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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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통증
2023.06.07.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마 여사가 걸음을 재촉했다. 예령도 그녀를 따라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VIP 병동으로 향한 두 사람은 벽에 걸린 세경의 이름을 확인하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
가습기 소리만 들려오는 병실 안은 불길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 여사는 예령의 손을 잡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힘이 들어간 손바닥이 긴장으로 축축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세경을 보고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태조야.”
아들을 부르자,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세경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태조의 입에서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 여사는 예령과 함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링거를 맞고 있는 세경의 낯빛이 창백했다. 차마 손을 대는 것조차 겁이 나는 듯, 세경의 몸을 눈으로 훑던 마 여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내가 네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밖에서 이야기해요. 세경 씨 조금 전에 겨우 잠든 거라.”
마 여사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태조는 세경의 손을 이불 안으로 밀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병실 문을 닫은 태조가 문가에 기대 안쪽을 바라보자, 조급해진 마 여사가 아들을 채근했다.
“이제 말해 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세경이가 왜 병원에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피까지 흘렸다면서요. 지금 상태는 어떻대요? 아이는 괜찮은 거예요?”
예령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급히 질문을 쏟아냈다. 태조는 문에 난 유리창으로 세경을 쳐다보았다.
“상황을 좀 보자고 하시네요. 검사 결과 아직 태아한텐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피가 멈추지 않는다고. 게다가 아까부터 열이 오르는 데다 세경이가 계속 배가 아프다고 해서요.”
“어쩌다 이런 거야? 여태껏 아무 일도 없었잖아.”
“오늘 화보 촬영이 하나 있었어요. 촬영 장소가 호텔 수영장이었는데 거기에 빠져서…….”
“뭐? 수영장에 빠져? 왜? 발이라도 미끄러진 거니?”
“그, 그게 아니에요!”
낯선 목소리가 불시에 끼어들었다. 마 여사가 인상을 쓴 채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을 울었는지 눈가가 빨개진 남자와 젊은 여자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누구?”
마 여사가 태조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저희 회사 직원입니다. 송지화 실장이랑 세경 씨 매니저.”
“세경이 매니저?”
마 여사의 시선이 제훈에게 향했다. 대화 중 끼어든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매니저가 뭔가 알고 있다는 뜻일 터. 마 여사가 제훈에게 물었다.
“방금 무슨 말이었어요? 그게 아니라니?”
“세경이 누나, 미끄러진 거 아니에요. 제가 봤어요. 오여리, 그 사람이 누나 일부러 빠트린 거라구요!”
제훈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이 들려오자, 마 여사의 눈이 가늘게 늘어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누가 세경이를 빠트렸다고? 오여리?”
마 여사가 충격에 찬 눈으로 태조를 쳐다보았다.
왜 세경이가 다쳤는데 오여리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저 말이 사실이니?”
“세경 씨 촬영 장소에 여리가 있었던 건 맞아요.”
마 여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임 여사에게 오여리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세경이와 같은 곳에 있었다고. 그러다 세경이를 수영장에 빠트렸고?
“허, 이게 무슨…….”
머리가 아픈 듯 마 여사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태조를 쳐다보았다. 불현듯 아들의 머리가 찢어져 병원 응급실을 찾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오여리가 옆에 있었다. 그 애는 대체 무슨 연유로 태조도 모자라 세경이까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건가.
“방금 그 말, 모두 다 사실이에요?”
마 여사가 확인하듯 신 매니저에게 물었다.
“네. 그 사람이 세경이 누나 팔도 막 잡아당겼어요. 제가 가서 그 여자를 떼어내려고 했는데, 누나가 갑자기 물에 빠져서…….”
자신이 옆에 있었다면 세경이 물에 빠지진 않았을 텐데.
말끝을 우물거린 신 매니저가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옆에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그럼 아까 언뜻 봤던 그 멍자국이…….”
예령은 조금 전 태조가 이불 속으로 밀어넣던 세경의 팔을 기억해냈다. 하얀 피부에 푸릇한 빛이 올라와 있어 어딘가에 부딪쳤나 싶었는데, 그게 설마 오여리에게 잡혀 그랬던 거였나.
“세경이는 저렇게 누워 있는데.”
“…….”
“여리, 그 애는 어디 있니?”
마 여사가 싸늘해진 눈으로 태조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도 수영장에서 보고 그 이후는…….”
“제가 거기 촬영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물어봤는데요.”
그건 제가 알아봤다는 듯 송 실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희가 세경 씨 데리고 병원에 이동하는 사이 촬영장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 그대로 도망갔다고?”
“예.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여리 씨 소재를 알아보려면, 그쪽 소속사에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전에 A&J 엔터 대표와 같이 오는 걸 봤거든요.”
송 실장이 마 여사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마 여사가 태조에게 물었다.
“너, 세경이 어머니껜 연락드렸니?”
“네. 바로 서울로 올라오신다고 하셨어요.”
“많이 놀라셨겠네. 그럼 태조 넌 들어가서 세경이 좀 보고 있으렴. 아직 상태가 불안한 것 같으니 옆에 있어야지.”
마 여사가 어서 세경의 곁으로 가보라며 아들의 등을 두드렸다. 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마 여사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예령아, 여리가 다시 외국으로 나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구나.”
“…….”
“내가 그 애한테 들어야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말이지.”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제가 바로 조치할게요.”
