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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오여리의 기억 (85/100)


85. 오여리의 기억
2023.05.24.


당시 여섯 살이었던 여리가 엄마가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울고불며 여리가 엄마를 찾자, 더는 숨길 수 없었던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죽어서 볼 수 없다고. 그러니 찾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엄마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여리는 며칠 동안 진이 빠지도록 울기만 했다.

내리 우는 여리 때문에 화가 난 오빠 여욱은 자신에게 화를 내며 뭐라 했지만, 여리의 귀에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여리는 몇 날 며칠을 울다 혼절하듯 까라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회사에 나갔고 오빠는 자신과 있기 싫다며 외가 쪽으로 완전히 떠나버린 탓이었다.

그 후, 이 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지만 여리는 늘 혼자였다.

그렇게 외로움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여리의 집으로 마 여사가 찾아왔다. 그녀는 혼자 지내는 여리가 안쓰럽게 보였던지 어린 여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여리야, 당분간 여기에 아줌마랑 같이 있자. 여기엔 윤조랑 태조도 있으니까. 외롭지 않을 거야.’

 
여리를 제 집으로 데려간 마 여사는 그녀를 딸처럼 아껴주었고 두 형제 또한 그녀를 친동생처럼 돌봐주었다.

윤조는 다정했고, 태조는 좀 무뚝뚝한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밀어내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툴툴대며 저를 챙겨주는 태조가 더 좋았다. 다정한 윤조보다 더.

하지만 그렇게 두 형제와 지내는 시간도 오래가지 못했다.

마 여사가 회사에 나가 중책을 맡고, 태조와 윤조도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만나는 시간이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어머니의 기일이 되어 홀로 납골당을 찾았을 때. 여리는 먼저 온 외삼촌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선화만 안 됐어. 그날 애 구한다고 바다에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러니까. 그 집하고 같이 간 거지? 선화 누나랑 친하다고 했던, 그 진 사장네 말이야.’


‘어. 선화랑 진 사장 처가 친했잖아. 그 집 아들이랑 나중에 여리 결혼시킬 거라고 자랑도 했었는데.’


‘자식 크는 것도 보지 못하고 갔으니 안쓰러워 어쩌냐고. 아, 여리는 아직도 제 엄마가 실족해서 죽은 걸로 알지?’


‘그렇지. 처음부터 그렇게 알렸으니까.’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여리는 입을 틀어막은 채 밖으로 내달렸다.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댔다.

엄마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죽은 게 아니었다고 했다. 아이를 구하러 직접 바다에 뛰어들었던 거라고.


“대체 누굴…….”

……살리려고 그랬던 걸까?

여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오래된 기억을 헤집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단편적인 장면은 병상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년, 그리고 바닷가 근처에 서 있던 남자아이뿐.


“태조 오빠…….”

그래, 그 바닷가와 인접한 바위 위에 태조가 있었다. 그 뒤로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었고.


“아.”

뾰족한 칼끝이 머리를 들쑤시는 듯했다.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찌르자 여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각난 기억들이 어지러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참 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는 납골당을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여리는 엄마가 죽은 날의 신문 기사를 훑어보았고 지역 신문에서 그날의 일로 추정되는 짧은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 아이를 구하러 바다에 빠진 여자, 끝내 숨져. ]

여리는 그 기사 하나를 손에 쥐고, 매년 태조의 가족들과 함께 갔던 별장 근처의 바닷가를 찾았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수소문하던 중, 그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아, 기억하지. 그때 사내아이 하나가 죽을 뻔하지 않았나? 구급차에 실려 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아주 혼비백산했지. 그날 애 구한다고 누가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죽었다고 들었는데.’

 
여리의 손에 있던 신문 조각이 힘없이 구겨졌다.

어머니는 실족사가 아닌 사고사였다. 물에 빠진 태조를 구하려다 죽은 거였고, 마 여사는 그걸 알고도 제게 숨긴 거였다.

혼자 남은 제가 안쓰러운 듯 돌봐주는 척하면서.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서울로 돌아온 여리는 마 여사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쉽사리 그 집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다.

