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당신이나 자기라고 불러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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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당신이나 자기라고 불러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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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당신이나 자기라고 불러도 되고.
2023.03.25.
소속사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세경은 바로 태조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보다 먼저 그의 집무실을 선점한 사람이 있어서였다.
“누나, 이거 드세요.”
그새 바깥에 나갔다 온 제훈이 세경의 앞에 음료를 내려놓았다. 고소하고 달달한 미숫가루 라떼였다.
“고마워. 넌 나가 봐야 한다면서.”
“네. 아파서 반차 낸 사람이 있거든요. 오늘은 그 사람 대타로 좀 뛰기로 했어요.”
스케줄이 없어서 오랜만에 쉬나 했더니. 자신이 한가해도 제훈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난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와. 운전 조심하고.”
“그럴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저쪽에 있는 녀석한테 시키시고요.”
제훈이 손가락으로 파티션 안쪽에 있는 직원 한 명을 가리켰다.
“필요한 게 뭐 있겠어. 나도 대표님만 보고 금방 갈 건데. 얼른 가 봐. 늦겠다.”
“네. 내일 연락드릴게요.”
세경이 어서 가라며 제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복도를 나와 주위를 기웃거렸다.
매니저들은 배우들의 스케줄을 따라 나간 터라 사무실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송 실장은 미팅 때문에 아래층 회의실에 있는 듯했고.
태조의 집무실 쪽을 힐끔거리던 세경은 누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매니지먼트 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무료한 시간을 뭘 하고 보낼까 생각하던 중, 무심코 돌아본 책장에 연도별로 정리되어 있는 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필 파일인가?”
세경은 연도별로 정리된 파일들을 쭉 훑다 가장 최근의 것을 꺼내 보았다.
올 초 다시 찍은 석주의 프로필 사진을 시작으로 마지막 장엔 최근 계약을 한 유나의 사진이 꽂혀 있었다.
“이번에 프로필 사진을 다시 찍었다더니 이거였나 보네.”
세경은 역순으로 파일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소속된 연예인이 꽤 되는 만큼 파일엔 세경이 잘 아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 이건 계약하고 나서 처음 찍었던 거네.”
자신의 사진이 나오자 세경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지쳤던 시기라 그런지,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좀 웃을걸.”
세경이 사진 속 제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회사 창립 당시의 파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지금보다 살이 쪽 빠진 앳된 석주의 프로필 사진을 넘기자,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 이 사람…….”
고개를 갸웃거린 세경이 사진 옆에 꽂혀 있는 프로필에서 여자의 이름을 찾았다.
“오여리?”
배우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세경은 곧장 인터넷에 그녀의 이름을 쳐보았다. 하지만 최근엔 따로 활동을 하지 않는지 동명이인의 프로필이 포털 사이트의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가던 세경은 여자의 눈을 살짝 가려보았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여리는 저번에 카페 앞에서 제 어깨를 밀치고 간 여자의 얼굴과 언뜻 겹쳐 보였다.
“제훈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텐데.”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싶어, 세경이 핸드폰으로 오여리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사진을 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두드린 것은.
“뭐 해요?”
뒤를 돌아보자 태블릿을 어깨에 걸친 송 실장이 보였다.
“그냥 시간 때우고 있었어요.”
“대표님 보러 온 거예요? 근데 지금 뭘 보는…….”
고개를 쭉 뺀 송 실장이 사진 속 오여리를 보고 살짝 인상을 썼다.
“이분 아세요?”
“조금요. 아주 잘 알지는 못하고. 이분 있을 때 나는 신입사원이었거든.”
“지금은 활동 안 하나 봐요? 인터넷 검색해 보니 사진도 내려간 거 같던데.”
“우리 회사 나가고 연예인 활동은 그만둔 걸로 알아요.”
“왜요?”
“좀 안 좋은 일에 연루되어서…….”
말 하기가 꺼려지는지 송 실장이 말끝을 흐렸다.
