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남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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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남편분?
2023.05.20.
“잠깐 쉬었다 갈게요.”
촬영을 끊었다 간다는 말에 조연출이 앞으로 나와 슬레이트 대신 손뼉을 쳤다. 그제야 카메라 앞을 지키고 있던 감독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벗어났다.
세경은 식사를 하러 가는 스태프들에게 맛있게 먹고 오라 인사를 한 뒤,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계절은 여름이라 주변의 모든 게 싱그러웠다.
석주가 촬영차 지내는 곳은 양양 시골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었다. 집 앞엔 졸졸졸 작은 개울이 흐르고, 눈만 돌리면 나무들로 빼곡한 울창한 산이 보이는.
마을엔 어르신들이 서른 분 정도 사셨는데, 다들 정이 넘치다 보니 잠깐 산책을 나갔는데도 간식으로 먹으라며 찐 감자며 고구마를 안겨주었다.
“배불러.”
세경은 통통하게 부른 배를 두드렸다.
낮부터 대게찜에 수육 등으로 배를 채우고 중간엔 간식으로 고구마도 까먹었다. 그리고 저녁엔 꼬막 비빔밥에 홍합탕으로 알차게 배를 채웠더니, 움직이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세경아, 이거 마셔.”
통화를 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석주가 컵 하나를 세경에게 내밀었다. 살얼음이 낀 호박 식혜에 잣 두 개가 동동 띄워져 있었다.
“오늘 힘드셨죠? 와서 좀 도왔어야 했는데. 정말 먹기만 한 거 같아서 민망하네요.”
“그러라고 부른 건데, 뭐. 점심때 먹은 된장찌개도 맛있었고.”
“정말 그거만 했죠, 저는. 설거지라도 했어야 했는데. 다 선배가 해서.”
“너 설거지시키면 우리가 욕먹어. 그 몸으로 어떻게 저기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해. 근데 못 본 사이 배가 많이 부른 거 같다? 가평에서 봤을 땐 티도 안 났는데.”
“그땐 옷으로도 좀 커버가 됐는데. 언제부턴가 옷으로 가리지 못할 정도로 훅 불러오더라고요.”
세경이 시원한 식혜를 한 모금 머금었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녀는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석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음? 왜? 뭐 할 말 있어?”
“어, 선배는 회사 창립할 때부터 계속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죠?”
“그렇지.”
“그럼 초창기에 있던 사람들도 다 기억하세요?”
“당연히 다 기억하지.”
석주가 고개를 까닥이며 제 몫의 식혜를 마셨다. 세경이 물기가 맺힌 잔을 매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여리 씨도 알아요?”
“엉?”
설마 세경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석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뭐, 알긴 아는데. 그 사람은 왜? 네가 오여리를 어떻게 알고?”
“얼마 전에 만났거든요. 오여리 씨를.”
“만났다고? 어디서?”
“사전 미팅하러 방송국에 갔을 때요. 사실 그전에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고.”
석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여리를 만난 것도 기함할 일인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마주쳤다고?
“만나서 뭐 했는데? 오여리랑 무슨 이야기라도 했어?”
“저는 모른 척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해오더라고요. 태조 오빠는 잘 지내냐고 하면서.”
“아니 걔는 왜 초면에 너한테 그런 걸 묻고 그러냐?”
“기사를 봤나 봐요. 태조 씨랑 결혼할 상대가 저냐고 묻던데요. 저에 대한 짧은 감평도 덧붙이면서.”
식혜를 들이켠 세경이 살얼음을 까득 깨물었다. 석주는 왠지 모를 불안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석주 선배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여리에 대해서? 그거 이따 태조에게 물어보면 안 될까? 걔 지금 오고 있잖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태조 씨한텐 물어보기 싫더라고요.”
“왜? 태조가 솔직히 말 안 해줄까 봐?”
