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납니다. 세경 씨,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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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납니다. 세경 씨,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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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납니다. 세경 씨, 애인.
2023.03.29.
“송 실장님은 알아보겠어요? 이게 윤세경 씬지?”
“아뇨. 이렇게 꽁꽁 가렸는데, 뭘 어떻게 알아보겠어요.”
사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송 실장과 강 상무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태블릿에 뜬 사진은 아까 송 실장이 세경에게 보여준 그 식당 앞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세경 씨가 아니라고 해도 안 믿겠죠?”
“세경 씨랑 사귀는 사람이 이 남자냐고 묻는 거 보면, 애초에 그 말은 먹히지도 않을 것 같아요.”
“하긴. 애초에 이 사람이 세경 씨인 걸 파악하고 있다면, 집에서부터 따라붙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임시로 결론을 낸 강 상무가 태조를 돌아보았다.
“몰랐냐?”
“…….”
태조가 무언으로 긍정하자, 강 상무가 픽 웃었다.
“둔한 곰이 여기도 있었네.”
“그보다 어쩌죠? 저희 내일 보도 자료 뿌리려고 했는데. 이러다 언론사에서 먼저 기사를 터트리면…….”
송 실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팔짱을 낀 강 상무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막을 방법은 없죠. 일단 이 사진을 보낸 기자랑 타협을 보는 수밖에. 기사를 꼭 쓸 거라면 내일 오전에 오픈해 달라고 해요. 그럼 우리가 바로 공식 입장을 내는 걸로. 송 실장님 이 기자분 연락처 가지고 있죠?”
“네. 여기.”
송 실장이 연락처와 메일주소를 적은 포스트잇을 강 상무에게 건넸다.
“이 기자랑은 내가 연락해 볼게. 되도록 네 신상은 안 알려지길 바랐는데. 생각보다 일찍 들통날 수도 있겠어.”
“그건 신경 쓰지 말고. 일단은 네가 수고 좀 해줘.”
“오냐. 대신 나중에 이 값은 톡톡히 받아낼 거다. 아, 세경 씨 우리가 낼 보도 자료는 확인했어요?”
“네. 봤어요.”
“송 실장님이 손 편지 쓰라고 했다면서요. 그건요?”
“쓰긴 했는데. 계속 수정 중이라.”
“다 쓰면 송 실장에게도 보내줘요. 그건 나중에 SNS에 올릴 거니까.”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킨 강 상무는 손끝에 붙인 포스트잇을 팔랑팔랑 흔들며 태조에게 물었다.
“넌 언제 퇴근하냐?”
“곧 가려고. 세경 씨도 왔으니까.”
“그럼 먼저 들어가라. 기자하고 연락한 뒤엔 내가 따로 전화할게. 세경 씨도 조심히 가고요.”
손을 흔든 강 상무가 태조의 집무실을 나갔다. 짐을 챙긴 송 실장도 인사를 한 뒤 강 상무를 따라나섰다.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자, 태조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도 슬슬 나가볼까?”
“지금요?”
“응. 따로 할 일은 없으니까. 지 감독이 준 대본은 나중에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태조가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빼냈다. 세경은 지 감독의 대본을 훑듯이 살펴보다 태조에게 물었다.
“이 작품은 언제 촬영 들어가요? 대본이 마음에 들어도 시간이 안 맞으면 못 하잖아요.”
“아직 대본 수정 중이라 세트 짓고 캐스팅 마치고 하면……. 빨라야 내년 초? 아니면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럼 못 할 수도 있겠네요. 앙꼬 낳고 산후 조리하면 준비 시간이 좀 빠듯할 것 같은데.”
세경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태조는 그녀가 들고 있는 대본을 가져가며, 세경의 손을 잡아 쥐었다.
“스케줄은 나중에 생각해 보자고.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아쉬워할 필요는 없고.”
“그래요. 지금은 앙꼬 태교랑 대표…… 아니, 태조 씨 가족들에게 인사드릴 생각만으로도 벅차니까.”
세경이 결연한 얼굴로 한숨을 후, 내쉬었다. 집무실을 나와 김 비서에게 인사를 한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태조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거요.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요? 선물은 뭘 사가구요? 가족들은 어떤 걸 좋아해요?”
“굳이 선물까지 준비할 필요는 없는데. 나도 세경 씨 어머니께 아무것도 못 해드렸고.”
“그래도…….”
말끝을 흐린 세경이 맞은편 사무실에서 나오는 직원들을 보고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며 눈을 끔뻑대는 사람들을 보다 뒤늦게 시선을 내렸다. 직원들이 놀라든 말든 태조는 세경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퇴근합니까?”
