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해줄게. 침대 위에서. (73/100)


73. 해줄게. 침대 위에서.
2023.04.12.



 
송 실장과 신 매니저가 떠난 후, 창가에 선 세경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는 송 실장이 했던 말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실은 오늘 낮에 대표님이 회사 앞에서 수상한 사람 한 명을 잡아냈거든. 근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기자였던 거야. 강 상무님이 CCTV 확인해서 며칠 동안 회사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 확인하고 데리고 갔는데. 언뜻 듣기론 그 사람이 며칠 동안 대표님을 쫓아다닌 모양이에요.’

 
송 실장은 그 남자가 맨 처음 단독 기사를 낸 기자라고 했다. 그 이후의 일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아마 강 상무님과 진 대표님이 누구에게 제보를 받았는지 물어봤을 거라고.


“태조 씨한테도 사람이 붙었으니, 나한테도 붙었겠지. 그럼 내가 병원에 갔을 때 따라왔다는 건가?”

세경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식당에서 사진이 찍힌 이후 그녀는 차를 끌고 나갈 때마다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었다.

특히나 병원에 갈 때는 일부러 길을 빙빙 돌아다니기도 했고, 룸미러로 저를 따라오는 차가 없나 자주 확인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산부인과에 다닌 걸 알았다 쳐도, 그것만으로 자신의 임신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을까?


“익명의 관계자라…….”

다시 한번 기사를 확인한 세경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려주었다던 익명의 관계자란 단어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기자에게 흘렸을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극소수였다. 그들 중 이런 일로 저를 곤란하게 할 사람은 없는데.

그럼 기자가 단순히 제 동선을 보고 추측해서 기사를 쓴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기사 내용이 다 틀린 것도 아니고…….


“모르겠다,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수록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세경은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그보다 태조가 더 걱정이었다. 어머니가 기사를 본 것 같다고, 그래서 오늘 본가에 간다고 했는데.

딩동!

초인종 소리에 세경이 인터폰을 쳐다보았다. 모니터에 태조의 얼굴이 보이자 그녀가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본가는 잘 갔다 왔어요?”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세경을 바라보았다. 어제보다 눈이 살짝 부어 있었다. 흰자위에 가느다란 실핏줄이 서 있기도 하고.


“울었어?”

세경의 뺨을 감싸 쥔 태조가 그녀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뇨.”

“눈이 좀 빨간데?”

“집이 좀 건조한가.”

지긋한 태조의 시선에 세경이 딴청을 부리며 변명했다.

울기는 했지만, 낮에 좀 울컥해 눈물이 좀 나왔던 것뿐인데. 그걸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차려서는.


“밖에 기자들이 좀 남아 있던데. 송 실장이랑 신 매니저는 언제 갔어?”

“조금 전에요. 그보다 본가에 가서 어머니는 뵀어요? 뭐라고 하세요? 기사는 보셨대요? 혹시 여태껏 아무 말 안 했다고 화를 내신 건…….”

“천천히 하나씩 물어봐. 나 어디 안 가니까.”

세경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제야 아직 신발도 벗지 않은 태조의 두 발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은?”

“안 먹었어요. 생각이 없어서. 태조 씨는요? 본가에서 어머니랑 같이 먹고 온 거예요?”

“아니. 여기 상황이 걱정돼서, 거기 오래 있을 수가 있어야지.”

“아, 그럼 뭐 먹을 것부터…….”

세경이 주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태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잠깐 앉으라는 듯 소파를 눈짓한 그가 탐색하듯 세경을 살폈다.


“따로 기사 찾아보지 말라니까. 또 저번처럼 댓글까지 읽어봤지?”

“어떻게 안 봐요. 내 일인데. 태조 씨 신상도 다 털렸던데. 탈탈.”

세경이 시무룩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태조도 봤을까? 사람들이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태조 씨도 댓글 다 봤어요?”

“전부는 아니고, 일부만.”

