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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배우자 진태조 (86/100)


86. 배우자 진태조
2023.05.27.


어제 숙소로 돌아오면서 사 온 스콘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세경은 태조와 함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두 사람이 간 곳은 바다와 인접해 있는 사찰이었다. 플로피 햇을 눌러 쓰고 하늘빛 원피스를 입은 세경은 태조와 팔짱을 끼고 경내를 둘러보았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경은 커다란 두꺼비 석상에 동전도 올려놓고 법당에 들어가 앙꼬가 무사히 태어나게 해달라 기도도 했다.

바다와 이어진 너른 바위에 내려가선 물속에서 파닥거리는 황어 떼도 보았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엔 순산을 기원하는 염주도 하나 구입해 팔에 끼워 넣었다.


“점심은 뭐 먹고 싶어?”

차에 올라탄 태조가 세경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메밀 막국수요. 어제 맛집 찾았을 때부터 계속 먹고 싶었거든요.”

새빨간 양념을 떠올리자 입에 침이 고였다.

그녀는 식당 주소를 찾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안내 음성에 따라 태조가 차를 몰자 세경은 지친 듯 시트에 몸을 기댔다.


“피곤해?”

“조금요. 전보다 몸이 무거워져서 그런가. 잠깐만 걸어도 다리가 금방 붓는 느낌이에요.”

세경이 주먹으로 욱신대는 종아리를 통통 두드렸다. 그때 가방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며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왔다.


“누구?”

“제훈이요. 어제 석주 선배 매니저랑 하룻밤 놀다 간다더니. 지금 서울로 올라가나 봐요. 아, 태조 씨도 알고 있죠? 나한테 만삭 화보 촬영 제안 들어온 거.”

“응. 하려고?”

“고민 중이긴 한데. 찍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태조 씨는 어때요? 싫어요?”

“싫은 건 아니지만. 지금도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괜찮겠어?”

“찍는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최대한 무리 안 되게 진행할 거래요. 많이 찍을 것도 아니고.”

고개를 돌린 세경의 태조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핸들 위로 손을 까닥거리다 입을 열었다.


“하고 싶으면 해. 대신 그날은 사람 한 명 더 붙여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알았어요. 화보 찍고 나면, 우리도 스튜디오 하나 잡아서 같이 찍어요. 첫 아이인데, 아빠랑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야 하잖아요.”

세경이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가볍게 손을 도닥거리자 안쪽에서 통통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

눈을 크게 뜬 세경이 태조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는 그의 눈빛에 세경이 그의 손을 잡아 배 위에 올려 놓았다.

둥둥.


“……!”

작은 북의 진동 같은 것이 손바닥 아래서 느껴지자 태조의 입술이 무름하게 풀어졌다.


“이제 발길질도 하네.”

마치 태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세경의 배가 또 한 번 진동하고 있었다.


 

***

수평선에 걸린 붉은 태양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파도를 따라 열기 묻은 바람이 불어오자, 세경이 한쪽 팔을 벌리고 바다 냄새를 흠뻑 들이마셨다.


“와, 좋다.”

세경이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강릉 카페 거리에서 디저트를 먹고, 속초 시장을 잠깐 둘러본 뒤 두 사람은 숙소 근처에 있는 해변가를 찾아온 참이었다.

날이 저물자 서퍼들이 점령했던 바닷가엔 산책하러 나온 가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경도 그들 틈에 끼어 태조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내일 가려니까 아쉽네요.”

푹푹, 빠지는 발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모래가 흘러 들어왔다.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에 세경이 살짝 비틀거리자 태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아쉬우면 며칠 더 있다 갈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야. 우현이가 좀 고생하겠지만.”

세경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낮에 카페에 있을 때 강 상무에게 전화가 왔었다.

낮에 석주가 우현을 좀 놀린 모양이었다. 세경에게 해줬던 음식과 평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는 태조의 등짝까지 찍어 보내곤 아주 재밌었다 자랑을 했었다고.

그리고 그걸 본 강 상무는 태조에게 전화해 한탄을 쏟아냈다. 너네는 강원도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데이트도 하는데 왜 나는 쓸쓸히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거냐면서.


“그러다 강 상무님한테 원망 들어요.”

“하라고 그러지. 휴가 준대도 안 간대잖아.”

“휴가 때문에 그런 거겠어요? 강 상무님도 친구들이랑 같이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그런……. 어, 어머!”

모래사장 위를 뛰어다니던 남자아이가 그대로 고꾸라지자 세경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일으켜주었다. 모래가 묻은 얼굴을 툭툭 털어주자, 울먹거리던 아이가 세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배.”

“응?”

저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이의 손가락이 볼록 솟은 세경의 배를 가리켰다.


“우리 엄마랑 똑같애. 배 나온 거.”

“아아, 엄마가 아이를 가졌나 보구나.”

“응. 내 동생! 엄마 배 속에 있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아이가 자랑하듯 말했다.

그 애가 뒤를 휙 돌아보자, 세경도 아이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세경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가 잠깐 와이프랑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이 녀석이 갑자기 달려가 버려서.”

세경에게 인사를 한 남자가 아들의 정수리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라며 꾸벅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아니에요. 그보다 아이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세경이 제게 다가온 태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들을 제 옆에 찰싹 붙여 놓은 남자가 세경을 알아보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윤세경 씨…… 맞으시죠? 여기로 여행 오셨나 봐요? 혹시 이 근처에 묵으시나요?”

“네. 아는 분 집에 잠깐.”