“아뇨. 오여리 씨 입에서 태조 오빠, 태조 오빠 하는 것도 듣기 싫었는데, 반대로 태조 씨 입에서 오여리, 오여리 하는 건 더 듣기 싫을 거 같아서요.”
세경이 입을 삐죽거렸다. 석주가 난감한 듯 뺨을 긁적거렸다.
“그래, 뭐.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해줄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대신 태조 씨한테 말하면 안 돼요. 제가 뒤에서 이런 거 물었다고.”
“질문부터 들어보고.”
“약속부터 해주세요. 태조 씨한테 말 안 하겠다고.”
“알았어. 태조 오기 전에 빨리 이야기부터 해봐.”
석주의 재촉에 세경이 오여리의 말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오여리 씨랑 태조 씨 집안이 오래 알고 지냈다는 게 사실이에요?”
“그런 걸로 알고 있어. 어머니들끼리 꽤 오래전부터 친했다고. 태조 어머니가 어릴 때 여리를 집으로 자주 불러서 돌봐주고 그랬나 봐.”
“오여리 씨가 태조 씨 좋아한 건 맞죠? 저를 적대하는 뉘앙스가 딱 그래 보이던데.”
“음, 여리가 태조를 좋아한 건 맞는데, 태조는 아니었어. 근데 뭐랄까, 그 좋아한다는 표현 방식이 좀 과격하다고 해야 하나?”
석주가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경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질문을 덧붙였다.
“과격하다니? 어떤 면에서요?”
“태조가 싫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았거든. 그러다 관심이 시들해지면 꼭 사고 하나씩을 치더라고. 태조가 나서 수습하도록. 왜 아이가 엄마한테 관심받으려 그러는 것처럼 말이야.”
“아니. 왜 그런 짓을…….”
“윤조 형 말로는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거 같대. 걔가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거든. 그렇다고 가족들이 잘 보살펴 준 것도 아니어서. 그러다 마 여사님이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형이랑은 나이 차가 좀 더 나서 그런가? 그때 태조를 엄청 따랐다고 했어.”
“오여리 씨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응. 다섯 살? 아니, 여섯 살 때라고 했나? 암튼 그즈음이라고 했어. 그거 말고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석주가 몸이 뻐근한 듯 기지개를 켰다. 힐끗 세경을 내려다본 그가 대문 쪽으로 턱을 까닥거렸다.
“저 녀석한테 물어보고.”
세경의 고개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지금 막 도착한 듯, 마당으로 들어온 태조가 세경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양양까지 오느라 밥도 못 먹은 태조를 위해 석주가 순두부 라면을 끓여줬다. 아까 남은 홍합탕 국물에 매운 라면, 거기에 순두부도 반을 잘라 넣으니 제법 그럴싸한 음식이 차려졌다.
“더 먹을래?”
태조가 제 옆에 붙은 세경에게 물었다.
“난 아까 많이 먹었어요. 심 원장님이 오늘 먹은 양을 들으면 놀라 기절할 걸요? 살찐다고 식단 관리하랬는데.”
“서울 돌아간 뒤에 하면 되지.”
“괜찮아요, 정말. 나 저녁도 많이 먹었구…….”
“…….”
“그럼 국물 조금만.”
물끄러미 저를 보는 시선에 세경이 순두부 한 덩이와 빨간 고추기름이 뜬 국물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태조가 식사를 하는 사이, 저녁을 먹으러 갔던 스태프들도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돌아온 신 피디는 평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태조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아, 이분이 세경 씨의…….”
……뭐라고 불러야 하지?
말꼬리를 늘인 신 피디가 태조의 호칭을 고민했다.
결혼설에 임신설도 나오긴 했는데. 이 사람을 세경 씨의 남자친구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결혼한다고 했으니…….
“……남편분?”
“예?”
진 서방이라는 호칭만큼이나 낯선 단어였다.
당황한 세경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라면을 먹고 있던 태조가 먼저 나서 신 피디에게 악수를 청했다.