“예? 예에.”
여전히 두 사람의 손에 시선을 둔 채, 직원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경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만 쫑긋거렸다.
고개를 작게 까닥인 태조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자, 그의 뒤로 직원들이 쫄래쫄래 쫓아왔다.
뒤통수는 따가웠고 손엔 식은땀이 차올랐다.
직원들의 눈치를 본 세경이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자, 태조가 재차 그녀의 손을 고쳐 쥐었다.
“직원들이 다 이상하게 보잖아요.”
세경이 속삭이듯 하는 말에 태조가 뒤를 힐끗거렸다. 이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세경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탄 태조가 몸을 돌려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저걸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뇌하는 직원들과 어색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런 직원들을 향해 태조가 쓱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들 기사 봤죠? 세경 씨 열애설 난 거.”
“네에.”
뭔가에 홀린 양 직원들이 단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명, 맨 뒤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총무팀 직원을 제외하고는.
“납니다. 그거.”
“……?”
“세경 씨, 애인.”
태조가 맞잡은 세경의 손을 들어 올렸다.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두 사람의 손에서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세경은 얼도 빠지고 턱도 빠진 직원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그럼, 다들 내일 봅시다.”
굳어 있는 직원들에게 태조가 상쾌한 인사를 건넨 지 몇 초 후.
“맙소사!”
“으아아악!”
스르륵 닫히는 문 사이로, 반 박자 늦게 터진 직원들의 비명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었다.
***
- 이제 우리 도련님하고 공개 연애하는 거예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예령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우아한 가족>의 마지막 방송이 전파를 탄 게 어젯밤. 그리고 오늘 아침 송 실장이 보여준 사진과 함께 세경의 열애 사실이 공식적으로 기사화되었다.
강 상무가 기자와 잘 이야기를 한 건지, 다행히 열애설 기사는 <우아한 가족>이 끝난 다음 날 보도되었다.
배우의 사생활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미적거렸던 소속사는 기사가 나길 기다렸다는 듯 공식 입장문을 내보냈다.
덕분에 드라마가 끝났다는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세경은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핸드폰에 불이 나도록 연락을 받고 있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아침에 같이 식당에 갔던 사진이 딱 찍혀버렸어요. 최대한 외부에는 태조 씨 신상이 나가지 않게 막아보려고는 하는데…….”
- 도련님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지 않아요? 그보다 호칭이 좀 바뀌었네요? 이제 대표님이라고 안 부르나 봐요?
“같이 쓰긴 해요. 사실 아직도 태조 씨보다는 대표님이란 호칭이 입에 더 잘 붙기도 하고. 저는 대표님이 더 편한데, 태조 씨가 나중에 가족들에게 인사드리러 갈 때도 그렇게 부를 거냐고 해서요.”
- 하긴. 우리 어머님 앞에서 도련님을 대표님이라고 불러 봐. 분명 두 사람이 정말 사귀는 건지 의심부터 하실걸요?
“그런가요? 아, 혹시 가족들 모두 다 그 기사를 본 건…….”
- 봤어도 세경 씨 열애 상대가 도련님인 건 모를 거예요. 얼굴도 흐릿하게 나와서 사진만으론 잘 모르겠던데? 아침에 기사 보고 있을 때 남편이 옆에 있었는데, 그이는 사진을 보고도 그 사람이 자기 동생이라곤 생각도 못 하더라고요.
나중에 남편이 알게 되면 얼마나 놀랄까. 그 반응이 기대된다는 듯 예령이 웃었다.
- 이제 가족들에게 인사도 하러 올 거죠? 언제쯤 올 생각이에요?
“어제 잠깐 이야기 해봤는데. 태조 씨는 다다음주에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가 있다고. 그때가 어떻겠냐 하더라구요. 저도 다음 주까지는 스케줄이 남아 있어서 그때가 좋을 것 같고요.”
- 그날, 괜찮네요. 도련님이 어머님께 미리 이야기를 하려나? 나는 서프라이즈도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방문 전엔 미리 말씀드려야겠죠. 그리고 저 인사 드리러 갈 때 뭘 사가야 할지…….”
- 사긴 뭘 사요. 그냥 오면 되지. 설마 도련님이 뭐 사 가자고 했어요?
“그건 아니구요.”
세경이 재빨리 부정했다. 어제 태조에게도 물었지만, 예령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사갈 필요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래도 빈손으로 가긴 민망해서요.”
- 어머니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구매하시는 편이라. 영 고르기 힘들다 싶으면 과일 바구니 같은 거라도 사 와요. 내 생각엔 세경 씨 자체가 선물일 거 같지만.
아이 때문에 그러나? 세경이 제 아랫배를 힐끔 내려다봤다.
