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가지 마, 아가. (90/100)


90. 가지 마, 아가.
2023.06.10.


태조가 송 실장의 연락을 받은 건 외부 미팅 장소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대표님, 오늘 세경 씨 촬영하는 곳에 오여리 씨가 와 있어요. 촬영 팀이 달라서 세경 씨랑 붙어 있거나 하는 건 아닌데, 전에 회사에 찾아온 것도 그렇고 오여리 씨 인터뷰한 내용도 마음에 걸려서요.’

 
핸드폰 너머 들려오는 송 실장의 목소리에 근심이 가득했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오여리의 촬영은 윗선의 지시에 따라 급작스럽게 잡힌 거라고.

오 사장이 딸을 위해 힘을 쓴 걸까?

하필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촬영을 하다니.

송 실장과 신 매니저가 같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불안했다. 지난번 회사에 찾아왔을 때 봤던 오여리의 표정이 생각나 더 그랬다.


‘일단 송 실장님이 옆에서 잘 지켜봐 주세요. 되도록 두 사람이 마주치지 않게 하고. 저도 미팅 끝나는 대로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태조는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한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게 바로 알리라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팅이 끝날 때까지 송 실장에게선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대신 촬영이 순항 중이라는 걸 알려주듯 송 실장은 간간이 세경의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연분홍빛 시폰 원피스에 화관을 쓴 세경의 모습은 명화의 한 장면처럼 어여뻤다.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리고 활짝 웃고 있는 얼굴에선 아이를 가진 설렘까지 느껴졌다.

오후 촬영이 남아 있다는 말에 태조는 미팅을 마치자마자 곧장 세경이 있는 호텔로 차를 몰았다.

같은 건물에 있는 데도 왠지 모를 초조함이 신경을 갉아 먹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송 실장에게 세경의 위치를 물었다.

세경은 옥상 수영장에 있다고 했다. 오여리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그녀 또한 불안했던지 빨리 촬영을 마치고 싶어 했다고.

호텔 최상층으로 올라간 그는 수영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복도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송 실장과 마주쳤다.


‘세경 씨는요?’


‘안에 신 매니저랑 같이 있어요.’

 
태조는 통화를 마친 송 실장과 수영장 입구에 들어섰다. 세경의 목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온 건, 그늘진 복도를 지나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꺄악! 세경 씨!’

 
저 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된 양, 태조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태조의 눈에 들어온 건 물에 빠지는 세경의 모습이었다.


‘대표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경의 몸이 물 밑으로 가라앉자 그는 지체 없이 풀 안으로 몸을 던졌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세경은 배를 끌어안은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세경의 곁으로 다가간 그는 단숨에 그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품에 안긴 몸이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리고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 짓씹은 입술에선 피가 흘렀고, 태조의 셔츠를 움켜쥔 세경의 손은 뼈마디가 볼가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윤세경. 윤세경, 나 좀 봐 봐.’

 
태조의 부름에도 세경은 좀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수건을 덮은 세경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몸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느낌은 끔찍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태조 씨…….’

 
어렵사리 눈을 뜬 그녀가 제 이름을 불렀을 때, 태조는 속으로 안도했다. 하지만 다시 배가 아프다며 제 품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심장이 바닥으로 내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누군가 세경이 피를 흘리고 있다고 말했던 순간.

다리 사이로 길게 이어진 선혈이 눈에 들어왔을 때, 태조는 제 몸의 피도 그대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뒤엔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송 실장이 다급히 옆에서 무언가를 말했고, 태조는 세경을 안고 호텔을 나섰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세경의 옷은 어느새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를 내리 안고 온 태조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제 옷을 축축하게 적신 피의 흔적이 마치 생명이 빠져나간 흔적 같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태조는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세경이도 우리 아이도.

마른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린 태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투명한 잔에 담긴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여리가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때마침 흘러나온 연예 뉴스 프로그램에서 세경의 사고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낮, 서울 모처의 수영장에서 촬영 중이던 윤세경 씨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장 스태프들의 말로는 윤세경 씨가 피를 흘려 가까운 대학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요. 현재 임신 중인 윤세경 씨의 상태가 어떤지, 소속사에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상태라고만…….]

