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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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빚
2023.06.14.
“흐엉, 다행이에요. 누나. 제가…… 끄흡, 옆에 있었는데도 지켜주지 못하고…….”
병문안을 온 제훈이 통곡하듯 울음을 쏟아냈다. 수영장에 빠진 세경이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저리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제훈의 눈가가 빨갛게 짓물러 있었다.
“그만 울어. 나 괜찮으니까.”
세경이 제훈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잠깐 그 주변을 걷는 것뿐이라 따라오지 말라고 한 건 저였는데. 물에 빠진 게 마치 본인의 탓인 양 저러고 있으니, 오히려 세경이 그에게 더 미안해졌다.
“당분간 입원해 있는다면서요?”
송 실장의 물음에 세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거나 한 건 아닌데. 다들 걱정해서요.
어제 정신을 차리고 난 뒤, 세경은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았다. 혈압과 채혈은 물론 앙꼬의 상태를 보느라 태동 검사와 초음파도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피는 그날 새벽녘에 완전히 멈추었고, 태반이 떨어진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하혈의 원인은 수영장에 빠질 때의 충격으로 혈관이 터진 것 같다고.
조산기는 없어 보이지만 일단 외부적으로 충격이 있었던 상태라 주치의는 며칠 더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였다.
“송 실장님도 놀라셨죠? 미안해요. 나도 주의를 한다고 했는데…….”
거기서 갑자기 오여리가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기사는 어디까지 난 거예요? 나 입원했다는 건 나온 거 같고. 그때 일도 누가 글을 써서 올렸다고 하던데.”
송 실장이 답하기 곤란한 듯 난감한 미소만 지었다.
혹시라도 세경이 기사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을까, 태조가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인터넷을 하지 말라며 세경에게 핸드폰도 주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세경이 얻을 수 있는 정보라고는 티브이에서 나오는 연예 뉴스 프로그램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정란이나 태조가 있으면 보지도 못했다.
“인터넷 금지령 떨어진 거 아니었어요? 기사 난 건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은 몸 상태만 신경 써요.”
“못 보게 하니까 더 궁금해서 그러죠. 나 이제 괜찮은데.”
“아이고. 괜찮긴. 세경 씨 이제 정신 차린 지 이틀째예요. 미열 있던 게 내린 건 어제저녁이고.”
“그래서 말 안 해줄 거라구요?”
아랫입술을 삐죽거린 세경이 제훈을 내려다보았다.
너라도 좀 말해 달라는 눈빛이었으나, 태조가 얼마나 입단속을 해놨는지 고개를 저은 제훈은 제 손으로 아예 입을 봉하기까지 했다.
“계속 이러면 나 밖에 나가서 핸드폰 하나 개통해 올지도 몰라요.”
“음, 대표님이 세경 씨 신경 쓰게 하지 말랬는데.”
송 실장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세경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 싶었는지 궁금한 것만 몇 가지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일단 세경 씨 말대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는 예전에 나왔고. 어제 자로 몸 상태가 많이 나아져서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보도자료가 추가로 나갔어요.”
“촬영은 어떻게 됐어요? 인터넷에 글 쓴 사람은 누군지 알아요?”
“아니, 핸드폰도 없다면서 그런 건 다 어떻게 알았어요?”
송 실장의 질문에 세경이 벽에 걸린 티브이를 눈짓했다.
“하루 종일 연예 뉴스 프로만 보고 있었어요?”
“송 실장님도 며칠간 병원에 있어 봐요. 책 읽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뭐, 그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다 알고 있겠네. 일단 우리 촬영은 당연히 중단됐고. 그날 오여리 씨 촬영 팀 스태프 중에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본 사람이 있나 봐요. 커뮤니티에 글 쓴 건 그 사람인 것 같은데. 일부러 찾지는 않았고.”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그땐 주변에 사람도 거의 없었던 거 같은데.
