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어서 오시죠, 앙꼬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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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어서 오시죠, 앙꼬 아버님.
2023.04.22.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좀 나눈 것뿐인데, 시간은 금세 흘러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집을 나온 태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따라 나오고 있었다.
“들어가세요.”
“너네 가는 거 보고.”
마 여사가 아들에게 시선을 거두고 세경을 돌아보았다. 진 회장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마 여사와 눈이 마주치자 긴장한 듯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었다.
‘흠, 내가 너무 매섭게 굴었나?’
다른 가족들에겐 방긋방긋 잘도 웃으면서 저를 볼 땐 저리 굳어버리니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저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목을 가다듬듯 작게 헛기침을 한 마 여사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세경 양도 조심히 가요. 피곤할 텐데 가서 푹 쉬고.”
“네. 오늘 저녁 잘 먹었습니다. 저랑 태조 씨 관계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구요.”
세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 여사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게 뭐 감사할 일인가. 두 사람이 좋으면 된 거지. 그보다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 텐데, 태조랑 같이 잘 상의해봐요.”
“네. 같이 이야기해 볼게요.”
“다음에 볼 땐 오늘처럼 긴장하지 말고. 태조 넌 세경 씨 잘 챙기렴.”
“그럴게요. 형은? 오늘 여기서 자고 가?”
“아니. 우리도 조금 이따 갈 거야.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세경 씨. 다음에 또 봐요.”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세경이 윤조의 옆에 있는 예령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다.
“예령 언니.”
얼굴을 붉힌 세경이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아까 그녀가 마 여사에게 태조를 달라 소리치던 것을 떠올리곤 계속 저러는 거였다.
“아, 미안해요. 아까 그거 너무 귀여워서.”
웃다가 울기까지 한 예령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꾹 찍어냈다.
“…….”
귀엽다뇨. 저는 쥐구멍을 찾고 싶은데요.
“나 곧 전시 준비 끝나니까 밖에서 한번 봐요.”
“시간 나면 알려주세요. 심 원장님하고도 스케줄 맞으면 같이 보구요.”
“그래요. 내가 해정이한테 물어보고 연락할게요.”
더 늦기 전에 출발하라며 예령이 손을 팔랑거렸다. 세경은 태조의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곤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가볼게요.”
묵례로 인사를 대신한 태조가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세경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튼 채 시무룩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 여사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탓이었다. 뭔가 더 감동적이고 세련된 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라니.
“왜 하필 그거밖에 생각이 안 나서…….”
그 말을 듣고 벙쪄 있던 마 여사의 표정과 소파를 두드리며 웃음을 참던 예령을 떠올리니 한숨만 흘러나왔다.
두고두고 회자될 흑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마 여사의 표정을 살피느라 보질 못했지만, 분명 남자들이 있던 자리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
콩, 자책하듯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있던 세경이 운전하는 태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아까 웃었죠?”
“아니.”
부정하는 태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눈을 얇게 뜬 세경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웃었는데.”
“아닌데.”
재차 부정한 태조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차는 어느새 언덕과 같은 길을 올라 빌라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경은 그의 집에 도착해, 그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들어가.”
먼저 들어가라며 태조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오리처럼 뚱하게 입을 내민 그녀는 태조를 흘기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고민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나 태조 씨 어머니가 하신 말씀 듣고 계속 생각해봤는데요. 우리 같이 살 집 말이에요. 역시 새로운 곳을 찾아 다시 꾸미는 것보단 내가 여기로 들어오는 게…….”
순간 뒤따라오던 태조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목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세경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태조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끌어안은 두 팔엔 힘이 실렸고 맞닿은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지? 설마 우는 걸까?
“태조 씨, 왜…….”
당황한 세경이 태조의 팔을 다독거렸다. 제가 모르는 사이 어머니께 무슨 안 좋은 말이라도 들은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의 얼굴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푸흡.
참고 있던 웃음소리가 제 귀에 꽂혀온 것은.
“……태조 씨.”
어금니에 힘을 준 세경이 태조의 팔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태조는 우는 게 아니라 웃고 있었다.
골이 난 세경의 표정을 보고도 좀체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그는 아예 예령처럼 어깨까지 들썩이고 있었다.
이거 봐, 분명 그때 웃었다니까.
“정말…… 나는 부끄러워 죽겠는데.”
토라진 세경이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저렇게 웃는 태조를 보니 막상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미안. 아까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나서.”
“…….”
“그래서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건데?”
그가 세경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오롯이 비추었다. 충동적인 밤을 보냈던 그 어느 날처럼.
“몰라요, 그건. 앞으로 생각해 보고요.”
