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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보자의 정체 (77/100)


77. 제보자의 정체
2023.04.26.


연이어 굵직한 사건들이 터진 덕분일까. 세경의 결혼과 임신설로 도배가 되었던 연예면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기사들로 채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세경에 대한 기사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따금씩 잊을 만하면 자극적인 헤드라인들 틈에 세경의 이름이 끼어 있었고, 기사 말미엔 꼭 태조에 관한 내용이 섞여 나왔다.

다만 세경이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해서인지, 아니면 마약이나 음주운전 같은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의 추가 보도 때문인지. 세경의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그 전보다 유순해졌다.

간혹 잘 사는지 두고 보겠다, 얼마 못 가 이혼할 거 같다라는 등의 악담도 섞여 있었지만, 앞서 지독하다 싶을 만큼 매운 댓글을 봐서 그런지 저 정도는 별다른 타격도 주지 못했다.

거기다 임신 사실을 밝히고 난 후, 태조와 병원을 가거나 산책을 나갈 때도 얼굴을 다 가리지 않았더니 종종 SNS나 커뮤니티에 두 사람의 목격담도 올라오고 있었다.


“세경아, 너 이것도 다 가져갈 거야?”

저를 찾는 소리에 세경이 종종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드레스 룸에서 유나가 저 대신 짐을 정리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몸에 딱 달라붙는 원피스와 청바지들이 걸려 있었다.


“아니. 그건 그냥 둬. 가져갈 건 이 정도면 된 거 같아. 필요한 건 나중에 또 가지러 오면 되니까. 그보다 배 안 고파? 고기 구울 준비 다 했는데.”

“벌써 밥 먹을 땐가? 근데 아직 제훈 씨 안 왔잖아.”

“그러게. 얘도 올 때가 됐는데.”

두 사람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에 제훈의 얼굴이 보이자 세경이 바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제훈 씨도 양반 되긴 글렀네.”

뒤따라온 유나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제훈에게 말했다.


“네? 왜요? 제 얘기하고 계셨어요?”

“응. 왜 안 오나 하고. 우리 막 밥 먹을까 했거든요. 한데 그건 웬 꽃바구니예요?”

“아, 이거. 세경이 누나한테 온 거예요. 누나 전속 계약한 브랜드에서 결혼이랑 임신 축하한다고. 회사에 몇 개 더 있는데 제가 손이 두 개라 이것만 갖고 왔어요.”

제훈이 세경을 향해 꽃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손잡이에 달린 리본엔 세경 씨의 결혼과 임신을 축하한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고마워라. 그건 저기에 두고 일단 밥부터 먹자. 점심 안 먹고 왔지?”

“네. 지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것 같아요.”

너스레를 떤 제훈이 꽃바구니를 내려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탁엔 고기를 구울 불판과 반찬들이 깔끔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 옷 정리하는 동안 이거 준비한 거야? 그냥 음식 배달시키지. 괜히 너 귀찮게.”

“이 정도가 뭘 귀찮아. 고기만 구우면 되는데.”

세경이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놓았다. 유나가 어떻게 아이 가진 사람에게 일을 시키겠냐며 세경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아갔다.


“누나, 대표님 집으로 이사 가신다고 하셨죠? 언제 가세요? 짐은 정리가 하나도 안 된 거 같은데.”

“여기 있는 건 다 못 가져가지. 당장 필요한 옷이랑 물건만 좀 챙겨가려고. 아직 거기도 가구가 안 들어와서. 그쪽에 방 꾸며지는 대로 정리한 짐도 조금씩 가져갈 거야.”

“이야, 진짜 그 대표님이랑 결혼하는구나. 신기해라.”

손 빠르게 고기를 뒤집은 유나가 짤막한 감탄을 쏟아냈다.


“나도 그래. 아직 실감이 안 나기도 하고.”

“결혼식 준비를 안 해서 그런가? 혼인신고서에 도장, 쾅 찍으면 실감이 좀 날지도 모르겠네. 참, 진 대표님 가족들은 어땠어? 드라마에서 봤을 때처럼 막 무섭고 그러진 않았어?”

“안 그러셔. 태조 씨 아버님도 형님도 되게 친근하게 대해주셨어. 태조 씨 어머님한텐 조금 혼났지만.”

