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앙꼬의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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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앙꼬의 성별
2023.03.22.
철컥.
모자를 푹 눌러쓴 주희가 차 뒷좌석에서 쇼핑백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경아, 나 지금 도착했는데 어디로 가? 5층? 어, 알았어. 금방 올라갈게.”
짧게 통화를 마친 주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6층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가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벽에 붙어 있는 층별 안내판을 살펴보았다.
1층에 있는 개인 커피숍을 제외하면 건물 전체를 병원에서 다 쓰는 듯했다. 2층은 검사실, 3층은 산부인과, 4층은 입원실, 5층과 6층은 산후조리원이었다.
“이걸 전부 임대해서 쓰는 건가?”
청담동 노른자 땅 위에 세워진 건물이었다. 왠지 모를 상대적 박탈감에 입술을 삐죽거린 주희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5층 버튼을 눌렀다.
“나경이도 출세했네. 이렇게 좋은 데서 산후조리도 하고.”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갔다.
주희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요즘 들어 묵직한 쇠구슬이 발목에 매달려 저를 끝없이 어두운 심해로 끌어내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진짜 제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건 다른 이들과 비교되는 자신의 모습이려나.
띵!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주희는 뻘쭘한 얼굴로 산후조리원 앞을 서성거렸다.
주변에 일찌감치 결혼을 한 사람 있었지만, 그중 아이를 낳은 건 나경이 유일했다. 그러다 보니 산후조리원을 방문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들어가서 나경이 이름을 대야 하나.”
주희가 입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불투명한 유리문 안쪽에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모습을 드러낸 건 조금 전 통화를 했던 나경이었다. 주희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녀를 따라 조리원 안으로 들어갔다.
“좀 어색해서. 나 산후조리원에 온 건 처음이거든.”
“나도 첫 아이라 산후조리원이 굉장히 어색해. 그보다 이쪽으로 와 봐. 내가 우리 쫑아 보여줄게.”
나경이 주희를 끌고 신생아실로 앞으로 걸어갔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신생아 바구니에 담긴 작은 아이가 보였다. 잠이 든 아이는 속싸개에 몸이 감긴 채 두 눈을 꼬옥 감고 있었다.
“귀엽네. 너보다 네 남편을 더 닮은 거 같기도 하고.”
“그런가? 다들 남편보단 날 닮았다고 하는데.”
나경이 다시 한번 잘 보라며 주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를 지그시 쳐다보던 주희는 그런 것 같다며 나경의 말에 동의해주었다.
“아, 이거. 출산 축하 선물.”
아이를 보고 난 뒤, 산모실로 들어온 주희가 나경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나경은 그 안에 담긴 아이 옷을 확인하고 싱긋 웃었다.
“쫑아 거야? 고마워. 나중에 입히면 사진 찍어 보내줄게. 넌 뭐 마실래? 남편이 먹는다고 모카커피도 사다 놨고, 주스랑 과일도 있는데.”
“난 커피로 줘.”
나경이 냉장고에서 커피와 주스를 꺼내왔다. 주희 앞에 커피 병을 내려놓은 나경이 소파에 앉았다.
“여기 조리원 이용하는데 일주일에 천만 원이라며?”
“여긴 그 정도까진 아냐. 위층이 좀 더 비싸긴 하지만. 여기 병원장이 따로 운영하는 조리원이 있는데, 거기가 그 정도 한다고 들었어.”
“흐음.”
주희가 목을 울리며 커피를 마셨다. 나경은 산모실 안을 둘러보는 주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넌 요즘 어떻게 지내? 드라마 촬영은 끝난 거지?”
“끝났지. 한참 전에. 너도 기사 봤을 거 아냐.”
주희의 입술 끝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요즘엔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드라마는 중간에 대본이 바뀌어 강제로 하차당했고, 잡혔던 스케줄도 줄줄이 어그러져 이미 캐스팅됐던 드라마에서도 출연 취소 연락을 받았다.
거기에 얼마 전 잡힌 인터뷰는 어떠했던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싶다며, 인터뷰 일정을 잡았던 기자는 정작 취재를 시작하자 자신보단 세경에 관한 질문을 더 많이 쏟아냈었다.