“어떤 내용이에요? 그 스태프가 쓴 글은?”
“두 사람이 실랑이 하고 있는 걸 봤다. 세경 씨가 오여리한테 손이 잡혀서 발버둥을 치고 있더라. 그리고…….”
말끝을 흐린 송 실장이 세경을 살폈다. 혹시라도 제 말이 그때 일을 떠올리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음, 그 사람이 세경 씨를 일부러 물에 빠트리는 것 같았다고.”
“그것도 기사가 나간 거죠? 오여리 씨 쪽은 어때요? 그거 보고 가만있진 않을 것 같은데.”
“A&J에서 입장문을 내기로는 스태프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며 발뺌하는 상황이에요. 오여리도 자기는 억울하다 주장하고 있고. 우리는 세경 씨 몸이 회복되는 대로 상황 파악해서 후속 조치하겠다고 했어요.”
세경은 송 실장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어제저녁 문병을 온 예령에게서 오여리를 고발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그새 해외로 도망칠까, 출국 금지 조치도 요청해 두었다고.
그 때문에 제훈과 송 실장도 참고인 자격으로 가서 진술을 하고 왔다고 했다. 정작 고발당한 오여리는 소환에도 응하지 않았지만.
세경은 손수건으로 가려 놓은, 푸릇하게 멍이 든 팔목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람 경찰 조사에도 응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오여리 씨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계속 방송 활동 하고 있는 거예요?”
“촬영장에서 이탈한 뒤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거 같아요. 예능 촬영한 건 일단 방송되고 있고. 나머지 스케줄은 다 캔슬 됐을걸요?”
“촬영장을 이탈해요?”
예전에도 촬영장을 이탈했단 기사를 본 거 같은데. 그건 습관인 건가?
“세경 씨 떠나고 그 뒤에 말도 없이 사라졌대요. 그래서 그쪽 촬영팀도 중간에 난리가 났고.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어떻게 임신한 사람을 물에 빠트릴 생각을 해.”
화가 난 손 실장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 제 잘못은 없다며, SNS에 글을 쓴 스태프를 비난하는 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거주지가 일정치 않나 봐요. 귀국해선 계속 호텔에 머물렀다고 해요. 지금 잡지사 쪽에선 오여리 씨 촬영 펑크 난 거 때문에 손해 배상 물리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우리 쪽은요?”
“촬영 못 한 원인은 오여리 씨한테 있으니까, 아마 그쪽으로 다 몰아서 청구하지 않을까 싶어요. 오전에 촬영했던 건…… 미안해서 화보에 싣지는 못하겠다고.”
“아……. 사진 예쁘게 나왔는데.”
세경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샜다. 태조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문 과장님한테 부탁하면 B컷 사진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드륵.
“어? 아직 계셨구나. 다행이다. 먼저 갔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정란이 활짝 웃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든 그녀는 침대로 다가와 바깥에서 사 온 커피를 제훈과 송 실장에게 건네주었다.
“아이참, 안 사 오셔도 되는데. 이거 사려고 일부러 나가신 거예요?”
“아니에요. 내 옷 사러 갔다가 겸사겸사. 급하게 올라와서 옷도 못 챙겨 왔거든. 세경이 넌 사과케일 주스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있다고 건강 주스 사다 주는 거야?”
피식 웃은 세경이 정란이 주는 주스를 받아 마셨다. 제훈이 자리를 비켜주자 정란이 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엄만 제주도로 언제 내려가?”
“며칠 더 있을 생각인데. 왜? 엄마 빨리 갔으면 좋겠어?”
“누가 그렇댔나. 나는 카페가 걱정돼서 그러지. 연락받고 갑자기 온 거잖아.”
“안 그래도 오전에 통화했는데 애들이 잘하고 있으니 여긴 신경 쓰지 말래. 부매니저랑 직원들이 하루 이틀 일하는 줄 아니? 영 무리다 싶으면 며칠 문 닫으면 되는 거고.”
