방 여사님…….”
그만 좀 하라며, 옆의 사람이 방 여사의 팔을 잡아당겼다.
눈치 없이 ‘왜요?’라고 물은 그녀는 뒤늦게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떠올린 듯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미안해요. 반 관장 전에 유산했다고 했지. 어휴, 나이가 들면 이렇게 깜빡깜빡해서.”
“선택적 건망증인가, 그건? 방 여사, 쓸데없이 남의 집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듯 혜영이 들고 있던 잔을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움찔한 방 여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혜영에게 사과했다.
“제 말에 불쾌하셨어요? 어휴, 죄송해요. 저는 그냥 아드님이랑 반 관장이 걱정돼서.”
“누가 방 여사에게 내 자식하고 며느리 걱정해 달라고 했나?”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같이 모임도 하는 사이에 이 정도 말은…….”
목소리가 높아지자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화가 난 마 여사가 금방이라도 앞에 있는 테이블을 뒤집어 버릴 것 같자 예령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진정은 무슨. 너는 저런 말을 듣고도…….”
“괜찮아요, 어머니. 제가 할게요.”
네가 한다고? 뭘?
인상을 쓴 마 여사를 향해 싱긋 웃은 예령이 방 여사와 그 옆에 있는 며느리를 순서대로 훑었다.
서슬 퍼런 예령의 눈빛에 겁을 먹은 만삭의 여자가 부푼 배를 감싸 쥐었다.
‘옆에서 말리는 척이라도 하면 좀 봐줄까 했는데.’
방 여사가 아픈 곳을 찌르긴 했지만,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 저런 알량한 도발 따위에 발끈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모임에 참석할 제 동서를 위해서라도 한번 저들의 기를 눌러줄 필요는 있었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 부부 건강하니 곧 아이도 생길 거예요.”
“아, 그래요?”
“네. 병원에서도 둘 다 건강하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말끝을 흐린 예령이 방 여사의 며느리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걱정은 저희 부부가 아니라 그쪽 부부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저희요? 왜요? 저희 부부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제가 우연히 목격한 게 있어서. 남편분이 유향 건설 이기영 전무 맞죠?”
“네.”
방 여사의 며느리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예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이내 미술관에 있던 사람들의 핸드폰에서 일제히 또로롱 거리는 알림음이 울렸다. 예령이 실수했다는 듯 ‘아!’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어머, 죄송해요. 방 여사님 며느님께 보내려고 했는데,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올려버렸네요.”
“보냈다고? 뭘…….”
고개를 돌린 방 여사가 며느리를 쳐다보았다.
“어, 어머니…….”
예령이 올린 사진을 본 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