“일단 선물은 더 고민해 볼게요. 반 관장님은 필요한 거 없으세요?”
- 내 것도 사 오려고요? 됐어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혹시 그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요. 내가 어머니한테 이야기해서 같이 준비할 테니까.
“아니에요. 일부러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그냥 평소 드시는 거면 충분해요.”
게다가 그날 긴장해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 아니면 못 먹는 거라도 미리 말해줘요. 그때 부야베스도 잘 못 먹었잖아.
“지금은 괜찮아요. 입덧도 거의 안 하거든요.”
- 그래요? 다행이네.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가 엄청 좋거든. 아, 나 지금 들어가 봐야 해서. 세경 씨, 나중에 다시 연락해요.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세경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예령에게 뭔가 도움을 얻지 않을까 싶었는데, 태조랑 똑같은 대답이라니.
“그렇다고 첫 만남에 과일 바구니는 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세경이 JK 푸드 대표를 검색했다. 이미지 창을 뒤적이던 중 그녀는 마 여사의 사진 몇 장을 찾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스카프를 사드릴까?”
마 여사의 옷차림에서 유독 호피 무늬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검은색 정장에 포인트로 준 스카프가 잘 어울리기도 했다.
“반 관장님은 좀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걸로…….”
예령의 외모를 떠올린 세경이 나쁘지 않겠다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경은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백화점 마감까지는 5시간 정도가 남은 시각.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
퇴근 후, 세경의 연락을 받은 태조가 명동으로 향했다. 백화점 안에 있는 카페로 들어선 그는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 테이블은 듬성듬성 채워져 있었다. 그는 창가 쪽 구석에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를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세경에게 전화를 걸자, 여자가 핸드폰을 내려다보더니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리 오라는 듯 태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 막혔죠?”
“조금. 뭐 샀어?”
“스카프요. 태조 씨 어머니랑 반 관장님께 선물로 드리려고요. 아버지랑 형님 건 태조 씨가 골라요. 아무리 고민해도 뭘 사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안 사도 된다니까.”
“사 가는 게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태조 씨가 좀 도와줘요. 그래도 가족이니까 뭘 좋아할지 나보다 더 잘 알잖아요.”
세경이 남은 음료수를 빨대로 휘적거렸다. 태조는 그녀의 옆에 앉아 세경이 마시던 음료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럼 형이랑 아버지 건 술로 하지. 아버지는 위스키, 형은 와인. 그건 나중에 내가 사 올게.”
“종류만 알려주면 내가 살게요.”
“됐어. 내가 자주 가는 데가 있으니까 나중에 거기 들르면 돼. 그보다 또 뭐 살 거 있어?”
“여기는 없고. 서점에 좀 갈까 하고요.”
“서점은 왜?”
“육아서적이랑 태교하면서 읽을 책 좀 구입하려고요. 지금이 한창 청각이 발달할 시기라 아이한테 말을 많이 걸어주는 게 좋대요.”
세경이 태조를 올려다보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중에 태조 씨가 앙꼬한테 동화책도 읽어주고요.”
“앙꼬가 그런 노력을 다 알아줘야 할 텐데.”
픽 웃은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밥은? 저녁땐데 배고프진 않아?”
“아까 빵을 좀 먹어서. 태조 씨는 저녁 아직 안 먹었죠? 그럼 뭐 좀 먹고 갈까요?”
“아니. 나도 배가 고픈 건 아니라서. 그럼 서점부터 갔다가 집에 가서 먹자.”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태조와 같이 카페를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이내 차를 타고 광화문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향했다.
앙꼬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고르고, 육아서적 코너로 가 책들을 훑어보던 세경이 제 옆에 선 태조를 쳐다보았다.
“…….”
그는 이미 책을 하나 선점해 진지한 얼굴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깔끔한 슈트 차림에 훤칠하게 잘생긴 얼굴, 그런 남자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이 ‘우리 아이 어떻게 키울까?’라니.
저 모습이 왜 이렇게 웃긴 거지?
“왜?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
책으로 얼굴을 가린 세경이 어깨를 들썩거리자, 태조가 그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니. 인문학 서적이나 경영서를 볼 것 같은 사람이 육아서적을 보고 있으니까.”
웃음을 너무 참고 있다 보니 눈물까지 나왔다. 세경이 손가락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 때였다.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화살처럼 귀에 꽂히자 그녀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책을 보고 있을 뿐, 이쪽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번에 식당 앞에서 사진이 찍힌 걸로 신경이 좀 곤두서 있는 걸까?
“나 좀 배고파졌는데. 우리 이거 사서 나가요.”
세경이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태조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