“그건 다행이다. 사실 결혼은 남편만큼이나 시댁 식구들이 아주 중요하거든.”

유나가 고기를 잘라 세경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제훈의 몫과 제 몫까지 살뜰히 챙긴 유나가 새 고기를 올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나 애들한테 들었는데 네 임신 사실 말이야. 어쩌면 그거 기자한테 흘린 사람이 주희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어.”

“주희?”

고기를 입에 문 세경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의외의 인물이었다. 최근 주희와 마주친 적도 없는데, 제 임신 사실을 어떻게 알고?


“기사에 나온 익명의 관계자가 주희란 소리야?”

“응.”

“저번에 세경 누나 험담했던 그분이요?”

옆에 있던 제훈도 덩달아 놀라 되물었다. 세경은 지난번 송 실장이 한 말을 기억하고 제훈에게 물었다.


“제훈이 넌 뭐 들은 거 없어? 그때 송 실장님하고 여기 왔을 때 그랬잖아. 회사 앞에서 대표님 따라다닌 기자 한 명 잡았다고.”

“예. 전 그 뒤의 이야기는 들은 게 없어서. 자세한 건 강 상무님이랑 대표님만 아실 거예요.”

“너야말로 대표님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어?”

유나의 질문에 세경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기사가 나온 날 태조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뭔가 더 확인한 후에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기자한테 제보자가 있다는 걸 들었다고. 그게 누군진 말 안 해줬어. 뭘 더 알아볼 게 있었나 봐. 넌 그 말 어디서 들었어?”

“나? 나는 세라한테 들었어. 최근에 나경이가 아이를 낳았는데 걔가 산후조리한 데가 네가 다니는 그 병원과 같이 있는 곳이었대. 얼굴 꽁꽁 숨기고 다녀도, 거기 사람들은 너 그 병원 다니는 거 알고 있었나 봐.”

“아…….”

세경이 침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심 원장의 병원에 다녔을 때 간혹 엘리베이터나 주차장 쪽에서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눈만 내놓고 다닌 거 같은데. 어떻게 그런 차림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본 거지?


“어? 그런데 산후조리원엔 그 나경이란 분이 계셨다면서요. 그런데 익명의 관계자는 왜 그 사람이에요? 유나 누님 말대로라면 나경이란 분이 소문냈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지 않나요?”

제훈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나가 그건 아니라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나경이가 있는 산후조리원에 주희가 왔었대요. 두 사람이 예전부터 친했거든. 그날 세경이가 산부인과에 다닌다는 말을 흘렸는데 주희가 그 말만 듣고 제보를 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나경이 말로는 주희가 자기 말만 듣고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는데. 나도 몰랐던 사실을 걔는 대체 어떻게 알고 그런 건지…….”

유나가 말끝을 흐리며 세경의 표정을 살폈다. 세경은 심각한 낯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음.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세경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유나가 뻘쭘함에 볼을 긁적거렸다.


“어? 아, 그건 아니고. 주희랑 어디서 마주쳤을까 생각해 보고 있었어.”

“그러지 말고. 그냥 대표님한테 물어봐. 기자한테 들었다고 하니 그게 더 정확하겠지.”

제훈도 그게 낫겠다며 옆에서 동조했다. 그리고 세경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려는 듯 말을 돌렸다.


“누나, 당분간 활동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이 낳으실 때까지 쭉 쉬실 거예요? 언뜻 듣기론 예능이랑 광고 제안이 몇 개 들어온 거 같았는데.”

“응. 나도 들었어. 그거 때문에 조만간 한번 회사에 들를 거야. 송 실장님이 그 부분 의논해보자고 했거든.”

“몸도 무거워질 텐데. 안 쉬고 계속 활동하려고?”

“그렇게 요란하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잖아. 일이 없으면 모를까. 제안도 오는데 무리하지 않는 선에선 해보려고. 아이 가졌다고 가만히 집에만 있는 것도 싫고.”

“그럼 부부이몽에 한 번 더 나올래? 내가 이번에 임신부에게 좋은 요가 자세를 알려줄게.”

긍정적인 세경의 대답에 유나가 눈을 빛냈다.


“아니, 그건 좀…….”

단박에 거절한 세경이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유나에게 요가를 배우며 비명을 질렀던 순간이 아찔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가구는 다 골랐어?”