 
여리의 눈썹이 가볍게 들썩거렸다. 안정을 취하는 상태라니. 멀쩡하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아직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까.


“그러게,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화면을 노려본 여리가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낮에 송 실장에게 부딪혔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항상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의 형태가 오늘에서야 현실로 나타났다.

언젠가 태조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 저는 안중에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윤세경을 안고 있던 태조의 눈에 저는 없었다. 그는 같은 공간에 있는 자신을 아예 없는 사람인 양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둘 다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태조의 곁에서 윤세경이 사라져버렸으면.

그럼 그 여자에게서 태조도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어차피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도 그 배 속의 아이 때문이지 않나.

까득, 손톱을 물어뜯은 여리가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던져놓은 가방을 거꾸로 뒤집자 화장품과 핸드폰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여리는 그중 전원이 꺼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낮에 촬영장을 떠나자,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던 터였다. 여리는 핸드폰 측면을 더듬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전원이 켜지자, 뒤늦게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안 대표와 매니저, 잡지사 에디터와 민소영 그리고 낯선 번호들까지.

여리는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포털 앱부터 켰다. 윤세경의 이름을 치고 검색하려는데 화면이 바뀌며 안 대표의 이름이 떠올랐다.


“진짜 징글징글하게 걸어대기는.”

쯧, 짜증스럽게 혀를 찬 여리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요?”

- 뭐? 왜? 야, 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전화는 왜 계속 꺼놓고 있는 건데? 너 때문에 회사가 뒤집어졌구만, 넌 지금 어디 숨어 있는 거냐고!

전화가 연결되자 안 대표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핸드폰을 귀에서 뗀 여리가 시끄럽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숨어 있는 게 아니라 쉬고 있는 거예요.”

- 하, 내가 진짜, 기가 막혀서. 그래서 지금 어디냐고. 왜 촬영장에선 말도 없이 사라진 거고? 지금 윤세경 사고 난 거 때문에 난리 난 거 몰라?

“알아요. 그 사람 지금 병원에 있다면서요. 유산했다는 말도 있고.”

- 유산까지는 모르겠고. 지금 그게 너 때문이란 말이 도는 건 알고 있어?

“그게 왜 나 때문이에요? 내가 뭘 했다고?”

저를 탓하는 말에 여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 현장에 있던 스태프가 익명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어. 네가 일부러 윤세경을 물에 빠트렸다고.

“허, 엄한 사람 몰아붙이지 마요. 증거 있대요? 내가 그랬다는?”

- 네가 한 게 아니라는 거야?

재차 확인하듯 묻는 말에 여리가 눈을 내리깔았다.

당시 수영장에 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점심을 먹고 있던 때라 대다수 스태프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

만에 하나 누가 봤더라고 윤세경과 제가 이야기하는 것 정도일 거다. 그 여자의 몸이 무거워 스스로 넘어진 걸, 누굴 탓하려고.


“윤세경 씨 소속사에서 사람을 풀어서 쓴 거겠죠. 본인이 잘못해서 물에 빠졌다고 하기엔 모양 빠지니까 누구 하나 물고 늘어지려고. 내가 윤세경 씨랑 이야기한 건 맞는데 물에 빠트린 건 아니에요. 자기 혼자 넘어진 거지.”

-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윤세경이랑 이야기는 했지만 물에 빠트린 건 아니다?

“…….”

- 사실대로 말해. 지금 우리 쪽에서도 그 소문에 대해 수습은 해야 하니.

“아니라고요. 내가 그랬다면 증거부터 내놓으라고 해요. 이런 식으로 사람 몰아가면 억울하지. 커뮤니티에 글 쓴 사람한테 사과문 올리라고 해요. 안 그럼 우리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 그래. 일단 그건 그렇게 수습한다 치고. 그보다 너 어디냐고. 지금 잡지사 쪽에서 너 때문에 촬영 중단돼서 손해배상 청구하겠다 난리를 치는데. 하아, 일단 만나서 좀 이야기를…….