“손님들 와서 그대로 돌아가면 미안하잖아. 태조 씨도 있고 옆에서 나 봐줄 사람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려가.”
“그래도 며칠 더 있어 볼게. 안 그래도 사부인이 자주 들여다볼 테니 걱정은 하지 말라 하시더라.”
정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이후, 정란은 내리 병원에서 딸의 곁을 지켰다.
그 사이 병원을 방문한 마 여사와 인사도 나누었다.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이런 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며 마 여사는 정란에게 굉장히 미안해했다.
시모가 될 분이 좋으시다, 세경에게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던 터였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시댁 식구들이 마냥 호의적이진 않지 않나. 게다가 그 집안이 재벌가이기도 하니 저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나 마 여사를 만나 이야기를 직접 나눈 뒤엔 정란도 안심할 수 있었다.
시댁 식구들이 다 세경이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적어도 자신처럼 미움받는 며느리는 안 될 것 같아 다행이라며, 정란은 세경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고 웃었다.
“좋은 분이시지? 우리 시어머님.”
“멋있으시더라. 난 또 사부인이 엄격하고 깐깐한 성격이면 우리 딸 어쩌나 싶었는데…….”
말끝을 흐린 정란이 옆을 돌아보았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송 실장과 제훈이 방금 한 말을 못 들은 척 빨대를 쪽 빨고 있었다.
“아, 엄마도 좀 가서 쉬고 와. 나 집 그대로 있으니까, 거기서 한숨 푹 자고.”
“지금? 왜? 엄마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이틀 동안 저기 소파에서 웅크리고 잤잖아. 어제오늘 검사 결과 아무 이상 없다고 했으니까, 엄마도 좀 안심하고 쉬었다 와. 여기선 계속 새벽에 자다 깨다 했지?”
“알고 있었어?”
정란이 놀란 듯 묻자 세경이 픽 웃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내가 몸 뒤척일 때마다 저쪽에서도 소리가 났는데. 이따가 태조 씨도 온다고 했으니까. 엄만 가서 맛있는 것도 해 먹고 편하게 자고 있어.”
“나 가면 넌 뭐 할 건데?”
“한숨 잘 거야. 조금 피곤해서. 제훈아, 네가 우리 엄마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그럼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제훈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정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경을 바라보았다.
“정말 혼자 있어도 돼?”
“당연하지. 아프면 콜 버튼 누르면 되잖아.”
세경이 머리 위에 달린 버튼을 가리켰다. 그럼에도 불안한 듯 정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어디 아프거나 하면 바로 연락해야 해? 아, 너 지금 핸드폰 없다고 했지. 어쩌나, 지금 가서 하나 개통해 올까?”
“이따 저녁에 태조 씨한테 달라고 할게. 아니면 여기 간호사분들께 부탁해도 되고. 그러니 걱정 말고 가요. 응?”
한참의 설득 끝에 정란이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을 배웅하러 세경이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자, 정란이 도로 그녀를 눕히고 방금 사 온 짐을 들었다.
“엄마, 저녁에 다시 올게.”
“저녁 말고 내일 오후에 와. 태조 씨 오면 엄마한테 연락할게. 송 실장님도, 제훈이도 조심히 가요.”
“푹 쉬어요, 세경 씨. 어머니는 우리가 잘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세경이 인사를 하는 송 실장과 제훈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병실 안은 적막함이 감돌았다.
세경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그날 오여리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세경 씨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태조 오빠는 나한테 큰 빚을 지고 있거든. 그건 평생을 가도 못 갚는 거야.’
풀장에 빠지기 전, 여리가 분명 저런 말을 했었다.
태조가 그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단순히 그를 좋아하는 것 말고도, 오여리가 태조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저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대체 그 빚이란 게 뭐길래.”
오여리가 저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걸까.
눈을 끔뻑이며 생각을 거듭하던 세경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깊은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