고개를 살짝 튼 세경이 그의 시선을 피했다. 픽 웃은 태조가 세경의 턱을 돌려 다시 그를 보게 만들었다.
“뭘 생각까지 해.”
“…….”
“이런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지.”
기울어진 태조의 고개가 세경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말캉한 입술이 부드럽게 빨리고 뜨거운 숨이 얼크러졌다.
세경은 그의 입맞춤에 호응하듯 태조의 목에 팔을 둘렀다. 키스가 짙어질수록 달아오른 숨소리가 야릇하게 귀를 적셨다.
“하아.”
태조에게 거듭 빨린 입술이 통통하게 부풀었다. 달큼한 숨을 내뱉은 세경이 붉어진 얼굴로 태조를 응시했다.
그가 두 사람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세경의 입술을 느릿하게 쓸어주었다.
“아까 뭐라고 했지? 우리가 살 집은 뭐. 다른 곳 말고 여기로 들어오겠다고?”
사람 혼을 쏙 빼놓곤 그새 화제를 바꾸는 것도 빨랐다. 태조가 다시 입술을 겹치려 들자 세경이 손으로 막으며 대답했다.
“내 집보단 태조 씨 집이 더 크니까. 여기도 리모델링 한 지 얼마 안 됐다면서요. 가구랑 가전도 다 새 거고.”
“그렇지.”
“난 여기도 마음에 드니까. 그냥 우리 여기서 조금만 더 꾸며 살자구요. 앙꼬 태어나기 전에 아기방만 하나 새로 만들고.”
“그럼 앙꼬 방은 게스트 룸을 하나 치워서 만들고, 빈방 하나는 드레스 룸으로 바꾸는 게 낫겠네.”
그것도 좋겠다며 세경이 태조의 말에 동의했다.
“침실은 원하는 대로 바꿔 봐. 침구를 바꿔도 되고 가구나 소품을 더 사도 되고. 아니, 말 나온 김에 내일 바로 가구부터 보러 갈까?”
“뭐가 그렇게 급해요. 천천히 해요. 배치를 어떻게 할지, 뭘 살지 좀 더 고민해 보고. 그리고 태조 씨 나랑 같이 갈 곳이 있는데.”
“갈 곳? 어디?”
혹시 어머니가 계시는 제주도를 말하는 건가?
“그건 가보면 알아요.”
궁금해하는 태조의 얼굴을 보며 세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어서 오시죠, 앙꼬 아버님.”
팔짱을 낀 심 원장이 태조를 쏘아보았다. 흡사 딸을 뺏어가는 도둑놈이라도 대면한 얼굴이었다.
바로 옆에 세경이 있어 육성으로 터지지 않았을 뿐, 심 원장은 열애설이 터지기도 전에 임신을 시킨 그 망할 놈이 네놈이었냐 묻는 눈치였다.
“앙꼬 아빠,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심 원장이 태조의 멱살을 잡기 전, 배시시 웃은 세경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예. 보고 싶었죠.”
아주 멱살을 잡아 쥐고 싶을 만큼.
“앙꼬 아빠가 진 대표였다니. 상상도 못 했네요.”
두 주먹을 불끈 쥔 심 원장이 태조를 흘겼다. 갑자기 터진 세경의 결혼 기사에 그녀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경의 임신 사실도, 앙꼬 아빠와 결혼할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진태조였다니.
기사를 보자마자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어 제 눈을 얼마나 비벼댔는지 모른다. 강 상무에게 전화가 와서 확인까지 마쳤을 땐 어떻게 제 꽃사슴이 저런 짐승과 결혼하냐며 절규하기도 했고.
“원장님한텐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왠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숨긴 꼴이 되었다며 세경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요. 나도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어쩐지 저번에 대기실에서 육아 서적을 보고 있더라니. 그게 다 이유가 있던 거였네.”
그때 알아채지 못한 게 아쉽다는 듯 심 원장이 딱, 손가락을 부딪쳤다.
“기형아 검사 결과 문제없다는 건 들었을 테고, 온 김에 초음파 한번 보고 갈래요? 진 대표는 직접 들어와서 본 적이 없으니까.”
태조를 한번 쳐다본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장 옆에 있는 초음파 실로 향했다.
신발은 벗은 세경이 익숙하게 침대에 눕자, 태조가 그녀의 손을 잡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배 위에 탐촉기를 대고 움직이자 시커멓던 화면에 서서히 꼬물대는 앙꼬의 모습이 보였다.
콩알만 한 게 언제 저렇게 커진 건지.
아이의 심장 소리까지 들은 태조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솟아올랐다.
“직접 보니 어떻습니까, 앙꼬 아버님?”
“귀엽네. 심장 소리도 크고.”