시모의 마음을 기민하게 알아챈 예령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숨을 쉰 마 여사가 송 실장을 쳐다보았다.
“송지화 실장이라고 했죠? 내가 부탁 하나만 할까 하는데.”
“네. 말씀하세요.”
“아까 말한 오여리 소속사에 전화해서, 그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주겠어요?”
“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송 실장이 옆에서 울고 있는 신 매니저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두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떠나자, 마 여사가 유리창 사이로 병실 안을 살폈다.
세경의 손을 잡아 뺨에 댄 태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 여사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나예요, 오 사장. 여리 일로 할 말이 있는데.”
마 여사가 비상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실 앞을 떠나는 마 여사의 구둣소리가 날카롭게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
드륵!
문을 연 정란이 다급하게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무슨 정신으로 이곳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VIP 병동으로 올라온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딸을 보곤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세경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태조가 정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침대 옆으로 다가간 그녀는 잠이 든 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왜 이렇게 얼굴이 뜨거워.”
손등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정란이 속상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듯 세경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엄……마…….”
바싹 마른 목소리가 세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란은 그 작은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그래. 엄마 여기 있어.”
“엄마……. 나 배가 너무 아픈데…….”
세경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정란은 제가 더 울 것 같아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아이……. 우리 앙꼬는…….”
“괜찮아. 우리 귀여운 손주 잘 버티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말고.”
정란이 세경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듯 세경은 그 몇 마디를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정란은 세경의 입에서 고른 숨이 쏟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태조를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세경이는? 아이 상태는 어떻고?”
“검사 했을 땐 아직 큰 문제는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피가 멈추지 않는 게 걱정이라고. 그 부분은 좀 더 지켜보자고 하십니다.”
“혹시 태반이 떨어지거나 한 건…….”
“나중에 다시 검사를 해보겠지만, 처음 검사했을 때 그런 말은 없으셨어요.”
정란이 그나마 한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조가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옆에서 잘 돌보겠다고 했는데.”
“그걸 왜 진 서방이 사과해.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세경인 어쩌다 수영장에 빠진 거고?”
“신 매니저 말로는 제가 아는 사람이 세경 씨를 밀었다고 합니다.”
“진 서방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
“오여리라고, 예전부터 저희 집안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세경일 왜……. 혹시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야?”
“그건 아닙니다.”
태조가 단호히 대답했다. 정란이 태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경이 하혈을 한 걸 직접 봤으니 저보다 더 놀랐을 거였다. 그래서일까, 태조의 얼굴도 많이 지쳐 보였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식사는?”
“낮에 먹었습니다.”
“지금 저녁 먹을 땐데.”
정란이 시계를 한번 쳐다보곤 힘없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머님은…….”
“난 너무 놀라서 그런가 지금은 생각이 없네. 내가 세경이 옆에 있을 테니까, 가서 뭐라도 먹고 와요.”
“…….”
태조가 대답 없이 세경을 내려다보았다. 아픈 그녀를 두고 가자니, 영 발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밤새 여기 있을 거 아니야? 그럼 바깥에서 뭐라도 먹고 와.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할 테니까.”
정란이 잠깐 쉬고 오라며 태조의 팔을 두드렸다. 그가 잠깐의 침묵 후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병실을 나선 태조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정란이 의자에 앉아 세경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보였다.
한숨을 쉰 그가 몸을 돌리자,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세경이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강 상무와 유나였다.
“대표님, 세경이는…….”
“자고 있어요. 들어가 봐요. 지금 세경 씨 어머니도 오셨으니까.”
유나가 울먹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크한 유나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태조가 우현을 돌아보았다.
“세경 씬 어때?”
“계속 자다 깨다 해. 열도 있고, 피는 아직 완전히 멈추지 않았고.”
“큰 문제는 없는 거지?”
“그건 조금 지켜봐야 알 것 같아. 당분간 입원해서 상태는 보자고 하더라.”
“와씨, 이게 무슨 일인지.”
강 상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오여리 그게 무슨 일을 칠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임신한 사람을 물속에 빠트릴 수가 있지?
“근데 넌 어디 가려고?”
“그냥 잠깐 밖에.”
“나가지 마. 지금 병원 앞에 기자들 깔렸어. 세경 씨 촬영하다 사고 난 거 기사 떴거든.”
태조가 피곤에 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핸드폰.”
“네 건 어쩌고?”
“먹통이야. 아까 수영장에 들어갔더니.”
“요즘 핸드폰은 다 방수가 된다더니.”
우현이 투덜대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태조가 인터넷 창을 열어 세경의 기사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여기, 연락해서 기사 내리라고 해. 제대로 된 확인 없이 기사 올리면 바로 법적 조치 들어간다고 하고.”
우현이 태조가 주는 핸드폰을 다시 받아들었다.
사고로 병원에 있다는 세경의 기사 중 몇몇에 그녀가 유산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기레기들이 진짜. 기사만 내보내면 단 줄 아나.”
우현이 곧장 회사 법무팀에 연락했다. 그리고 지금 올라온 세경의 기사들을 체크해 유산과 관련된 내용들은 모두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석주도 지금 소식 듣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중이래. 내가 핸드폰 하나 사올까? 아, 유심이 망가져서 안 되려나?”
“일단 하나 사와 봐. 세경 씨 어머님이 드실 만한 것도 좀 사오고.”
고개를 끄덕인 우현이 자리를 뜨자 태조가 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아.”
한숨을 쉬는 태조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