“그러게 왜 넌 너튜브에서 그런 말을 했어?”
“내가 뭐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다들 말만 안 했지 나랑 똑같은 생각이었을걸? 너도 그렇잖아. 오히려 네가 회사에 남아 있었으면 우리랑 같이 데뷔했을 텐데. 이유나 그 계집애가 눈치 없이 나대가지곤. 아주 나만 곤란해졌어. 게다가 그 스태프. 일이 커진 건 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누가 나서 달랬나? 괜히 거기에 글을 써 가지고. 왜 나만 이렇게 피해를 봐야 하는 건지.”
“난 그래도 데뷔 못 한 거에 후회는 없는데. 그리고 너희 활동할 때도 이유나는 윤세경이랑 같이 붙어 다녔다며. 그래서 이번에 그렇게 나선 거겠지. 너도 억울하면 다른 애들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
“됐어. 요즘 걔들이랑은 연락도 안 하는데. 이유나처럼 방송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주희가 열이 오른 속을 달래려 커피를 들이켰다. 나경은 그런 친구를 빤히 쳐다보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윤세경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사람도 여기 병원 다니는 거 같더라?”
“여기 병원? 어디?”
“어디겠어. 3층 산부인과지. 얼굴을 다 가렸는데도 뭔가 풍기는 아우라가 다른가 봐. 그냥 딱 보자마자 윤세경인 걸 알겠다고 하더라.”
아우라니 뭐니 하는 칭찬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주희는 산부인과에 윤세경이 왔다는 말만 계속 곱씹고 있었다.
“산부인과엔 왜 왔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래?”
“그거야 모르지. 정기적으로 검진 받으러 오는 거일 수도 있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겠냐며 나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
세경이 병원을 오든 말든, 별반 관심이 없는 나경과 달리, 주희의 좁혀진 미간은 한동안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탁.
주차장으로 내려온 주희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시동도 걸지 않은 채 포털사이트에서 세경의 이름을 검색했다.
드라마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있는 터라, 윤세경의 이름을 치자 나오는 건 대부분이 <우아한 가족>과 관련된 기사였다.
물론 부부이몽에 출연했을 때 화제가 된 반지 때문인지 간간이 세경의 열애설 상대가 누구일까, 하는 추측성 기사도 보였다.
“나경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 정도면, 다른 사람도 봤을 법 한데.”
또 다른 목격담 같은 건 없으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양한 루트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산부인과에서 세경을 봤다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나도 참, 뭘 하는 건지.”
주희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조수석으로 핸드폰을 던졌다.
화면에 뜬 세경의 기사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자신의 처지가 한심할 정도로 바닥에 처박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제 이름을 치면 나오는 기사라곤 사과, 불명예 하차, 거짓말쟁이 따위의 부정적인 단어들 뿐인데.
“…….”
갑갑한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삼킨 주희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 고요한 주차장에 하얀색 외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짙게 썬팅이 된 차는 그녀의 차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고 있었다.
건너편에 멈춰선 차의 시동이 꺼지자 시끄러웠던 주차장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주희는 핸드폰을 들어 내비게이션에서 도로 상황을 체크했다. 그리고 막 시동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어?”
눈을 들썩거린 주희가 핸들 위로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 전 들어온 차량에 고정되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여자는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한 손엔 모자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저 사람…….”
눈가를 좁힌 주희가 모자를 쓰는 여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여자가 움직이자, 주희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차창을 살짝 내린 주희는 여자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곤 몰래 뒤를 쫓아갔다.
“……아, 저 지금 병원에 왔어요. 3시에 예약을 잡아놔서.”
통화를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주희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챌까 벽에 바짝 붙어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채혈도 한대요. 2차 기형아 검사는 피 검사도 같이 하나 봐요.”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여자가 그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주희는 여자가 서 있던 곳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가 멈춰 선 곳을 확인했다.
3층.
산부인과가 있는 곳이었다.
“그보다…….”
기형아 검사라고?
주희는 조금 전 검색해 본 세경의 기사를 상기했다.
