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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어머님이 세경 씨 울리셨네요. (78/100)


78. 어머님이 세경 씨 울리셨네요.
2023.04.29.


세경이 손에 쥔 찻잔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렸다. 단순히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식사를 하자는 건 페이크였다.

진짜 목적은 이거였던 듯, 점심을 먹자마자 찾아온 퍼스널 쇼퍼로 인해 집 안엔 작은 쇼룸이 펼쳐졌다.


“이건 어떠니?”

세경은 마 여사가 보여주는 옷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저것마저 예쁘다는 말을 하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퍼스널 쇼퍼가 고심해 가져온 옷들이 구매를 확정한 행거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세경이 앞서 ‘옷이 예쁘네요.’ 라고 말한 결과였다.


“그것도 괜찮지만…….”

이미 골라놓은 옷만 열 벌이 넘었다. 설마 저걸 다 사시려는 걸까?

이건 아니다 싶어 세경이 도움을 청하는 눈으로 예령을 쳐다보았다. 키위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던 예령은 세경과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계속 그렇게 물어보시면 세경 씨가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그러니…….”

마 여사의 곁으로 다가간 예령이 뒤를 돌아보았다. 제발 말려달라는 세경의 눈빛에 장난기가 솟은 예령이 싱긋 웃었다.


“그냥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사주세요. 세경 씨 옷 태가 예뻐서 뭐든 다 어울릴 거예요.”

“그럴까? 하긴 이런 옷들이 앞으로 입기 딱 좋을 옷이지. 세경 양도 이런 옷은 별로 없을 거야, 그럼 오늘 가져온 것들은 다 포장해서…….”

“저, 저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세경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마 여사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세경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냥 처음에 본 것만 사주시면…….”

“하나만?”

“네.”

세경이 무례하지 않게 공손히 대답했다. 마 여사는 뭔가 아쉬운 듯 행거에 걸린 옷들을 쭉 훑어보았다.


“이거 하나 더 사자. 입으면 예쁠 것 같은데.”

“이것두요.”

마 여사가 옷을 하나 집자 예령이 옆에서 눈여겨본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세경에게 물으면 또 거절할까, 마 여사는 직원에게 옷을 넘기고 나머지 물건들을 정리하라 했다.


“부담스럽게 느끼지 마. 저번에 왔을 때 가족들 선물 다 챙겨 온 거에 대한 보답이니까.”

찻잔을 든 마 여사가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세경은 바닥에 놓인 커다란 쇼핑백 세 개를 보며 옅게 웃었다.

배가 많이 불러올 테니 편하게 입으라 사준 옷이었다. 보답이라고 하기엔 좀 과한 것 같지만, 일부러 챙겨주시는 걸 무조건 거절할 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잘 입을게요.”

“세경 씨 도련님 집으로 들어간다면서요. 짐은 다 옮겼어요?”

“아직이요. 옮길 물건은 정리해놨고 가구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아예 짐을 다 옮기는 건 아니구요? 그럼 지금 사는 집은요?”

“당분간은 그냥 둘 생각이에요. 태조 씨는 나중에 작업실로 쓰는 게 어떻겠냐고도 했고.”

예령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 여사가 세경에게 물었다.


“세경 씨 어머니가 지금 제주도에 혼자 계시지?”

“네.”

마 여사의 입에서 모친의 이야기가 나오자 세경이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프로필을 보니까 어머니만 나오던데. 다른 가족들에 대해 물어보는 건 실례일까?”

“아뇨. 괜찮습니다. 굳이 숨기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요. 부모님은 어릴 때 이혼하셨고, 어머니가 혼자 절 키우셨어요. 아버지는 고1 때 돌아가셨는데 이혼하시기 전부터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터라 연락은 자주 안 하고 살았어요.”

“그래.”

마 여사가 별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경의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마 여사가 제 가족사를 듣고 안 좋게 볼까 걱정이 밀려 온 탓이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마 여사의 말을 기다렸다. 찰나 간 이어진 침묵이 억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겠네. 아이 혼자 키우는 거 힘든 일인데.”

“…….”

“대단하신 분이야. 태조는? 세경 씨 어머니한테 인사드렸다고 했던가?”

