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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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야.
2023.03.15.
매캐한 연기, 어둑한 조명, 머리를 울리는 소음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
태조는 동굴처럼 좁은 복도를 지나 구석진 룸 앞에 멈춰 섰다.
‘어떡하죠? 여리 언니, 어제 11시에 들어가셔서 지금까지 안 나오세요. 아침 일찍 스케줄이 있어서 계속 여기 계시면 곤란하다 했는데도 안 들으시고요.’
난감함에 울먹이는 매니저의 목소리를 떠올린 태조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3시 54분. 두 시간만 지나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태조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매니저가 알려준 룸으로 찾아갔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독한 술 냄새가 제일 먼저 코를 찔러왔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난잡한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각종 소지품과 안주 등 온갖 것들이 뒤섞여 어질러진 테이블. 바닥에 떨어져 깨진 술병과 싸움이 붙은 듯 욕을 지껄이며 싸우는 두 남자들.
태조가 찾는 사람은 싸움이 붙은 사내들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쪽도 취한 건 마찬가지라 주먹질을 하는 사내들을 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린 태조가 여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나와.”
술잔을 좌우로 흔든 여자는 제 옆으로 다가온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술에 젖은 입술이 가늘게 늘어졌다. 비죽 웃은 그녀는 태조의 말을 무시한 채 술잔만 기울였다.
“…….”
태조는 그런 여자를 보며 인상을 썼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반복되는 이 상황이 좀 지겹고 화가 날 뿐.
태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여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가기 싫다며 버티고 있던 여자는 태조에게 잡힌 팔이 아파져 올 때쯤에야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야, 저건 뭐야?”
태조가 여자를 데리고 룸을 나가려고 하자, 싸움이 붙었던 남자 한 명이 다짜고짜 욕을 내뱉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태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태조가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퍽!
“꺄악!”
둔탁한 파열음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끼어들었다. 불시에 머리를 얻어맞은 태조가 몸을 살짝 비틀거렸다.
끔찍한 통증 뒤에 느껴지는 건 역겨운 피 냄새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액체였다.
“태조야!”
먹먹한 귓속으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두덩이를 타고 흐르는 피가 눈 안으로 스며들었다.
태조는 시야가 붉게 변하는 느낌에 질끈 눈을 감았다.
.
.
.
“대표님. 태조 씨!”
누군가 제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가라앉은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태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뻑뻑한 눈을 두어 번 더 깜빡이자 흐릿한 시야에 저를 보고 있는 말간 얼굴이 들어왔다.
“괜찮아요? 악몽 꾸는 것 같아서 깨웠는데.”
“…….”
한쪽 눈을 찡그린 태조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꿈의 여파인지 아직도 머리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머리 아파요? 두통약 갖다줄까요?”
세경이 침대에서 내려가려 하자 태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나 때문에 깼어?”
“아뇨. 배가 좀 아파서…….”
“배가?”
아프다는 말에 태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자 세경이 별거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임신하면 가끔 이렇대요. 앙꼬가 자기 자릴 만드느라 그런가 보죠. 지금은 괜찮아요.”
“아프면 깨우지 그랬어.”
“대표님 깨울 만큼 아팠던 건 아니고. 그냥 배가 살짝 당기는 정도였어요.”
꿈자리도 뒤숭숭한데 괜한 소리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나 싶었다. 세경이 침대에 누워 옆자리를 탕탕 두드렸다. 얼른 누우라는 제스처에 픽 웃은 태조가 그녀의 곁에 몸을 뉘었다.
“무슨 꿈 꾸셨어요?”
세경의 배를 문지르던 태조의 손이 일순 멈칫거렸다.
예령에게 오여리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하필이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그날의 일이 꿈으로 나타났다.
“……기억 안 나는데.”
거짓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세경이 태조를 빤히 쳐다보았다. 앞에 잠깐 뜸 들인 거, 그거 분명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꿈 내용을 억지로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깨우기 전까지만 해도 태조는 어딘지 모르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안 좋은 꿈은 금방 잊어버리는 게 좋지.”
세경이 태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깊게 캐묻지 않은 그녀가 고마운 듯, 태조가 세경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지금 몇 시지?”
