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너 사고치고 연애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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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너 사고치고 연애했니?
2023.04.08.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이 검푸르게 물들었다. 차에서 내린 태조는 높다란 담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본가로 출발하기 전, 태조는 예령에게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께 두 사람이 사귀는 걸 알고도 숨겼다며 낮에 한 소리를 들었다고.
안 그래도 전화를 받았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물론 세경의 임신 사실까지 숨겼으니 괘씸죄를 물어 아들을 잘게 다져 놓으실지도.
“인사도 드리기 전에 세경 씨 이미지가 안 좋아지면 안 되는데.”
그럼 어떻게 운을 떼야 할까.
태조는 잠시 고민하다 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자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돌계단을 올라 정원을 가로지른 태조가 현관문을 열었다. 먼저 마중을 나온 홍 여사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좀 일찍 오시지. 사모님이 오래 기다리셨는데.”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어머니랑 아버지는요?”
“회장님은 아직 퇴근 전이시고 사모님은 거실에 계세요. 저녁은 먹었어요? 여기서 먹고 갈 거면 이야기 끝날 때쯤에 맞춰서 준비해 놓고.”
“아뇨.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태조는 식사 대신 목을 축일 물 한 잔만 부탁한 뒤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마 여사는 팔짱을 낀 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일부러 찾아보고 계신 건지, 커다란 화면엔 얼마 전 종영한 <우아한 가족>이 방송되고 있었다.
“왔니? 앉으렴.”
태조에게 시선을 던진 마 여사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그가 자리에 앉자 마 여사는 티브이 볼륨을 줄이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
“…….”
아들을 빤히 응시하는 마 여사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계속되는 침묵에 목구멍이 바짝 말라왔다. 태조는 홍 여사가 가져다준 물을 마시며 어머니의 말을 기다렸다.
“기사 내용은 어디까지가 진실이니?”
어머니의 질문에 태조는 하루 종일 본 세경의 기사를 떠올렸다.
세경의 결혼설과 임신설, 오후엔 그녀의 손 편지가 SNS에 올라가면서 오늘 하루 그녀에 대한 기사는 포화상태라고 할 만큼 엄청나게 쏟아졌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장 궁금해하시는 거라면…….
“오늘 나온 기사가 한둘이 아니라서요. 어머니가 어떤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디테일한 사항은 좀 달라도 대부분은 맞을 거예요.”
“네가 윤세경 씨랑 사귀는 사이가 맞다고?”
“네.”
“그 아가씨가 임신한 것도 맞고?”
태조가 그렇다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럼 아이 아빠가…….”
마 여사의 얼굴이 놀람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제 옆에 놓인 쿠션을 꽉 움켜쥐었다.
옅게 웃은 태조가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네. 저 맞아요.”
맞다고?
“너, 너……!”
그래, 너 좀 맞아보자.
맹수처럼 으르렁거린 마 여사가 아들에게 쿠션을 집어 던졌다.
***
“진정 좀 하셨어요?”
태조가 모친의 앞으로 냉수 한잔을 내밀었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던 마 여사가 아들을 쏘아보았다.
뭐, 진정?
지인저엉?
그녀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루아침에 아들이 결혼할 사람이 생기고 아이도 생겼다는데. 그게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언제부터였니? 그 아가씨랑 사귀는 거.”
“알고 지낸 지는 좀 됐고, 결혼할 생각으로 만나기 시작한 건 올 초쯤이에요.”
“올 초?”
그럼 태조가 여자 향수를 폴폴 풍기던 게 그 아가씨 거였나?
“결혼할 생각도 있다면서 왜 여태껏 말을 안 했어? 아이도 가졌다며. 그런 일이 있으면 가족들에게 미리 알렸어야 하는 거 아니니? 내가 내 아들 일을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해?”
“그건 죄송해요. 안 그래도 이번 저녁 모임 때 같이 와서 인사드리려고 했어요. 그 뒤에 저희가 직접 밝히려고 했는데. 기사가 먼저 나간 건 저희도 예상 못 한 일이라…….”
