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아기 신발
(87/100)
87. 아기 신발
(87/100)
87. 아기 신발
2023.05.31.
“아우 씨. 누가 또 그때 사진을 찍어가지고!”
기사를 본 우현이 짜증을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쩐지 요 근래 미친 망아지가 잠잠하다 싶더니 기어이 사고를 치고 있었다.
“인터뷰한 것도 어이가 없어서. 뭐? 공부? 사고 치고 도피한 걸 또 이렇게 포장하네.”
우현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구시렁거렸다. 한동안 떠들썩했던 세경의 기사가 이제 좀 가라앉나 싶었는데, 오여리 때문에 다시 불이 지펴지고 있었다.
게다가 결혼식도 아직인데 파혼이라니. 대체 어떤 덜떨어진 놈이 이런 기사를!
“아……, 망할 최오수 기자.”
기사 말미에 적힌 기자의 이름을 확인한 우현이 이를 빠득 갈았다. 역시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세경 씨한테 연락은 했어? 기사 보고 이상한 오해하는 건 아니지?”
우현이 태조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오여리의 기사 따윈 안중에도 없는지 결재할 서류만 보고 있었다.
“아까 했어. 오늘 형수님이랑 만난다고 했거든. 기사는 본 거 같은데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고.”
“이제 혼인신고도 했다 이건가? 아, 세경 씨도 오여리를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어. 석주 프로그램 사전 미팅할 때. 방송국에서 만났대.”
“미치겠다. 어떻게 또 그렇게 만나냐. 그럼 세경 씨도 알고 있겠네. 오여리가 어떤 타입인지.”
“나랑 석주한테 들었던 말도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리 쪽도 대응을…….”
그때 우현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그가 살짝 인상을 쓰곤 전화를 받았다.
“예. 장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아, 세경 씨 기사 난 거요? 에이, 그런 거 아닙니다. 결혼설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파혼이에요. 그건 오여리 씨 쪽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세경 씨는 진 대표랑 잘 지내고 있어요. 얼마 전엔 혼인신고도 했는데. 예? 아, 그래요?”
통화를 하던 우현이 태조를 돌아보았다. ‘왜?’라고 입으로 묻자 우현이 핸드폰을 잠시 떼고 태조에게 말했다.
“세경 씨가 SNS에 글을 남겼나 봐. 장 기자님이 그거랑 너희 혼인신고 한 거 기사로 내도 되냐고 물으시는데?”
태조가 잠깐 기다리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세경의 SNS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와 있었다. 강원도 여행 갔을 때의 사진과 커플링을 낀 두 사람의 손. 그리고 석주가 양양 촬영장에서 찍어 보낸 두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기사로 내도 된다고 해.”
태조의 승낙이 떨어지자 우현이 장 기자에게 기사를 잘 써달라 부탁했다. 통화를 마친 그는 대체 무슨 사진이 올라온 거냐며 태조가 보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음? 이건 세경 씨가 직접 올린 거야? 원래 세경 씨 공식 SNS는 회사에서 관리하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회사에서 올린 것 같진 않네. 사진도 다 세경 씨 핸드폰에 있는 거고.”
우현이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보자며 송 실장을 호출했다. 세경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송 실장이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아, 그 사진이요? 아까 세경 씨한테 연락이 왔었어요. 자기도 기사 봤다고. 본인이 직접 해명할 겸 SNS에 사진이랑 글을 올리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진짜 세경 씨가 올린 거였어요? 난 또 장 기자님한테 듣고 무슨 말인가 했더니.”
우현이 태블릿에 세경의 SNS를 띄워놓고 송 실장에게 물었다.
“다른 기자들한텐 전화 안 왔어요?”
“왔었죠. 메일도 많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그냥 SNS만 보고 기사를 쓰는 거 같아요. 강원도에서 대표님이랑 세경 씨를 본 사람이 꽤 있는지, 댓글로 목격담이 꽤 올라 오더라구요.”
송 실장이 보고를 하다 태조를 쳐다보았다. 뭔가를 궁금해하는 눈빛에 태조가 왜 그러냐는 듯 눈을 살짝 들썩거렸다.