“네에. 실은 저번에 저희 집에 오셨을 때 태조 씨가 이야기했다고…….”

세경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려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며 누군가 코끝을 세게 꼬집은 것처럼 찡하게 아려왔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정란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한 번도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손가락질받으며 편견과 냉대 어린 시선에 상처를 받았을 뿐. 고생했다고, 대단하다고 말을 해준 건 마 여사가 처음이었다.


“식도 올리기 전에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되었으니, 모친께서도 얼마나 걱정이 많으시겠어. 나중에 만나는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제주도에서 가게를 하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한번 내려가 보는 건…….”

킁. 어디선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멈춘 마 여사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세경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걸 또 참겠다고 힘을 바짝 준 입술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아, 아니. 얘는 왜 갑자기 울고 그러는…….”

난데없이 터진 세경의 울음에 마 여사가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죄, 죄송해……. 흡. 제가 아이를 가져서 그런지 요즘 기분이 막 왔다 갔다 해서…….”

입을 떼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세경이 아이처럼 울자, 마 여사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아이고, 어머님이 세경 씨 울리셨네요.”

예령은 드물게 당황하는 마 여사의 모습이 재밌는지 웃음을 삼키며 세경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



“들어와요, 태조 씨. 어머니가 저녁 먹고 가라고 준비해 주셨어요.”

태조가 저를 맞이하는 세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말에 회사에서 본가로 바로 달려온 거였다.

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이야기를 한다더니. 낮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세경의 눈가가 살짝 짓물러 있었다.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은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저번에 왔을 때보다 표정은 더 좋아 보였다.


“거기서 뭐 하니? 세경이 세워두지 말고 얼른 들어와.”

마 여사가 현관에 서 있는 아들을 채근했다.

태조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세경이라니? 이제 두 번째 보는 걸 텐데, 그새 어머니가 부르는 세경의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뭡니까? 낮에 무슨 일 있었어요? 어머니가 세경 씨를 부르는 게 바뀌었는데.”

“인사도 했겠다. 며느리 될 아이 편하게 부르는 게 뭐 잘못된 거니? 예령이랑 똑같이 이름으로 부르는 건데.”

“그건 아니지만…….”

어머니에겐 뭔 말을 못 하겠다는 듯 태조가 세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중에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태조를 다이닝 룸으로 끌고 들어갔다.


“바빠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식사 자리도 빠진다는 녀석이, 세경이가 여기 있다니까 쏜살같이 달려오는 거 봐라.”

“그러니까요. 바쁘다는 거 다 핑계라니까.”

마 여사의 잔소리에 예령이 맞장구를 쳤다. 졸지에 불효자 취급을 받은 태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홍 여사가 구박을 받는 태조의 앞으로 포슬한 고봉밥을 내어주자 그가 앞에 있는 세경에게 말했다.


“같이 안 먹어?”

“전 아까 먹었어요.”

세경이 태조의 앞으로 반찬을 밀어주었다. 얼른 먹으라는 말에 그가 수저를 들었다.


“앞에 앉아 있어. 금방 먹고 일어날…….”

“세경아, 이쪽으로 좀 오렴.”

“네.”

마 여사의 부름에 즉각 대답한 세경이 몸을 돌렸다. 태조는 저를 두고 가는 세경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람은 많은데 왜 이렇게 외로운 기분이 드는 건지.


“…….”

홀로 식탁에 앉은 태조가 쓸쓸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손엔 짐이 한가득이었다. 마 여사에게 선물 받은 옷과 일주일은 거뜬할 정도의 밑반찬까지.

세경은 태조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마 여사가 준 반찬을 냉장고에 정리해 두었다. 뒤늦게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오자 태블릿을 든 채 일을 하고 있는 태조가 보였다.


“바빠요?”

세경이 그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바쁘면 나 먼저 자고요.”

“서류 몇 개만 확인하면 돼.”

그러니 옆에 앉으라고. 태조가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태조가 세경의 눈가를 톡 건드렸다. 그가 뭘 묻는지 알아챈 세경이 살포시 입술을 늘였다.


“태조 씨 어머니 말이 고마워서요.”

“무슨 말을 하셨는데?”