“안 좋은 일이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술자리에서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고 했나? 암튼 뭔가 사건이 크게 터진 걸로 알아요. 그때 회사가 한번 발칵 뒤집혔거든. 나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사수들이 뭐 제대로 이야기해 주진 않았어요.”
폭력 사건이라. 그런 일이 터졌으면 연예계가 한번 시끄러웠을 법도 한데.
“그 정도 일이면 기사가 크게 나지 않나요? 제 기억엔 오여리 씨가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요.”
“기사는 안 나갔을 거예요. 회사에서 필사적으로 막기도 했고, 오여리 씨 집안도 꽤 잘 산다고 들었거든. 아마 그 기사 안 내보내려고 돈깨나 뿌렸을걸요? 근데 오여리 씨는 갑자기 왜?”
“아, 그게…… 최근 이 사람을 본 거 같아서요.”
“그래요? 그때 오여리 씨 우리 회사랑 계약 해지 되고 해외로 나갔다고 들었는데.”
“해외로요?”
세경은 다시금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때 본 사람은 그저 닮은 사람이었나?
“자세한 건 모르는데.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봐요. 소문으론 오여리 씨 집안이 대표님 집안이랑 잘 아는 사이라고도 하고. 아무튼 오여리 씨 성격이 아주 제멋대로라 당시 강 상무님이랑 진 대표님이 엄청 고생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일 있고 난 뒤에 전 대표님……. 그러니까 진태조 대표님의 친형 말이에요. 그분이 당시 우리 회사 대표님이셨는데 그 일 겪고 회사 접으려는 거, 지금 대표님이 지분 다 이어받고 이렇게 키우신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몰랐어요.”
“알기 힘들죠. 좋은 일도 아니고. 지금 그 사람이 우리 회사 소속인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송 실장이 그 수를 헤아리듯 손가락을 접어댔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태블릿에 사진 하나를 띄워 세경에게 보여주었다.
“참, 나 아까 이런 사진을 하나 받아서. 이 사람 세경 씨 맞아요?”
세경이 화면에 뜬 사진을 보며 눈을 좁혔다.
식당 앞에 주차된 차,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남자와 그 옆에 서 있는 여자.
아침 일찍 태조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던 그 날의 사진이었다.
“네. 저 맞아요.”
“이런. 파파라치가 붙긴 했나 보네.”
송 실장이 난감한 듯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때 복도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태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 감독님이 오셨다더니. 이야기가 다 끝났나 보네요.”
송 실장이 나가보자며 세경의 팔을 건드렸다. 파일을 덮은 세경이 송 실장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감독님, 이야기는 다 끝나셨어요?”
“네. 어? 여기서 세경 씨를 다 보네요?”
송 실장에게 눈인사를 하던 지 감독이 세경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세경은 살짝 웃으며 지 감독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와, 안 그래도 조금 전까지 세경 씨 얘기했는데. 반가워요. 우리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죠?”
예전에 시상식장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인사도 나누지 못했던 터라, 그 부분은 생략했다.
“네. 근데 제 이야기는 왜…….”
“내가 요즘 OTT 드라마 대본 쓰고 있거든요. 앞부분이 나와서 진 대표 보여주러 온 거예요. 아, 아직 진 대표가 아무 말도 안 했나요? 내가 세경 씨 캐스팅하고 싶어 한다고?”
세경이 태조를 힐끗거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식사를 하면서 그가 비슷한 말을 꺼냈던 것 같기도 했다.
지제혁 감독이 자신을 캐스팅 1순위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건가?
“전에 들었던 거 같아요.”
“드라마가 흥해서, 요즘 시나리오 많이 들어오죠? 세경 씨 차기작 정했어요? 아직이면 내가 진 대표한테 1편 대본 주고 왔으니까 한번 봐요.”
“네. 그럴게요.”
“기회 되면 이번에 같이 일해 봅시다.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진 대표, 나 갈게. 다음에 또 보자고.”
다른 약속이 있는지 시계를 본 그가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태조가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왔어?”
“20분 전에요.”
“그럼 왔다고 연락을 하지.”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데요. 제훈이가 마실 것도 사다 줬고.”