“나중에. 그 글 쓴 사람부터 잡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요.”

- 뭐? 야, 오여리 너……!

안 대표의 말을 무시한 채 여리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거는 안 대표의 번호를 수신 거부로 돌려놓고 윤세경의 이름을 검색했다.


“…….”

뉴스 탭의 맨 상단, 가장 최근의 기사를 클린한 여리의 눈매가 가늘게 늘어졌다.

병원 앞에서 찍힌 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마 여사의 사진과 함께 세경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

웃자란 풀들이 바람을 맞아 몸을 길게 누였다. 얇은 원피스 자락은 바람에 흩날려 세경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 한번 본 듯한 풍경이었다. 언덕을 뒤덮은 풀과 저 위에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는 예전에 하얀 솜뭉치처럼 생긴 아기 호랑이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주변에 아무도 없자 그녀는 아기 호랑이를 만났던 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아옹!’

그때 근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하얀 털을 가진 아기 호랑이가 풀숲에서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

귀여운 아기 호랑이의 모습에 배시시 웃은 세경이 인사를 건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아기 호랑이는 조금 더 자란 것 같았다.

이리 오라고 손을 내밀자 동그란 머리통이 작게 갸웃댔다. 그에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던 아기 호랑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작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세경에게 걸어왔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검은 코를 벌름대는 게 너무 귀여웠다. 세경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아기 호랑이가 겁을 먹은 듯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섰다.


“아…….”

그게 왠지 서운해져 세경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 몸을 바짝 낮춘 채 아기 호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쉬이, 아가 이리 와야지.”

손끝을 까닥이며 혀를 똑똑 굴려보았지만, 겁을 먹은 아기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발을 내딛자, 아기 호랑이는 아예 몸을 돌려 세경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왠지 지금 저 아기 호랑이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세경이 아기 호랑이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기 호랑이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끝이 없는 너른 들판을 얼마나 달렸을까.

꿈인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온몸이 욱신대며 아파 오는 것 같아 세경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런데도 아기 호랑이는 지치는 것 없이 제게서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가지 마, 아가!”

세경의 목에서 울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마치 제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처럼 아기 호랑이가 그 자리에 멈추었다.

제가 움직이면 또 도망칠 것 같아, 세경은 저를 보는 아기 호랑이를 그 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가지 마. 이리 와, 아가.”

세경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를 보고 있는 아기 호랑이가 고개를 갸웃댔다.

손을 뻗어보았지만 아기 호랑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했다.


“너를 만나길 고대하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수습할 새도 없이 눈가에 맺힌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미안해.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네가 아프지 않았을 텐데…….”

세경은 울먹이며 아기 호랑이를 바라봤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낑낑대는 아기 호랑이가 제게 올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한테 와. 응? 나랑 같이 가자.”

세경이 다시 아기 호랑이에게 팔을 뻗었다. 뒤로 주춤거리던 아기 호랑이가 세경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앙증맞은 발을 움직였다.


“…….”

짤따란 다리로 한 걸음씩, 저 작은 아기 호랑이가 제게 걸어오고 있었다.

세경은 조급하지 않게 아기 호랑이가 제게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다가온 작은 짐승이 세경의 손바닥 위로 동그란 얼굴을 비벼댔다.

손바닥에 보드라운 털이 닿자, 세경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품에 들어온 아기 호랑이를 꽉 끌어안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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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경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

고개를 돌리자 적막한 새벽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끔뻑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봉긋하게 솟은 배 위에 손을 얹자 작게 동동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흐윽.”

앙꼬의 태동이 느껴지자 울음이 터졌다. 그 소리에 놀란 태조가 선잠에 들었던 눈을 번쩍 떴다.


“태조 씨.”

고개를 돌린 세경이 태조를 향해 팔을 뻗었다.

커다란 몸이 그녀의 위로 내려앉았다. 세경의 어깨에 얼굴은 묻은 태조의 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 푸릇한 새벽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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