“네. 진태조입니다. 석주의 소속사 대표이기도 하고요.”
“아, 저는 <우리 집에 놀라 와> 예능 맡고 있는 신희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신 피디님. 석주 데리고 촬영하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휴, 아닙니다. 석주 씨가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서울에서 오시느라 식사를 못 하셨나 봐요. 오시는 거 알았으면 저희가 밥차 음식 좀 챙겨 올걸.”
“괜찮습니다. 석주가 따로 준비해줬는데요.”
태조가 상에 놓인 라면을 눈짓했다. 신 피디는 세경과 태조를 번갈아 보더니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금방 가시는 거죠?”
“네. 이것만 먹고 나면.”
태조의 대답에 슬금슬금 걸음을 옮긴 신 피디가 세경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세경 씨, 잠깐만. 대표님은 계속 식사하고 계세요.”
“네? 어, 저는 왜…….”
세경이 어리둥절해하며 신 피디를 따라갔다. 카메라 뒤로 세경을 데려간 신 피디가 두 손을 모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세경 씨, 우리 딱 1분. 아니 30초 만이라도 좋으니까 두 사람 같이 있는 모습 방송에 내보내면 안 될까요?”
“두 사람이라면…….”
“세경 씨랑 저기 계신 남편분.”
“…….”
조금 전 먹은 라면 국물의 매운맛이 이제 올라오는 건가.
세경은 홧홧하게 열이 오른 뺨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태조 쪽을 쳐다보니 그는 석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경은 다시 신 피디를 바라보았다.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세경 씨, 제발.”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표정을 짓는 신 피디의 부탁에.
“정면은 무리고 뒷모습만이라면요.”
세경은 조건을 붙여 허락했다.
***
“어머, 이게 누구야? 어서 와요. 여리 양.”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오산댁이 여리를 맞이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오산댁과 달리 여리는 무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버지는요?”
“사장님은 아직 안 들어 오셨어. 저녁은? 안 먹었으면 뭐라도 차려 줄까?”
“밥은 됐고. 그냥 물 한 잔만 가져다주세요.”
살갑게 말을 건네는 오산댁을 무시한 채 여리가 걸음을 옮겼다. 안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욕실 앞에 있는 화장대를 훑어보았다.
남자 화장품 사이 이질적인 물건 하나가 끼어 있었다.
여리가 립스틱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누군가 썼던 물건인 듯 마른 장미색의 립스틱은 그 양이 확연히 줄어 있었다.
“쯧.”
불쾌함에 혀를 찬 여리가 손에 쥔 물건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방을 나오자 소파 테이블 위에 오산댁이 준비해 놓은 물과 사과가 보였다.
“여전하네.”
여리는 물컵을 들고 집 안을 서성거렸다.
몇 년이 지나도 이곳은 어릴 때와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집에 없었고, 그녀 혼자 있는 집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이따금씩 오산댁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이 집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전부였다.
사람이 사는데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그래서 여리는 이곳이 싫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락해야 할 곳인데도 불구하고.
툭.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여리가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눈에 쓰러진 액자가 보였다.
자신이 여섯 살 때 죽은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 사진 옆엔 어린 여리가 퉁퉁 부은 얼굴로 엄마에게 매달려 있었다.
또 그 옆에는 자신의 가족과 태조의 가족들이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고.
하지만 행복했던 두 가족의 모습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다음 해, 여리의 모친이 사망하면서 두 가족이 이렇게 모여 사진을 찍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이 집이 삭막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실족사.”
여리가 알고 있던 어머니의 사인은 그거였다.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어 파도가 거칠었던 날.
별장 근처의 바닷가로 나갔던 어머니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고 했다.
구조는 했지만, 물에서 건졌을 때 그녀는 이미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고.
하지만 여리가 모친의 죽음을 알게 된 건, 그녀가 죽고도 반년이 지났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