“여섯 시 정도 됐을 거예요. 출근하려면 슬슬 일어나야 하죠?”
“응.”
“아침 차릴까요? 간단히 뭐 먹고 갈래요?”
세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무래도 태조보다 일찍 일어난 게 배가 아파서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배고파?”
“어제저녁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좀…….”
배 속에서 작게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세경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태조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몸을 일으켰다.
“그럼 아침은 밖에서 먹을까?”
“이 시간에요? 어디서요?”
“내가 저번에 사 왔던 그 갈비탕 집. 그 집이 7시에 문을 열거든. 아침 식사 메뉴도 따로 있으니 가서 먹고 오자. 일찍 가면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그러고 보니 지난번 엄마와 갔을 때 아침 식사 메뉴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거기서 밥 먹고 가면, 회사 늦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싫어?”
그 집 고기 맛을 알고 있는데 싫을 리가.
“아뇨. 우리 빨리 준비하고 가요.”
***
“너, 오늘 좀 늦었다?”
옷걸이에 재킷을 건 태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출근하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현은 태조가 도착하자마자 그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난 좀 늦으면 안 되나?”
“아니. 네가 대표니 늦어도 되긴 하는데, 한 번도 안 그러던 녀석이 늦게 오니까.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별일은 아니고. 그냥 아침 먹고 오느라.”
“아침? 뭐, 조찬 모임 있었어?”
“아니. 세경 씨랑 먹고 왔는데.”
일자로 늘어진 우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야, 나는 아침도 굶었는데.”
“왜 굶어. 잘 챙겨 먹지. 배고프면 가서 뭐라도 먹고 오든가.”
“내가 뭐 돈이 없어서 못 챙겨 먹냐?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안 먹는 거지!”
“애도 아니고 뭘 챙겨줄 사람을 찾아. 네가 챙겨주고 싶은 사람을 찾아. 그럼 생각 없어도 먹게 될 테니까.”
“그게 쉬우면 내가 지금까지 이러고 있겠냐? 벌써 누굴 만나 결혼했지! 이게 요즘 애인 생겼다고 매일매일이 염장질이지.”
입을 댓 발 내민 우현이 구시렁거렸다. 태조는 그를 관찰하듯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지금 당장 밖에 던져놔도 어디 가서 빠질 놈은 아닌데. 왜 애인을 못 만드는 건지. 역시…….
“성격이 문젠가?”
“뭐야?”
우현이 성난 살쾡이처럼 예민하게 쏘아붙였다.
“너 속마음은 안 들리게 좀 해라, 응?”
“새삼스럽게 뭘. 그보다 유나 씨는 어때? 잘 적응하고 있어?”
태조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자 팔짱을 낀 우현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어. 사교성이 좋더라고. 매니저하고도 금방 친해지고 직원들하고도 잘 지내고 있어. 아, 유나 씨도 알고 있더라. 두 사람 사귀는 거?”
“너랑 석주도 아는데 세경 씨랑 친한 사람도 알고 있어야지. 이미 연애 중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마당에 계속 숨기기도 힘들고.”
“그건 그래. 뭐, 유나 씨가 안다고 문제 될 것도 없고. 그보다 세경 씨한테 기자들은 안 붙었어? 커플링인 거 눈치챘음 그 상대 찾는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텐데.”
“안 붙은 건지, 내가 못 찾은 건지. 아직 특별히 미행하는 차량은 발견하지 못했어.”
“하긴 요즘은 장비도 좋아져서. 그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더라. 대놓고 쫓아다니면 그게 파파라치냐? 암튼 열애설이든 뭐든 이번 주까지는 잠잠했음 좋겠는데. 이제 드라마도 끝나가잖아. 근데 오늘 세경 씨 괜찮을까? 종방 앞두고 드라마 팀 회식한다던데.”
안 그래도 아침 식사 후, 세경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그 이야기도 나왔던 터였다. 주인공이 종방연에 빠질 수도 없고. 분명 회식 장소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텐데 잘 빠져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면서.
“신 매니저한테 잘 케어해 달라고 해야지.”
“사람 하나 더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드라마 끝나는 대로 연애 사실부터 인정하고 한 달 전후로 해서 결혼과 임신 소식도 밝히자고.”