“미안해요. 내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기자들이 붙을 거라 예상했으면서도 내가 너무 안일했나 봐요. 병원에 갈 때도 나름 신경을 썼는데 누가 따라온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

“그걸 왜 당신이 사과해?”

“그야…… 저랑 결혼하는 게 아니었으면 태조 씨가 안 좋을 말을 들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까 송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기자가 태조 씨를 계속 쫓아다녔다면서요?”

“그래도 사과할 사람이 틀렸지.”

태조가 세경의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날렸다.


“악플을 세경 씨가 썼어?”

세경이 태조에게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밤낮없이 나 쫓아다닌 사람이 세경 씬가?”

“그것도…….”

……아니긴 한데.

그래도 우리 밤낮없이 같이 있긴 하지 않았나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당신이 나한테 사과를 해.”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건 사실이잖아요.”

아랫입술을 뚱하게 내민 세경이 태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확실히 기분은 좋지 않지. 나는 그런 거에 별로 신경은 안 쓰는데. 세경 씨랑 아이에 대해 멋대로 떠드는 건 좀…….”

세경의 머리를 쓰다듬은 태조가 딱밤을 때린 곳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래서 법무팀에 이야기해놨어. 저번에 임주희 사건 터졌을 때 모아뒀던 자료랑 이번에 악플 싹 다 모아서 고소하기로.”

“…….”

“선처는 없어. 익명이든 뭐든 자기가 한 말엔 책임을 져야 하니까.”

세경이 고개를 젖혀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웃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인 걸까?


“아, 그리고 기자요. 회사 앞에서 태조 씨 따라다니던 기자 잡았다면서요. 그 사람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어떤 거?”

“임신 관련해서요. 누가 알려준 건지. 솔직히 우리 연애나 결혼설은 그냥 흘릴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것만큼은 이해가 안 가서. 그 기자가 그냥 찔러본 걸까요? 제가 병원에 가는 걸 우연히 발견하고?”

“…….”

“아니에요?”

태조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세경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 그 기자 말로는 제보자가 있었다고 해.”

“누군데요? 혹시 우리가 아는 사람이에요?”

“그건 나중에 확인해 보고 알려줄게. 지금은 그 기자의 말을 전부 다 신뢰할 수도 없어서. 그리고 어머니 만나고 온 일에 대해 물어봤었지?”

뭔가 말을 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세경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익명의 관계자보다 태조의 모친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다 보셨고, 궁금해하시는 내용에 대해 답을 해 드렸지. 세경 씨랑 결혼할 생각이고 아이도 있다고. 그랬더니 강 상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시더라고.”

“강 상무님이랑 비슷한 반응…….”

세경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가평에서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이야 모든 걸 받아들이고 두 사람을 도와주고 있지만, 석주 선배와 달리 강 상무는 두 사람의 연애 사실과 임신 사실을 듣고 길길이 날뛰지 않았던가.


“뭐에 가장 많이 화가 나셨어요?”

“기사로 알게 된 게 가장 서운하셨던 거 같아. 우리 두 사람의 결혼도, 아이에 관한 것도.”

울상을 한 세경이 나직히 탄식했다. 인사드리기 전부터 미운털이 박힌 거 같은데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저…… 인사드리기도 전에 내쫓기는 거 아니에요?”

세경의 머릿속에 사진으로만 봤던 마 여사의 얼굴이 그려졌다. 자신은 그분 앞에서 한입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셔도 잘 맞아주실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건 태조 씨 한정 아닐까요?

세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이 순간, 아침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걸까.


“어머니가 돈 봉투를 준비하고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드라마를 너무 봤네.”

픽 웃은 태조가 넥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책을 발견하곤 팔을 뻗었다.


“이거 그때 산 책이지?”

“네.”

세경이 고개를 주억이자 태조는 그 중 동화책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왜요?”

“태교해달라며. 앙꼬한테 동화책 읽어주면서.”

“그렇긴 한데. 내가 말한 건 태조 씨가 읽어달란 거……. 꺄악!”