“그거참 퍽이나 빨리 알리는구나. 가족들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하면, 우리가 뭐 바깥에다 소문이라도 낸다니?”
섭섭한 마음에 마 여사의 목소리가 불퉁해졌다.
“가족들은 믿죠. 근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주변엔 다 비밀로 하고 있었어요. 세경 씨 드라마 편성도 갑자기 당겨지고, 임신 초기라 몸조심도 해야 했거든요.”
“아이는? 임신한 지는 얼마나 됐어?”
“이제 19주 정도 됐어요.”
“벌써?”
날짜를 계산하던 마 여사가 뭔가 이상하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랑 그 아가씨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한 게 올 초라며.”
“네.”
올 초에 사귀기 시작했는데 아이를 가진 것도 그쯤이라고?
“너…… 사고치고 연애했니?”
“저희 순서가 좀 뒤죽박죽이죠?”
태조가 순순히 긍정했다. 마 여사는 뻔뻔한 아들의 태도에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아들이 어쩌다 저렇게 됐나. 자식이 부모 맘대로 되진 않는다고 해도 저런 사고를 칠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 아가씨가 임신했으니 너한테 책임지라고 하디?”
“아뇨. 오히려 반대예요.”
“반대?”
마 여사의 미간이 꾸깃해졌다.
“제가 결혼하자니까, 단박에 싫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왜? 왜 싫어? 네가 뭐가 빠져서?”
괘씸하고 섭섭한 마음은 둘째치더라도, 태조가 결혼하자 했다가 차였다는 말에 마 여사가 울컥해 물었다.
“제가 아이 때문에 책임감에 얽매여서 결혼하는 건 싫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서 미리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했던 거기도 하구요.”
마 여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책임감에 얽매여서 하는 결혼이라…….
그녀는 낮에 본 세경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일찌감치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모친이 혼자 그녀를 키웠다고 했지. 그래서 저런 생각을 했던 걸까.
“지금은? 그 아가씨가 손 편지 쓴 것도 봤다. 편지 속 남자가 네가 맞다면, 그 아가씨는 꽤 오래전부터 널 좋아한 거 같던데.”
“곧 인사드리러 온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된 거 아니겠어요?”
마 여사는 지난번 태조와 통화한 내용을 기억해냈다. 올해도 소개해드리는 여자가 없으면 결혼은 자신과 인연이 없는 걸로 여기라고 했던가.
“너는? 너도 그 아가씨 좋아하니?”
어머니의 물음에 태조가 조용히 웃었다.
당황할 때면 토끼처럼 동그래지는 눈, 곤란하면 쫑긋 튀어나오는 입술과 부끄러움에 붉어지는 얼굴.
그녀의 첫사랑이 자신이라는 걸 들키고 수줍음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땐, 목덜미까지 빨개진 피부를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좋아하니까 결혼한다고 하죠. 어머니도 보시면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그건 직접 봐야 알지.”
태조를 흘긴 마 여사가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가득히 세경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어차피 인사하러 올 거라면서. 이 상황에 더 미룰 필요 있어? 되도록 빨리 데리고 와.”
“저희 쪽 일부터 마무리 짓고요. 날짜 정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럼, 저 먼저 일어나도 되죠?”
마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그녀가 같이 몸을 일으키자 태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손주가 어머니 목소리도 다 들을 수 있을 때라니까 잔소리하실 거면 지금 저한테 다 하세요.”
“뭐야?”
마 여사의 눈썹이 삐죽 솟아올랐다. 이 녀석이 엄마를 뭐로 보고!
“아직 나 너랑 그 아가씨 결혼하는 거 허락 안 했거든?”
“그런 말 배 속의 아이가 들으면 무척 서운해할 텐데.”
태조의 말에 마 여사가 몸을 움찔했다.
역시 우리 어머니, 아이한텐 약하시다니까.
“그리고 제가 부모님 허락받고 결혼할 나입니까?”