“아, 그럼 내일 시간 되시면 요기 앞에 있는 카페로 오세요. 제가 커피 아니, 주스라도 한 잔 대접할게요. 옆에 계신 남편분도 같이요.”

넉살 좋게 말을 건넨 남자가 아들과 함께 돌아섰다. 아이는 세경에게 손을 흔들곤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저 누나 알아?”

“쉿쉿, 아들 목소리가 너무 크다.”

아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남자가 민망한 듯 돌아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이 왠지 다정하고 따뜻해 보여 세경이 웃었다.


“들었어요? 남편분이래. 어제 신 피디님도 그렇게 부르더니.”

“다른 사람들 눈엔 다 그렇게 보이겠지. 그래서 말인데…….”

태조가 잠시 뒷말을 삼켰다. 세경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고, 바닷바람에 밀린 얇은 옷자락이 세경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태조가 입을 열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우리, 혼인 신고부터 하자.”

 

 

***

세경은 새로 발급한 서류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강원도에서 돌아온 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바쁜 와중에도 태조는 세경과 함께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를 마쳤다. 그 덕에 가족관계증명서엔 새로운 칸이 하나 더 늘어났다.

배우자 진태조.

진짜 두 사람이 법적인 부부가 된 거였다.

유나는 혼인 신고를 하면 뭔가 결혼했다는 실감이 날 거라곤 했는데, 그게 이걸 말하는 걸까?

서류상 이름 하나가 추가된 것뿐인데 기분이 묘했다. 태조가 국가에서 공인해 준 내 남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세경은 저도 모르게 풀어지는 입술을 단속하며 서랍 속에 가족관계 증명서를 집어넣었다.

드레스룸으로 향한 그녀는 옷장을 뒤적거렸다. 오후에 심 원장과 예령을 만나기로 한 터였다.


“시간이 좀 많이 남았는데.”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덕에,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그녀는 티브이부터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중 화면에 오여리가 나타나자 세경의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현재 출연 중인 그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인 듯했다.

세경은 채널을 고정한 채 주방으로 향했다. 서랍에서 루이보스 티백 하나를 꺼내고 뜨거운 물을 끓여 차를 우렸다.


“당분간 마주칠 기회도 없을 거 같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세경이 호록, 차를 마셨다.

오여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던 날, 태조는 웬만하면 그녀와 마주치지 말라고 하였다.

무슨 사고를 칠지, 자신도 예측할 수 없으니 되도록 같이 있게 되면 그냥 무시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라고.

하지만 그의 충고가 무색하게 세경은 여리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애초에 활동하는 분야가 달랐고, 지금 세경은 태교를 하느라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날 이후로 회사에 찾아오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다시 차를 마신 세경이 또르르 눈을 굴렸다.

태조가 양양에 오던 날, 오여리가 회사에 찾아왔다고 했다. 1층에서 태조를 만나겠다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보안팀 직원과 송 실장님이 아주 진땀을 뺐다고.

태조는 오여리가 자신의 늘어난 스케줄을 관리해줄 회사를 찾는다고 하였다. 당연히 태조는 그녀와 계약할 생각이 없다며 돌려보냈지만.

다만, 한 가지 이상한 건 오여리가 예상과 달리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제 어깨를 치고 지나간 사람이었다. 두 번째 마주쳤을 땐 제게 악담을 퍼부었고.

아마, 그날 신 피디가 중간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

그때 화장실에서 저를 노려보던 오여리의 눈빛이 떠올라 세경이 제 배를 매만졌다. 불안한 엄마의 감정이 전해진 듯 아이는 제가 여기 있다며 통통,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응. 괜찮아. 걱정 안 해 엄마는.”

어차피 지금 같은 상황이면 앙꼬를 낳을 때까지 오여리를 만날 일은 없을 거였다. 물론 오여리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 나중에 한번 만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뭐, 이제 와 어쩌겠나. 이미 자신과 태조는 혼인 신고도 했고 아이도 있는데.

세경은 머그컵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자, 화면이 바뀌며 오여리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담당 피디가 그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냐고 묻고 있었다.


- 왜 없겠어요. 당연히 있지.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사실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고. 어릴 때부터 쭉 그 사람만 봤거든요. 근데 공부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했어요.

- 어릴 때부터? 오여리 씨, 의외로 순정파네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렇게 오래 좋아한 거예요?

- 내가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때부터 쭉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는 당연히 그 사람이 나랑 결혼할 줄 알았어요. 얼마나 날 아껴줬는데. 게다가 우리 엄마가 나한테 늘 그랬거든요. 나중에 그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다고. 근데 그건 나 혼자만의 바람이었나 봐요.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 소식이 없길래, 이번에 그 사람한테 결혼하자고 말해보려 했더니……. 이번에 기사 났더라고요. 그 사람이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한다고.

- 기사요? 기사가 날 정도면 우리가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 유명한 건 여자 쪽이에요.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요? 최근에 되게 핫하게 기사가 나서. 그 여자분이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거든.

세경이 인상을 썼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뿐, 그녀는 누가 봐도 세경을 언급하고 있었다.

세경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 창을 띄웠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같이 한두 개씩 올라오는 오여리의 기사가 지금도 메인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게 뭐야?”

세경은 제 이름과 함께 걸린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 윤세경,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파혼 위기?!

세경의 입에서 착잡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기사엔 방금 본 오여리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에 더해 오여리가 말한 사람이 최근 결혼과 임신설로 떠들썩했던 윤세경이라고 못을 박아두기도 했고.

그리고 기사 중반엔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

진 엔터 소속사 앞에 세워진 빨간색 페라리와 태조의 팔에 매달려 있는 오여리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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