태조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은 추후에 언론사에 배포할 내용이라며 돌돌 만 종이 하나를 태조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람 연결해 준 건 석주라고 할 거야. 그 곰탱이도 기자들한테 시달려 봐야 해. 네 신상은 비연예인이라 따로 공개하진 않을 거고.”
태조가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두 사람을 연결해 준 이가 석주라는 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석주의 촬영장에서 세경을 처음 만나기도 했고, 그녀는 그때부터 저를 좋아한다고 했었으니.
“좋네. 이대로 나가면 되겠어.”
“세경 씨한테도 한번 정리해서 이야기해줘야 하니까 나중에 한번 오라고 해.”
태조가 알겠다고 하자 우현이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태조가 그를 불렀다.
“우현아.”
“왜?”
문 앞에 선 우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여리가 다시 한국에 들어올지도 모르겠어.”
“뭐?”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야.
탐탁지 않은 소식에 우현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
<우아한 가족>의 마지막 방송을 나흘 앞두고, 서울 모처의 고깃집에서 종방연이 마련되었다.
세경은 창가에 바짝 붙어 밖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가게 앞에는 이른 시간부터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안 들어갈 거예요?”
옆에 있던 공 작가가 세경에게 물었다. 회식 전, 미리 공 작가와 만나 차를 마셨던 세경은 그녀와 같이 종방연 장소를 찾아온 터였다.
“나가야죠.”
“세경 씨 보기 전까지 저 사람들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일단 나가요. 다들 도착했다니까.”
“네.”
크게 심호흡을 한 세경이 차 문을 열었다. 공 작가와 차에서 내린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어? 윤세경이다!”
누군가 세경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플래시와 셔터 소리가 정신없이 터졌다. 뒤이어 그녀에게 커플링과 열애설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안에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인터뷰는 다음에 할게요.”
꾸벅 인사를 한 세경이 몸을 돌렸다. 그때 포토 라인 안쪽에 서 있던 기자 한 명이 달려와 세경의 팔을 붙잡았다.
“세경 씨, 잠깐만. 5분이면 돼요. 지금 연애하고 있다는 거 사실이에요? 어떤 분이에요? 언제 만났나요? 재력가라는 소문도 있는데 그게 다 사실인가요?”
세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얼마나 힘을 준 건지 기자에게 잡힌 팔목이 아려올 지경이었다.
“저기 손 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인터뷰는 다음에 할게요. 열애설과 관련해선 조만간 소속사에서 입장문이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신 매니저가 세경을 잡고 있는 기자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보호하듯 세경의 뒤에 바짝 붙어 고깃집 안으로 들어갔다.
“올라가세요, 누나.”
“고마워.”
제훈에게 살짝 웃어준 세경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일제히 세경을 쳐다보았다.
“세경 씨, 여기!”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던 공 작가가 세경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공 작가의 옆에 앉자 빈자리 없이 꽉 찬 테이블을 보며 차 피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다들 바쁘신 와중에 종방연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정과 다르게 방송 일정이 앞당겨졌지만, 그래도 우리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밤낮없이 고생한 우리 스태프들과 배우분들의 노력 덕분이 아니겠어요? 다들 넉 달 동안 모두 고생하셨고, 다음에 또 모여 좋은 작품 하나 만들어 봅시다. 자, 잔 들으시고, 다들 건배!”
“건배!”
차 피디가 잔을 들어 올리자, 여기저기서 건배 소리와 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경도 분위기에 맞춰 공 작가와 잔을 부딪쳤다.
회식은 차 피디의 건배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쪽으로 술을 밀어둔 세경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식사에 열중했다. 그래서 저를 포위하듯 술잔을 들고 다가오는 이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세경 씨.”
“네?”
맛깔스럽게 비빈 빨간 비빔 냉면 위에 고기 한 점을 올려 먹으려던 세경은 저를 둘러싼 사람들을 보곤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아니, 왜 다들 저한테 오시는…….”
“세경 씨, 연애한다면서요?”
동료 여배우의 말에 같은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먹이를 발견한 물고기 떼처럼 그들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
부담스러운 그 눈빛에 세경이 꿀꺽 침을 삼켰다.
바깥의 기자들만큼이나 무서운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