세경이 조금 전까지 제가 있던 사무실 쪽을 쳐다보았다.
“일단 내 사무실로 들어가자. 송 실장님도 같이 가시죠. 제게 보고할 게 있으시다고.”
“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챙겨 갈 게 있어서요. 곧 따라가겠습니다.”
송 실장이 자기 자리로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세경은 아까 본 파일을 책장에 꽂고 가방을 챙겨 태조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까 병원이라고 하지 않았어? 검사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럴까 하다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뭘?”
궁금한 듯 고개를 기울인 태조를 보며 세경이 가방에서 초음파 사진을 꺼냈다.
“이거 앙꼬 입체 초음파 사진이에요. 심 원장님 말로는 아들일 것 같대요.”
“아들? 벌써 성별까지 알 수 있어?”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조는 초음파 사진을 지그시 쳐다보다 세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앙꼬는 엄마를 더 닮은 거 같은데.”
“그래요? 저는 대표님 자고 있을 때랑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태조가 세경에게 초음파 사진을 돌려주었다. 그녀가 사진 끝을 만지작거리자, 태조가 턱을 괸 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매번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나 자는 거 몰래 지켜보고 있었어?”
“누, 누가 몰래 지켜봤다고!”
세경이 억울한 듯 발끈해 소리쳤다.
“그냥 가끔 제가 대표님보다 일찍 눈을 뜬 거라고요.”
얼굴을 붉힌 세경이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태조가 가만히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호칭을 정정했다.
“대표님 말고 태조 씨.”
“…….”
“아니면 당신이나 자기라고 불러도 되고.”
다, 당신이나 자기?
난데없이 튀어나온 새로운 호칭에 당황한 세경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왜? 자기라고는 못 하겠어? 하지만 이제 곧 사람들도 다 알게 될 텐데, 계속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우리 가족들 앞에서도 날 대표라고 부를 건 아니지?”
“……고쳐 볼게요.”
세경이 순순히 수긍했다. 확실히 태조의 가족들 앞에서까지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이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
그래도 계속 대표님이란 소리가 입에 붙는데, 그걸 하루아침에 어떻게 바꾸라고.
그렇다고 당신이나 자기라고 하는 것도…….
“…….”
태조를 쳐다본 세경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 딱 감고 자기라고 불러보고도 싶지만, 입은 아교라도 붙여놓은 것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기나 당신이란 호칭이 이렇게 가슴이 간질간질한 단어였나 싶기도 하고.
“안 불러?”
“뭘요?”
“지금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거.”
세경이 슬쩍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표님이 어떻게 알고 있는데요?
“어려운가? 자기라고 부르는 게?”
속삭이듯 내뱉은 태조가 세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훅 다가온 그의 얼굴에 서로의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직 어색하다고요.”
“…….”
“당신이나 자기라고 부르는 거.”
허벅지에 올라간 손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웃고 있는 태조의 숨결이 세경의 입술을 간질였다.
“뭐야, 잘만 하네.”
바짝 붙은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엉키었다. 짧게 붙었다 떨어진 입술이 다시금 부딪치려는 순간.
똑똑.
“…….”
“…….”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들어와요.”
태조가 자세를 바로하자 곧 문이 열렸다. 오다가 만났는지 송 실장의 뒤로 강 상무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응? 여기 좀 더운 것 같은데. 환기 좀 시켜야 하는 거 아냐?”
세경의 맞은편에 앉은 강 상무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풀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놓인 지 감독의 헌팅 대본을 보고 팔을 뻗었다.
“오, 지 감독님이 대본을 가지고 왔다더니…….”
대본을 든 강 상무가 세경을 쳐다보았다. 얼굴을 붉힌 그녀가 제 시선을 피하자, 강 상무가 눈을 굴려 태조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진태조가 뻔뻔한 얼굴로 짙은 눈썹을 들썩거렸다.
“뭐?”
“……아니.”
이 방이 더운 이유가 여기 있었네.
속으로 투덜거린 강 상무가 지 감독의 대본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