세경의 몸이 순식간에 붕 떠올랐다. 높아진 시야에 깜짝 놀란 세경이 비명을 지르며 매달릴 곳을 찾아 두 팔을 뻗었다.


“해줄게. 침대 위에서.”

태조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얼굴을 붉힌 세경이 입술을 깨물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주희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는 습관처럼 손톱을 깨물며 짜증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뭐야? JK 그룹의 차남?”

세경의 결혼과 임신설에 관한 기사는 이튿날까지 포털 메인을 장식했다.

다만, 전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사마다 세경이 SNS에 올린 손 편지 전문이 같이 올라와 있다는 거였다.

결혼은 인정해도 임신에 대한 건 부정할 줄 알았더니. 세경은 의외로 두 가지 사실을 다 빠르게 인정했다.

그리고 팬들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건, <우아한 가족>의 드라마 편성이 갑자기 당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걸 누가 믿는다고.”

세경이 직접 손 편지까지 써 자신의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여전히 연예면은 세경에 대한 기사로 시끌벅적했다.

어디 그뿐일까. 세경의 열애 상대가 재벌가의 차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른 섹션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정보를 퍼다 나르는 너튜버들의 채널도 덩달아 바빠졌다.

썸네일들은 온통 윤세경의 결혼도 아닌 혼전 임신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두 사람에 대한 목격담과 지라시 수준의 소문들도 빠르게 생성되었다.

윤세경이 클럽에서 자주 보이던데 정말 그 아이가 그 남자의 애가 맞느냐는 것부터 임신한 것을 빌미로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려고 수를 쓰는 거라는 등.

<우아한 가족>으로 상승세를 타던 세경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대로 결혼도 깨져버리면 좋을 텐데.”

JK 그룹의 차남이 윤세경의 결혼 상대라니. 그게 가당키나 하나?

코웃음을 친 주희가 비뚜름하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몇 개의 기사를 더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화면이 바뀌며 나경의 이름이 떠올랐다. 주희는 엄지손가락으로 통화버튼을 살짝 밀어내곤 전화를 받았다.


“어, 나경아.”

- 너니? 윤세경 관련해서 제보한 사람?

날이 선 나경의 목소리에 주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 윤세경 임신설 터졌잖아. 익명의 관계자로 누가 제보를 한 건지, 아니면 인터뷰를 한 건지. 그 익명의 사람이 너냐고.

추궁하는 나경의 태도에 감정이 상한 주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나든 내가 아니든. 네가 이렇게 흥분해서 전화할 일이야?”

- 내 말에 기분 나빠하는 거 보니. 맞구나? 네가 말한 거.

“…….”

- 내가 그날 병원에 윤세경이 온다고 말한 것 때문에 그랬던 거야?

얘는 또 왜 이래?

나경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자, 주희가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둥글게 문질렀다.


“나경아, 나는 네가 이렇게 화내는 거 이해가 안 가는데. 저번부터 내 앞에서 자꾸 윤세경 편드는 거. 솔직히 좀 기분 나쁘기도 하고. 너도 알잖아. 걔 때문에 내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졌는지.”

- 그래서 나는 네 친구니까 무조건 네 편을 들어주고 잘했다 하라고?

“…….”

-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넌 같은 연예계에 종사하면서, 임신 사실이 기사로 나가면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 이렇게 했니? 진짜, 내가 그날 너한테 괜한 소리를 해서…….

“내가 몰라서 그렇게 했겠어?”

주희가 나경의 말을 툭 잘랐다. 건너편에서 ‘뭐?’ 하고 당혹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알고 한 거라고. 윤세경도 욕 좀 먹으라고. 나만 당하는 건 억울하잖아.”

- 너 진짜…….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 윤세경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 내가 네 말만 듣고 그렇게 한 걸까 봐? 걱정 마. 네 말만 듣고 그랬던 거 아니니까. 그리고 앞으로 이런 소리 할 거면 전화하지 말고. 짜증 나니까.”

- 주희야, 잠깐…….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주희가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본 그녀는 이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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