<우아한 가족>의 종방연에 참석한 세경의 모습이나, 부부이몽에서 끼고 나온 커플링에 관한 것들.
“하, 설마…….”
주희가 치켜뜬 눈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춰선 층을 노려보았다. 3층에 고정된 숫자는 그녀가 차로 돌아갈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
채혈을 마친 세경이 초음파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진에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마냥 신기했다. 처음엔 콩알만큼 작던 아이가 몇 개월이 지났다고 이렇게 얼굴 윤곽을 드러내다니.
“지금 볼 땐 앙꼬 사내아이 같아요.”
“나중에 성별이 바뀔 수도 있어요?”
“내가 잘못 봤으면 착각할 수도 있죠. 근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확실히 봤어요. 앙꼬 아들 맞아요.”
꿈속에서 본 백호랑이가 수컷이었나 보다. 세경은 심 원장에게 뭘 봤냐고 자세히 따져 묻진 않았다.
“세경 씨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둘 다 좋아요. 그냥 건강하게만 나왔으면 좋겠다 싶고.”
세경이 싱긋 웃었다. 더불어 아들이든 딸이든 태조의 잘생긴 얼굴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랑이 태몽을 꿨다더니. 사내아이긴 하나 보네. 하긴 세경 씨 생선류는 못 먹고 고기만 찾기도 했지.”
“지금은 다 잘 먹어요. 얼마 전엔 장어가 먹고 싶어서 배달시켜 먹었는걸요.”
“오, 이제 입덧 안 하나 봐요?”
“확실히 전보다 나아지긴 한 거 같아요”
“다행이네, 그건. 사진 보니까, 어때요? 앙꼬 아빠 얼굴이 좀 있는 거 같아요?”
심 원장의 말에 세경이 다시 한번 입체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음, 이렇게 보니 앙꼬 아빠 눈매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
“그래요? 어디.”
세경의 옆에 선 심 원장이 초음파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같은 주수의 태아치곤 유독 얼굴 윤곽이 더 잘 나오긴 했다.
엄마가 미인이라 그런가, 나중에 태어나면 눈코입의 자기주장이 뚜렷할 것 같기도 하고.
“앙꼬 아빠를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태어나면 예쁠 것 같긴 하네요.”
“그런가요?”
“응. 애기가 세경 씨 닮으면 예쁘겠다. 어우, 우리 앙꼬 태어나면 좋겠네. 엄마가 윤세경이라서.”
아이에게 말을 걸듯 심 원장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혹시 태동 느꼈어요?”
“태동을 벌써 느껴요? 크게 둥둥 두드리는 느낌은 없었는데.”
“벌써부터 그 정도는 아니고. 지금쯤이면 배 안에서 뭔가 꼬록꼬록 거리는 느낌이랄까?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게 있을 거예요. 이때쯤엔 청각도 발달하니까, 본격적으로 태교도 해요. 아빠가 말도 많이 걸어주면 좋고.”
태교라. 동화책이라도 사서 읽어줘야 하는 걸까?
태조가 제 배에 대고 아이에게 말을 걸듯 속삭일 걸 상상하니, 배 안쪽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한번 말해 볼게요.”
“아, 내가 철분제 챙겼으니까 가져가고요. 검사 결과는 내가 유선으로 알려줄게요.”
“매번 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저 이제 드라마도 끝났는데, 나중에 시간 내서 한번 식사라도 해요.”
“그래요. 나야 언제든 콜이지.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요. 식당 예약은 내가 할 테니.”
진료실을 나온 세경에게 심 원장이 미리 준비해둔 쇼핑백을 건넸다. 세경은 가방에 초음파 사진을 챙겨 넣고 병원을 나섰다.
차에 탄 세경은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조수석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다시 가방 속에 넣은 초음파 사진을 꺼내 앙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신기해.”
자고 있는 태조의 모습이 앙꼬에게서 언뜻 보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얼른 이걸 태조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앙꼬야, 우리 아빠 보러 갈까?”
배를 살살 두드린 세경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느릿느릿 움직인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잠잠한 주차장에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더니 검은색 차량 한 대가 세경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