“왜요? 뭐 할 말이라도?”
“아뇨, 그냥……. 목격담을 보니 즐겁게 여행하신 거 같아서.”
송 실장이 생긋 웃었다. 올라오는 목격담마다 어찌나 두 사람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고 하던지.
“좋았죠. 더 있다 올까 싶었지만 강 상무가 징징대서 그러진 못했고.”
“야, 내가 언제 징징댔다고.”
우현이 입을 삐죽거렸다. 송 실장이 웃음을 참으려 안쪽으로 입술을 말아물었다.
“아무튼 송 실장님이 당분간 수고 좀 해주세요. 올해 스케줄은 화보 촬영이 마지막일 것 같으니.”
“네. 걱정 마세요.”
고개를 끄덕인 송 실장이 주먹을 불끈 말아쥐었다.
***
세경은 얇은 불고기를 냉면에 싸서 입에 넣었다. 육수를 한 수저 떠먹은 그녀는 사이드 메뉴로 나온 만두도 집어 야무지게 우물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언니는 그때부터 눈치를 챘단 말이에요? 내가 세경 씨를 갤러리에 데려갔을 때?”
젓가락을 움켜쥔 심 원장이 배신감이 느껴진다는 얼굴로 예령을 쳐다보았다.
세경의 결혼설 기사가 난 뒤 아이 아빠가 태조란 걸 알게 된 심 원장과 달리, 예령은 그 전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챘다고 하였다.
“눈치는 챘는데, 너 때문에 내가 좀 혼란스러웠지. 네가 그랬잖아. 왜 세경 씨랑 도련님이랑 엮냐고. 세경 씨는 이미 애인 있다면서.”
“하, 누가 알았겠냐고요. 세경 씨랑 진태조가 사귀고 있을 줄.”
“왜 몰라? 도련님이 직접 세경 씨 데리고 병원에도 왔다며.”
“그거야 세경 씨가 임신을 했으니 밖에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걔가 조용히 데리고 오는 건 줄 알았죠.”
입을 뚱하게 내민 심 원장이 투덜거렸다. 진작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면 자신에게 귀띔이라도 해주지 아무 말도 안 해줬다면서.
“나 눈치 되게 빠른 줄 알았는데.”
“완전 허당이었네.”
예령이 심 원장을 놀리며 쿡쿡 웃었다. 빈 그릇을 달그락 대던 심 원장이 세경을 돌아보았다.
“세경 씨, 진 대표랑 여행 갔다 왔다면서요. 어땠어요?”
“좋았어요. 오랜만에 바다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부럽다. 나도 애인이랑 여행 가고 싶은데.”
심 원장이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령은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가면 되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말이 쉽죠. 병원 비우고 어떻게 가요. 오늘도 봐. 나만 먼저 들어가야 하잖아.”
심 원장이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진료 예약이 잡혀 있어, 식사를 마치면 그녀는 곧장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언니랑 세경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어디 들렀다 가요?”
“나온 김에 쇼핑 좀 하고 가려고. 세경 씨도 별일 없음 나랑 같이 백화점에나 가자. 몸 더 무거워지기 전에 아이 용품도 좀 사 놔야지.”
“그렇긴 하네요. 세경 씨 아직 출산 가방 준비 안 해놨죠?”
“네. 인터넷 검색하면서 필요한 걸 적어놓긴 했는데, 아직 부족한 거 같아서 더 찾아보고 있어요.”
“내가 리스트 하나 보내줄게요. 병원에서 주는 거긴 한데, 그것만 챙겨 와도 부족한 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없는 건 나중에 진 대표한테 사오라고 하면 되지.”
심 원장이 시간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더 있다간 오후 진료 시간에 늦을 터였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세경은 미리 챙겨둔 빌지를 들고 룸을 나섰다. 뒤쫓아 오는 예령을 돌아보며 세경이 카운터에서 카드를 내밀었다.
“세경 씨가 돈 안 내도 되는데.”
“제가 사게 해주세요. 매번 얻어먹는 것도 미안해서 그래요.”
배시시 웃은 세경이 사인을 마치고 직원에게 카드를 받았다.