제가 아는 사실을 모두 다 털어놓으면, 두 번 다시 이 집에 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거기, 누구?”


“…….”


“오여리?”

 
저렇게 제 이름을 부르는 태조의 목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정말 저 혼자 세상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라,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오빠를 봐왔는지도 모르면서…….”

여리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태조에 대한 애정이 이제는 원망과 분노로 뒤바뀌고 있었다.

제 어미의 목숨을 희생해 살아났으면서, 그는 이제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며 제게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

그녀는 태조의 가족과 찍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 태조를 응시하던 여리가 액자를 그대로 바닥에 집어던졌다.


 
챙!

깨진 유리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주방에 있던 오산댁이 그 소리에 놀라 거실로 튀어나왔다.


“에구머니! 이게 무슨 일이야. 여리 양, 어디 안 다쳤어?”

오산댁이 수선스럽게 여리의 몸을 살폈다.


“난 괜찮으니 이거나 치워요.”

귀찮은 듯 오산댁의 팔을 툭, 쳐낸 여리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

석주가 묵고 있는 시골집에서 빠져나와 사촌의 세컨드 하우스에 도착하는 데도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온 태조는 소파에 앉아 세경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조금 전 석주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경이가 오여리를 만났나 봐. 너한텐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까 나한테 오여리에 대해 물어보더라고. 아무래도 네 결혼 상대가 세경이란 걸 알고 뭐라 한 거 같아. 그러니 둘이 한번 이야기해 봐.’

 
오여리가 회사에 찾아왔을 때, 제게 했던 말을 생각하면 세경에게도 좋은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오빠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이렇게 나 보내면 후회할 거라고.’

 
저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와, 시원해라.”

달칵, 문이 열리고 세경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조의 상념도 거기에서 뚝 끊어졌다.

그는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벅지까지 오는 긴 셔츠를 입은 세경이 머리도 말리지 않고 태조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는 왜 안 말리고?”

“잠깐 밖에 있으면 마를 것 같아서요.”

태조가 진짜 그런 거냐고 묻자, 세경이 그의 눈치를 보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실은……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럼 이쪽으로 와서 앉아 봐. 내가 말려줄게.”

쪼르르 걸어온 세경이 소파에 앉자 태조가 욕실에서 드라이기를 가지고 왔다.

그가 멀티탭을 끌어와 코드를 꽂고 세경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따뜻한 바람과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부드러운 손길에 기분은 금세 노곤노곤해졌다.


“다른 사람 머리 이렇게 말려준 적 있어요?”

“아니. 처음인데.”

“손길이 이렇게 부드러운데요?”

“너한테 해주니까 그런 거겠지.”

고개를 슬쩍 돌린 세경이 태조를 바라보았다.

쪽, 태조가 그녀의 입술을 짧게 훔치고 떨어졌다.


“석주한테 물어봤다며? 오여리에 대해서.”

“…….”

사고 치다 걸린 아이처럼 세경이 입을 삐죽거렸다.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곰 선배가 진짜!


“왜 그걸 석주한테 물어봐?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야지.”

“태조 씨 입에서 그 여자 이름은 듣고 싶지 않아서요.”

“그날 본 거지? 나한테 태조 오빠라고 했던.”

태조가 드라이기를 한쪽에 밀어놓고 세경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몸에 힘을 푼 그녀가 그의 가슴에 등을 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처음엔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화장실에 단둘이 있으니까 나한테 묻더라고요.”

“뭐라고?”

“태조 씨는 잘 지내냐고.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걸 들었다고요.”

세경이 고개를 뒤로 젖혀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왕 들킨 거 다 말하자는 듯 앙금처럼 남아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사람이랑 되게 친했나 봐요? 나한테 막 자랑하던데. 태조 씨네 집안이랑 자기네 집 식구들이 아주 친하다고. 어머니들끼리 두 사람 결혼시킨다는 이야기도 하셨다면서요?”

“다 어릴 때 일이야. 어머니들끼리 친하셨던 것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도.”