태조가 세경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앙꼬의 눈, 코, 입과 발바닥까지 친절하게 짚어준 심 원장은 세경의 배에 남은 젤을 닦아주고 장비를 정리했다.
“이제 배가 하루가 다르게 불러올 거야. 그럼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지금 두 사람 따로 살고 있지?”
“집은 곧 합칠 거야. 가족들한테 인사도 드리고 왔으니까.”
“진짜? 세경 씨, 마 여사님 뵙고 왔어요?”
“네.”
옷을 내린 세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태조의 손을 잡고 플랫 슈즈에 발을 끼워 넣었다.
“어땠어요? 태조 어머님은?”
“좋았어요. 결혼도 반대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허락해 주시기도 했고.”
“반대할 이유가 없죠. 예쁜 며느리에 귀여운 손주까지 들어오는데. 그럼 어른들 허락도 받았겠다, 식은?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예요?”
“앙꼬 태어난 뒤에요. 그리고 저, 출산 때까진 아무 활동도 안 하는 게 좋을까요?”
“왜요? 급하게 스케줄 잡힌 거 있어요?”
“아직 결정된 건 아닌데, 송 실장님 말로는 몇 군데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온 게 있다고 해서요.”
세경이 태조를 바라보았다. 그도 이미 보고를 받은 듯 세경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장기 촬영은 아니고, 예능 프로랑 화보 같은 거.”
“아아, 그 정도는 괜찮아요. 무리만 하지 않으면. 출산 전까지 일하시는 분도 계시니까. 대신 힘들다 싶으면 바로 사람들한테 이야기해요. 지금까진 큰 문제도 없고, 태아도 자리를 잘 잡고 있어서 괜찮은데. 중후반기엔 조산이 가장 큰 걱정이라. 혹시라도 출혈 같은 게 보이면 지체 없이 병원으로 와요.”
“무리하지 않게 조심할게요.”
일을 해도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세경이 웃었다. 진료실을 나온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전 태조를 돌아보았다.
“태조 씨,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와.”
태조가 세경의 손에서 가방을 가져갔다. 심 원장은 세경의 뒷모습을 보며 태조의 옆에 섰다.
“너 이 자식…….”
세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심 원장이 이때다 싶어 발을 세게 쾅, 굴렀다.
멱살을 잡는 대신 태조의 발을 사뿐히 지르밟아주려 했건만, 얄밉게 피한 덕에 찌릿한 통증은 온전히 심 원장의 몫으로 돌아왔다.
“아우, 진짜!”
심 원장이 분한 듯 소리를 빽 질렀다. 태조가 픽 웃음을 흘렸다.
“CCTV 고마워. 다 확인했다.”
발뒤꿈치를 바닥에 통통 두드리고 있던 심 원장이 태조를 힐끗거렸다. 좀 전까지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던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세경 씨 쫓아간 그 차 주인은 찾았어?”
“어.”
“누군데. 기자야?”
“기자는 아니고.”
태조의 얼굴에 심란한 기색이 번졌다. 심 원장이 준 영상과 회사 앞 CCTV를 확인한 결과 동일한 차 한 대가 발견되었다.
수소문해 보니 그 차의 주인은 임주희가 맞았다.
병원을 찾아온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차를 타고 나가려던 길에 세경을 발견하고 뒤쫓아 온 듯했다.
주차장 영상에선 차에서 내린 세경의 뒤를 몰래 쫓아오는 임주희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으니.
“기자가 아니면 누구야? 설마 세경 씨 스토커?”
“스토커는 아니고. 임주희라고, 예전에 세경 씨랑 같이 활동했던 그룹 멤버.”
“임주희? 그 사람 내가 진료한 기억이 없는데?”
“그럼 다른 데 볼 일이 있었던 거겠지. 여기 병원만 있는 게 아니잖아.”
태조의 말에 심 원장의 눈동자가 위쪽을 향했다.
“세경 씨는 알아?”
“아직 몰라. 그러니까 너도 괜한 말 하지 말고.”
심 원장이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 사이, 화장실에서 나온 세경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가방을 달라는 세경의 손을 잡아 제 팔에 걸쳤다.
“갈게.”
“그래. 세경 씨, 이제 매주 올 필요는 없고 한 달에 한 번씩 와도 돼요. 대신 배에 통증이 심하다거나 피가 보이면 그땐 바로 찾아오고요.”
재차 당부한 심 원장이 병원 문을 열어주었다. 문가에 기댄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경의 가방을 든 태조가 흐트러진 세경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주었고, 세경은 그런 태조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꽃사슴이 좀 아깝긴 하지만…….
“뭐, 잘 어울리긴 하네.”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심 원장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