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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앙꼬의 탄생 (94/100)


94. 앙꼬의 탄생
2023.06.24.



 
병원에서 퇴원한 후, 세경은 거의 집에서 태교만 하며 지냈다.

그 사이 계절은 푸릇했던 여름을 지나 나무들이 울긋불긋하게 물드는 가을의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이른 겨울과 함께 찾아올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 즈음, 엄마 배 속에 있는 게 답답했던지 앙꼬의 발길질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아아.”

출근하는 태조를 배웅하러 나온 세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부터 시작된 아랫배의 통증이 오늘도 이어지는 탓이었다.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현관 앞에 선 태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간을 찡그린 세경은 통증이 조금 잦아들자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 어머니도 오신다고 했으니까. 그보다 태조 씨는 나 때문에 잠도 설쳐서 어떡해요?”

예정일까지는 아직 일주일 정도가 남았건만. 아기 호랑이의 성격이 아주 급한 모양이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거의 두 시간마다 배가 심하게 아파 와 세경은 새벽 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건 옆에서 자고 있던 태조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만큼 할까. 들어가서 쉬고 있어. 진통이 더 심해지면 전화하고. 아니면 지금 바로 병원에 가든가.”

“어제 심 원장님한테 물어보니까 가진통이 오는 거 같대요. 병원에 가도 뾰족한 수는 없을 거 같아서, 일단 조금 더 참아 보려고요. 정말 못 견딜 정도면 전화할게요.”

세경이 얼른 출근하라며 태조의 등을 떠밀었다. 아내의 걱정에 그는 현관문을 나갈 때까지 열 번 정도는 더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완전히 집을 떠날 수 있었다.


“으음.”

태조를 보내고 돌아선 세경이 두 발자국 만에 그 자리에 멈추었다. 찌르르 울리는 통증에 앙꼬의 발길질이 더해지고 있었다.


“앙꼬야, 엄마 힘들어.”

새벽 내 진통에 시달렸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몸이 힘들다 보니 입에서 나오는 건 투정 섞인 한탄뿐이었다.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도 많아졌는데, 그럼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저를 챙겨주는 태조가 얼마나 고맙던지.


“아가, 아빠 올 때까진 얌전히 있자. 응?”

세경이 배 속의 앙꼬에게 달래듯 말하며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게스트룸을 비우고 만든 앙꼬의 방에는 정란이 보내준 선물과 시댁 식구들이 사다 준 아기용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고급스러운 아기 침대와 바운서, 옷걸이엔 앙증맞은 꼬까옷들이 색깔별로 걸려 있었고 서랍장 위엔 예령이 선물해준 것을 포함해 열 켤레 정도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얼마 전 세경의 생일 땐 팬들이 그녀의 선물보다 아이의 선물을 더 많이 보내주기도 했다.


“앙꼬는 좋겠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줘서.”

세경이 봉긋한 배를 쓸며 거실로 나왔다. 욱신대는 허리를 짚고 소파에 앉자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어, 엄마.”

- 너 괜찮아? 계속 배 아프다며.

아침에 배가 아프다고 좀 칭얼거렸더니 그새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해. 엄만 도대체 어떻게 날 낳은 거야?”

- 뭘 어떻게 낳아. 열 달 동안 너처럼 힘들게 품고 있다 낳은 거지.

대꾸하는 정란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엄마가 늘 자신을 키우느라 고생했겠다고 말은 했었는데, 정말 이렇게 힘이 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 이제 정말 알 거 같아.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 어이구, 그러셨어요? 우리 딸 이제 정말 어른이 됐나? 그래도 아이 태어나면 너무 귀여워서 지금 힘든 건 기억도 안 날걸?

“엄마도 그랬어?”

- 그럼. 엄마가 제일 잘한 게 너 낳고 키운 건데. 그래서 말인데, 너랑 진 서방 둘째 생각은 없니?

“엄마!”

세경이 왁, 소리를 질렀다. 이제 출산이 임박한 딸한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


“나 아직 첫째도 안 낳았거든?”

- 계획은 세울 수 있잖니. 너 앙꼬 하나만 낳을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임신이 내 마음대로 되나?”

- 하긴. 우리 첫 손주도 계획에는 없었지.

놀리는 정란의 말에 세경이 민망한 듯 입술을 말아 물었다.


- 아무튼 엄마도 조만간 서울에 올라갈 테니까, 그때까지 몸조리 잘하고 있어. 너무 아프면 참지 말고 바로 병원에 가고.

“응. 알았어.”

- 그럼 푹 쉬고 있어. 엄마가 이따 다시 전화할게.

“으응.”

아쉬운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세경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출산이 임박해 그런가.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마음이 울컥해졌다.


“나 걱정해주는 건 우리 엄마밖에 없네.”

코끝을 찡긋거린 세경이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켰다.

뉴스 채널에 잠시 화면을 고정하고 있자, 몇 개의 사건 사고 소식이 지나고 오여리의 재판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세경은 소파에 누워 화면을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오여리의 부친이 마 여사를 찾아왔다고 했다.

영상이 퍼진 후, 오여리에 대한 비난이 그녀의 부친과 오성물산에까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오 사장은 딸의 선처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일단 세경과 합의라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렇게라도 세경에게 사과한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 사건을 좀 가라앉히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 여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오 사장은 회사 홍보팀을 통해 여리의 잘못이 딸을 잘 키우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마저도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오여리가 난동을 피웠다는 보도에 묻혀버렸지만.

마 여사가 했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오여리는 경찰서에 있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모친이 태조 때문에 죽었다며 진실을 밝혀 달라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새로운 특종인가 싶어 오여리의 말을 받아 적었던 기자들은 취재를 통해 그녀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그 사실이 보도되자 사람들은 어릴 때 모친을 잃은 오여리를 동정하긴커녕 제 어머니의 죽음조차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녀의 행태에 치를 떨었다.