“혼자 아이를 키운 우리 엄마가 고생했겠다고, 대단하신 분이라고요.”

무릎을 세운 세경이 두 팔로 제 다리를 끌어안았다.


“실은 어머님이 가족에 대해 물어볼 때 걱정했거든요. 예령 언니네 집안은 법조계라면서요? 우리 집은 그런 대단한 배경은 없어서, 태조 씨 집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그거에 실망하실까 봐.”

“…….”

“근데 그 부분은 언급 안 하시고. 엄마가 절 혼자 키우느라 힘들었겠다고, 고생했다 하는데 그냥 속이 울컥거리는 거예요. 예전부터 사람들은 이혼한 엄마랑 아버지가 없는 나를 동정하고 뭔가 흠이 있는 것처럼 봤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편견 없이 오히려 대단하다 해주시니까, 서러움과 고마움이 같이 몰려오면서…….”

“또 울어버린 거야?”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민망한 듯 웃었다.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지는 건 아이를 가져서 그렇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냥 울보 같은데.”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우니까 어머님도 당황하셔서 왜 우냐고 옆에 와서 다독여 주셨어요. 그 와중에 예령 언니는 어머니가 울리셨으니 잘 달래주셔야 한다고 옆에서 막 부추기는데…….”

세경이 조잘조잘 새처럼 종알거렸다. 그 뒤에 퉁퉁 부은 눈을 가라앉히려 어머니가 찜질까지 해주시고, 편하게 자신을 부르게 됐다고 말하는 참.


“그만. 이제 다 알았으니깐 그만 이야기해.”

이러다 형수님도 모자라 어머니에게 세경을 빼앗길 것 같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태조가 세경의 입을 막으며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막 샤워를 한 그녀의 몸에서 달콤한 체향이 느껴졌다.

세경의 눈에 오롯이 자신이 가득찬 걸 보며 그가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

까마귀 깃처럼 캄캄한 밤이었다.

여자는 난간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액정에서 반사된 빛이 여자의 얼굴을 섬뜩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며칠째 같은 내용의 기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윤세경의 임신, 결혼 그리고 그 상대에 관한 것들.


“이렇게 쉬운 거였네.”

여자의 빨간 손톱이 웃고 있는 세경의 얼굴을 톡 건드렸다.

열애설이 터지자마자 결혼에 임신이라니.

이런 상황이라면 일의 전말이야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임신을 빌미로 태조에게 결혼하자 매달렸을 터.


“아이, 아이라고.”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는 연락처에서 번호 하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태조 오빠 결혼한다는 거 진짜야?”

다짜고짜 터져 나온 질문에 전화를 받은 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 ……뭐야. 너 여리야?

“그래. 나야. 벌써 목소리도 잊어버렸어?

- 그건 아니지만. 번호가 다른데? 너 벌써 한국으로 들어온 거야?

“들어온 지가 언젠데. 그보다 대답부터 해. 태조 오빠 결혼하는 거 진짜냐고.”

- 한국 들어왔다며. 그럼 기사 다 봤을 거 아냐. 전 국민이 다 아는 걸 뭘 새삼스럽게.

“그게 진짜라고? 태조 오빠가 윤세경이랑 결혼을 해? 그 여자 임신했다며. 그거 정말 태조 오빠 아이 맞아?”

- 맞으니까 하겠지. 얼마 전엔 마 여사님한테 인사도 하러 온 거 같더라. 아, 너도 본 적 있지? 왜 나 만나러 왔을 때 그때 카페 앞에서 마주쳤잖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카페 앞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여자. 제게 어깨를 치이고 나서도 웃는 낯으로 사과를 하던 미련한 여자였다.


“여리 씨?”

저를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여리가 고개를 들었다. 캡모자를 쓴 스태프가 여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말도 없이 어딜 가셨나 했네요. 이제 슬슬 촬영 들어가셔야 하는데.”

“갈게요. 근데 이거 언제쯤 방송에 나가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여리가 저를 찾아온 스태프에게 물었다.


“앞서 촬영한 건 편집도 마무리되어 가니까. 본격적으로 홍보 띄우면 2-3주 내론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빨리 나왔으면 좋겠네요.”

여리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낮처럼 밝은 조명이 세팅된 곳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거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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