“지금은요? 그 사람 회사 초창기 멤버였잖아요. 그럼 그때까지 쭉 연락하고 지냈던 거예요?”

“그건 아니야. 형이 회사 창립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그 애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었어. 자기도 이 회사에 들어오고 싶다고. 형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나중엔 오 사장님까지 와서 사정을 하니까, 형이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인 거야.”

“오 사장님은 누구예요? 오여리 씨 아버지?”

태조가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그럼 오여리는 엄마 친구의 딸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건가?

눈만 든 세경이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지난번 발견한 상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 상처도 오여리 씨 때문에 난 거죠? 송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오여리 씨가 폭력 사건에 휘말려서 연예계 활동을 그만둔 거라고.”

“…….”

“기사가 안 나가게 막은 건, 오여리 씨를 보호하려고 그런 거예요?”

“실제 돈을 쓴 건 오 사장님이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도 힘을 좀 쓰긴 했지. 생긴 지도 얼마 안 된 신생 회사에서 소속 연예인이 술자리 폭력 사건으로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해 봐. 이슈화되기 딱 좋은 사건이잖아.”

태조가 제 이마를 걱정스럽게 매만지는 세경의 손을 잡아 쥐었다.


“사실 나도 형 회사만 아니었으면 다 때려치우고 법적으로 처리했을 거야. 근데 형이 그 일 터지고, 나한테 미안해서 고개도 못 드는 거 보니까 이대로 접는 건 아니다 싶더라고.”

“그래서 태조 씨가 회사 지분 양도받은 거예요?”

“형도 좀 지쳐 보였고 아버지도 누구 하나 회사로 들어오라 하시니까. 그래서 내가 여기 남는다고 했지. 형은 회사로 쫓아버리고.”

회사로 쫓아버리다니. 아무리 봐도 진 엔터보단 JK 푸드 쪽이 더 좋은 자리 같은데.


“음,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태조 씨가 형님 대신 회사를 맡게 된 게 나한텐 더 다행인 일이네요?”

“왜?”

“안 그랬으면 내가 태조 씨를 어떻게 만났겠어요? 그대로 회사를 접었으면 석주 선배도 다른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거고, 나도 다른 데랑 계약했겠죠.”

“또 어떻게 알아? 인연이 있다면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지.”

“그럴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와 만날 일도 없었을 거 같은데.


“이제 더 물어보고 싶은 건 없어?”

그가 세경의 손가락과 손등 그리고 맥이 뛰는 팔목 위에 입술을 눌렀다.

살갗에 닿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 손을 빼려 했지만, 태조가 놓아주지 않았다.


“묻고 싶은 거보단, 태조 씨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떤 거?”

태조의 지긋한 시선이 세경에게 떨어졌다. 세경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당신…… 내 거 맞죠?”

태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세경은 그의 반응에 부끄러운 듯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 거라니. 이게 무슨 아이 같은 소리람? 그냥 좋아한다고, 사랑한다는 말이나 듣고 싶다고 할걸!


“아니, 그냥 지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요. 아까 먹은 호박 식혜에 취했나 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세경이 몸을 바동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내려 했다. 피식 웃은 태조가 제게서 도망치려 하는 세경의 몸을 당겨 안았다.


“가족들 앞에서 날 달라고 했고.”

태조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세경은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지라고 했으니.”

“…….”

“윤세경 게 맞겠지.”

“지금…… 나 놀리는 거 너무 재밌죠?”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지금 태조가 어떤 표정일지 상상이 됐다. 슬그머니 손을 내린 세경이 옆을 돌아보았다.

장난기 섞인 태조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세경의 머리를 감싸 쥔 그가 고개를 내리고 달큼한 입술을 집어 삼켰다.

미지근한 숨이 섞이고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세경은 열에 들뜬 눈으로 태조를 바라보았다.


“…….”

내 거.

내 남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몸을 돌린 세경이 태조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을 찾았다.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태조의 입술을 욕심껏 빨고 깨물었다.

달뜬 숨결 사이, 두 사람의 입맞춤이 더 짙고 농밀해졌다.

별이 빛나는 강원도의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의 밤도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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