식당을 나온 심 원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 먼저 갈게요. 다음에 또 봐요, 언니. 세경 씨는 다음 진료 때 보구요.”
“네. 들어가세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세경의 인사를 받은 심 원장이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예령은 심 원장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세경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세경 씨 걷는 게 힘들면 쇼퍼 룸으로 물건을 가져다 달라 해도 되는데.”
“저는 소화도 시킬 겸 좀 걷고 싶은데요.”
“그럼 바로 매장으로 가요. 중간에 다리가 아프다 싶으면 바로 말하고. 룸에서 쉬면 되니까.”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령은 곧장 차를 몰고 근처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유아용품 매장에 들어서자 작고 앙증맞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작아…….”
정말 이런 게 사람 발에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아기 신발은 작디작았다.
세경은 손바닥에 아기 신발을 올려놓고 예령을 쳐다보았다. 노란색 신발을 손에 쥔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애틋하면서도 슬퍼 보였다.
“예령 언니.”
세경이 예령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몸을 움찔한 예령은 언제 우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활짝 웃었다.
“이거 어때요? 나중에 아이한테 신기면 병아리처럼 귀여울 것 같은데.”
예령이 세경을 보며 손에 든 신발을 흔들었다.
“그러네요.”
세경이 웃으며 동의했다. 예령이 선물로 사주겠다며 신발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여, 세경의 입안이 덩달아 써졌다.
***
“예령 언니네는……, 아직 아이가 없죠?”
쿠션 하나를 끌어안은 세경이 태조에게 물었다. 소파 테이블엔 예령이 선물로 사준 아기 신발이 놓여 있었다.
“갑자기 그건 왜?”
태조가 아기 신발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작은 신발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 아까 같이 쇼핑하는데 예령 언니가 이 신발을 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뭐랄까. 그 시선이 굉장히 슬퍼 보였달까, 애틋해 보였달까. 아무튼 좀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집으로 돌아온 후, 신발을 보고 있는데 아까 전 보았던 예령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령에게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태조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본 적이 없었고.
“형수님 표정이 그랬어?”
“네.”
세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조가 말을 해도 되나 잠시 고민을 하더니 세경의 옆에 앉았다.
“일부러 안 가진 건 아니고.”
“…….”
“2년 전에 유산이 됐어. 한동안 그 일로 많이 힘들어 했고.”
“아, 그래서…….”
세경이 나직이 탄식했다. 난임인가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유산의 아픔이 있었다니.
항상 밝게 웃던 예령이 그런 슬픔을 겪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예령도 그런 쪽으론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고.
민감한 이야기라 따로 묻지 않았지만 예령도 정기적으로 심 원장의 병원을 찾는 거 같았는데. 그건 아이를 가지려고 그랬던 걸까.
“예령 언니도 빨리 가졌으면 좋겠네요. 아이 바라는 거 같던데.”
“곧 가지겠지. 두 사람 다 건강하니까.”
태조가 우울해하지 말라는 듯 세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세경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내 SNS 봤어요? 내가 사진 올린 거요.”
“봤어. 송 실장님한테 이야기도 들었고.”
“거기에 우리 바닷가에서 본 아이 아버지도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여행 왔을 때 산책 나온 두 사람을 봤다고. 기사 난 건 신경 쓰지 말라면서요.”
“우현이도 걱정하던데? 기사 보고 네가 오해하면 어쩌냐고.”
“기사 보고 좀 욱하긴 했는데 오해는 안 해요. 오여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주희의 일로 언론에 몇 번 시달린 덕분일까. 이 정도의 일은 내성이 생긴 건지 불쾌하긴 해도 넘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참, 나 오늘 잡지사에서 화보 촬영 콘티 사진을 받았는데. 한번 볼래요?”
태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경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그가 종이를 넘겨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촬영을 수영장에서 한다고?”
“네. 호텔 수영장을 하루 대관한 모양이에요. 스튜디오 촬영보다는 이게 더 색달라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바닥에 물기가 있어서 미끄러울 텐데. 조심해. 넘어지지 않게.”
“걱정 말아요. 조심할 테니까.”
태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세경이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