“그래서 여태껏 말도 안 하고 있었니? 네 맘대로 결혼하려고?”
“그건 죄송하다니까요. 아무튼 세경 씨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시고요. 가뜩이나 인사드리러 온다고 긴장하고 있는데. 세경 씨 보면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착하고 귀여운 게 딱 어머니가 좋아하실 스타일이거든요.”
마 여사의 눈이 작게 들썩거렸다. 뒤를 돌아본 그녀가 티브이를 힐끗거리곤 태조에게 물었다.
“정말 그러니?”
반신반의하는 어머니의 눈초리에 고개를 돌린 태조가 헛웃음을 흘렸다.
타이밍도 참.
“저건 드라마잖아요.”
태조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화면 속 세경이 남자 배우를 향해 물 싸대기를 날리고 있었다.
***
집에서 나온 태조가 차에 올랐다. 머리를 쓸어올린 그는 피곤한 듯 잠시 시트에 몸을 기댔다.
어머니의 반응이 예상보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좀 불안했다. 나중에 형수님께 연락해서 옆에서 좀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나.
“후우.”
태조의 입에서 나른한 숨이 흩어졌다.
하루가 정신없이 흐른 듯했다. 겨우 한숨을 돌린 태조가 핸드폰을 꺼내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방해받지 않으려 무음으로 해놨더니, 그새 부재중 통화와 새로 들어온 메시지가 수십 개였다.
개중 태조는 우현과 송 실장의 것만 확인했다.
[최오수 기자는 일단 돌려보냈다. 또 알짱거리면 경찰한테 넘길 거라고도 했고. 해정 씨한테도 CCTV 좀 체크해 달라 부탁했어. 확인하는 대로 연락 줄 거야. 일단 급한 불은 껐는데 내일 또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다. 어머니하고 이야기는 잘했냐?]
메시지를 확인한 태조가 턱을 문질렀다.
기실 태조에게 세경과의 관계를 더 캐내려 엉뚱한 말을 지껄이던 최 기자는 태조가 진짜 경찰을 불러 자신을 넘기려고 하자 그때부터 제보자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가 태조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처음엔 세경의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자주 왔다 갔다 하는 차가 수상해서 한동안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고.
그러던 중 그는 한 여자에게서 세경이 청담동에 있는 한 산부인과를 다닌다는 제보를 받았다. 현재 세경이 임신 상태인 데다 얼마 전엔 기형아 검사까지 받았다면서.
해당 병원에서 운영하는 산후조리원의 산모들이 종종 세경을 봤다면서 한번 취재해 보면 좋은 기삿거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하였다.
저 말을 믿어도 되나 의심했던 최 기자는 동료들을 모아 2개 조로 나누어 두 사람을 밤낮없이 쫓아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태조가 사는 고급 빌라의 등기부 등본을 다 조회해 그의 신분까지 알아냈다고.
그러면서 최 기자는 여자가 보내준 블랙박스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세경이 심 원장의 산부인과 건물 주차장에서 나와 회사 주차장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걸 최 기사에게 넘겨준 사람이…….
“임주희라고.”
태조가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지난번 너튜브 사건으로 임주희의 입장이 꽤 곤란해졌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었다.
드라마는 중간에 하차, 캐스팅은 취소, 세경의 팬들에게 과거 영상까지 털려 인성 논란도 번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에 대한 악감정이 남아 세경의 임신 사실을 기자에게 흘린 건가? 그게 본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
태조의 눈이 일순 서늘한 빛을 띠었다.
최 기자의 말을 모두 다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다른 정보를 준 사람이 있는 건 확실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심 원장에게 당시 주차장의 CCTV 영상을 확인해 달라 부탁하기도 한 거였고.
“최 기자의 말이 거짓이면 좋겠는데.”
하필 그 기자에게 제보를 한 사람이 임주희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또 곤란하게 한 사람이 그 여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세경이 상처를 받을 텐데.
태조는 세경의 집에서 나왔다는 송 실장의 메시지를 마저 확인하고 차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