욕실에서 나온 태조가 세경의 곁으로 다가왔다. 퇴근 시간에 맞춰 태조의 집으로 온 세경은 그가 가지고 온 가구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대충은요. 여기 체크한 거만 사면 될 것 같아요.”

태조가 세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가 보고 있던 카탈로그를 가져갔다.

밀착한 그의 몸에서 청량한 바디 워시 향이 풍겼다. 세경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비스듬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더 살 건 없어? 여기로 가져올 짐은?”

“지금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옷은 유나가 도와줘서 다 챙겼고. 나머지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가져오려고요.”

“무거운 건 들지 말고. 나중에 석주랑 우현이한테 게스트 룸 정리하라는 거 도우라고 할 거니까. 그때 들어달라고 해.”

“어떻게 그래요. 태조 씨한테는 친구여도 나한테는 선배님이고 회사 임원인데. 아, 그리고 낮에 예령 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집 옮기는 건 잘 진행되고 있냐고.”

“형수님이?”

“네. 실은 어머니가 연락하려고 하셨는데, 제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예령 언니한테 물어보라고 하셨대요. 집 옮기는 데 필요한 거 없냐고. 정말 따로 집 안 구하고 태조 씨 집에서 그대로 살아도 되겠냐면서요.”

세경이 태조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뒤, 마 여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재차 새로 신혼집을 얻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어봤던 터였다.

혹여 임신한 몸으로 준비하는 게 버거워 그런 거라면 자신이 직접 나서 주겠다면서.

처음 만났을 때, 내심 실망이니 뭐니 하며 세경의 기를 죽였던 게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일 태조 씨네 집에 가기로 했어요.”

“본가에? 무슨 일로?”

“저번엔 길게 이야기를 못 했다고. 별일 없으면 와서 점심도 먹고 천천히 이야기도 하자고 하시던데요?”

태조가 담담히 말하는 세경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괜찮겠어? 혼자 가는 게 부담스러우면 내가 퇴근할 때 같이 가는 걸로 바꾸고.”

“아뇨. 어머니가 차도 보내주신다고 했으니까 낮에 갔다 올게요. 그보다 나 태조 씨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떤 거?”

“기자에게 제 임신 사실을 알린 사람. 주희였어요?”

자신의 질문이 의외라 여겼을까. 태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세경은 곧장 부정하지 않는 태조의 반응에, 그 답을 바로 알아차렸다.


“알아볼 게 있다더니. 그게 주희인지 확인하느라 그런 거예요?”

“기자의 말만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이 흘린 거라는 건 누구한테 들었어?”

“유나가 친구한테 들었대요. 심 원장님 병원에 있는 산후조리원에 친구가 머물고 있었나 봐요. 제가 산부인과에 다니는 걸 그 친구가 알고 있었고, 그걸 주희에게 말한 모양이에요. 아마 주희가 그 말을 듣고 과장되게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그건 아닐 거야. 그 사람 병원에서부터 회사까지 따라왔거든.”

“……따라왔다고요? 그럼, 주희가 절 병원에서 봤다는 거예요?”

세경이 되묻자 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 저는 주희를 본 적이 없는데.”

“본 적은 없겠지. 몰래 따라왔으니까. 그때 앙꼬 성별 알려준 날 말이야. 주차장에서 보고 쫓아온 거 같아. 병원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차 타고 갈 때 뒤쫓아 나가더라고.”

앙꼬의 성별을 알려준 날.

그때 분명 기형아 검사도 같이했었다. 그리고 병원에 올라가면서 태조와 잠깐 통화를 하기도 했고.


“몰래 따라왔다면, 혹시 내가 병원으로 올라갈 때도…….”

태조가 세경이 삼킨 말을 알아채고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그럼 그때 알아챈 거구나.


“방심했네요, 내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한숨을 쉰 세경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더 주의했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자책할 필요 없어.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잖아. 그게 좀 당겨진 것뿐이지.”

“그래도……. 그 일만 아니었으면, 태조 씨 신분이 그렇게 노출될 일도 없었잖아요. 어머니한테도 먼저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원래 사람 일이란 게 변수가 많은 거기도 하고.”

“…….”

“그러니까 잊어버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태조가 세경의 머리를 당겨와 둥근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힘없이 웃은 세경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정한 그의 위로에도 괜히 마음이 소란스러워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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