태조의 말로는 여리 또한 형사가 뽑아 준 사고 당시의 경위서와 사실 확인원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실을 부정하며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고.


“짧은 복귀, 그만큼 빨랐던 추락이라.”

세경은 자막에 적힌 말을 웅얼거리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



“으음.”

짧게 잠을 청한 세경이 몸을 뒤척거렸다. 다시금 배가 짜르르 당기는 느낌에 그녀가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몇 시지?”

세경이 반쯤 감긴 눈을 껌뻑거렸다. 정오에 마 여사가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던 터였다.

그녀는 아픈 배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자, 마 여사가 도착했는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오셨나 보다.”

인터폰 앞으로 걸어간 세경이 마 여사의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모를 마중하러 나가려 했지만, 자꾸만 배가 당겨와 중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세경이 너 괜찮니? 안 그래도 태조가 아침에 너 아프다고 연락을 하던데.”

짐 하나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던 마 여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세경은 기운 하나 없는 얼굴로 시모를 맞이했다.


“엊그제부터 조금씩 진통이 왔거든요. 계속 뒤척였더니 태조 씨가 저 때문에 잠도 못 잤어요.”

“진통이 와? 이러다 아이 나오는 거 아니니?”

마 여사가 놀란 얼굴로 세경을 살펴보았다.


“예정일은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는데.”

“또 모르지. 좀 일찍 나올지도. 많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 그랬어.”

“가진통인 거 같아서요. 아직은 참을 만하기도 하구요.”

“밥은? 먹고 계속 토했다고 해서. 내가 소고기죽 좀 만들어 왔는데.”

마 여사가 세경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세경을 식탁에 앉힌 마 여사는 그릇을 꺼내와 자신이 만들어 온 죽을 세경의 앞으로 내어주었다.


“조금만 먹어 봐. 그리고 계속 아프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마 여사가 차를 대기해 놓으라고 김 기사에게 전화를 하는 동안, 세경은 수저를 들고 죽을 떠먹었다.

잘게 다진 소고기가 들어간 죽은 담백하고 고소했다. 적당히 간도 되어 있어 싱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경은 그릇의 반도 비우지 못한 채 수저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 맛이 없니?”

“아뇨. 어머니. 그게…….”

입술을 질끈 깨문 세경이 배 위로 손을 올렸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통증이 이제는 위로 올라오는 참.

그녀는 마 여사를 향해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저 배가 너무 아파서…….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온 태조가 분만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다리는 초조한 듯 달달 떨리고 있었다.


“정신없다. 다리 좀 그만 떨어.”

마 여사가 그런 아들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태조는 기도하듯 맞잡은 손으로 턱을 툭툭 두드렸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겁니까?”

“뭐, 아기가 10분 만에 쑥 나오는 건 줄 아니?”

동요하는 아들의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마 여사가 피식 웃었다.

분만대기실에 들어가 6시간 동안 세경이 아파 우는 걸 본 태조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병원에 데려다줄 걸 그랬어요.”

“병원에 온다고 아이가 빨리 나오는 것도 아니고. 벌써 진통도 6시간째 하고 있잖아. 세경이 말로는 원래 오늘이 예정일인 것도 아니었다며.”

태조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일주일 뒤가 출산 예정일이었는데, 왜 벌써 진통이 오는 건지.


“사부인께는 연락드렸니? 세경이 분만실에 들어갔다고 말이야.”

“아까 대기실에 있을 때 영상통화 했어요. 장모님도 곧장 준비해서 올라오신다고 하더라고요.”

태조에겐 끙끙대며 괜찮다 하던 세경은 정란의 얼굴을 보자,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심 원장이 중간에 들어와 애 아빠의 멱살이나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으라며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넸지만, 통증에 울먹이던 세경은 태조의 손만 붙잡을 뿐이었다.


“하아.”

그는 세경이 잡았던 손을 매만졌다. 분만실에 들어간 지 삼십 분은 된 것 같은데 아직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

태조가 세경의 무사 출산을 기도하고 있을 때 병원 복도 끝에서 예령이 달려왔다. 그녀는 태조와 분만실을 순서대로 훑어보곤 마 여사에게 물었다.


“동서는요? 아직이에요?”

“대기실에 있다가 좀 전에 분만실로 들어갔어.”

“도련님은 같이 안 들어가구요?”

“세경이가 나중에 들어오라고 했단다.”

아내를 걱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태조를 대신해 마 여사가 대답했다.


“그랬구나. 윤조 씨랑 아버님도 조금 이따 같이 온다고…….”

“아악!”

그때 분만실 안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란 태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 여사와 예령도 긴장한 채 분만실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들려오는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


‘응애애!’

 
안도한 마 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령은 얼떨떨한 얼굴로 분만실을 보며 중얼거렸다.


“태어났나 봐요…….”

마 여사가 태조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그는 두 손에 힘을 준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분만실 문이 열리고 심 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긴장과 기쁨으로 들떠 있는 태조의 가족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축하합니다. 손발 각각 다섯 개씩 열 개 다 있고, 건강한 아드님이에요.”

심 원장의 말에 마 여사가 손을 맞잡았다.


“고생했네. 세경이는?”

“안에서 쉬고 있어요.”

어서 들어가 보라며 심 원장이 태조에게 눈짓했다. 마 여사가 먼저 들어가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조가 다가가자 침대에 누워 아이를 보고 있던 세경이 남편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기 봐요. 지금은 좀 쪼글쪼글한데, 진짜 너무 작고 귀여워요.”

눈도 뜨지 못한 아이는 세경의 말대로 작고 귀여웠다.

태조는 아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세경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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