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진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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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진규원
2023.06.28.
외출 준비를 마친 세경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안은 태조가 창가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 손으론 조금 전 이유식을 먹은 규원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이가 자라는 건 경이로웠다.
콩알만 한 아이가 제 배에 자리 잡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목도 가누지 못하던 규원은 어느새 뒤집기도 하고 배밀이도 하기 시작했다.
“규원이 아직 트림 안 했어요?”
태조에게 다가간 세경이 말랑말랑한 규원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엄마를 본 아이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렸다.
“아직. 곧 할 거 같은데.”
“끄엉.”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조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있던 규원의 입에서 귀여운 트림 소리가 들렸다.
세경이 그 소리에 눈을 크게 뜨자, 규원이 새카만 눈망울을 빛내며 방긋 웃었다.
“우리 규원이 트림했어요?”
“꺄앙!”
규원이 작은 팔을 파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태조를 쏙 닮은 아이는 웃는 것도 어여뻤다.
그녀는 포동포동한 뺨에 입술을 누르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규원이 내가 안을까요?”
“손목 아프다며. 내가 안고 내려갈게. 준비는 다 했어?”
“네. 규원이 물건도 다 챙겼고.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돼요.”
오늘은 태조의 본가에 가는 날이었다. 규원이 태어나고 한동안 육아에 전념하느라 참석하지 못했던 가족 식사 자리가 바로 오늘이었다.
“가방은 이리 주고, 차 키는 당신이 가지고 있어. 저기 재킷에 있을 텐데.”
태조가 소파에 올려놓은 옷을 턱짓했다. 세경이 안주머니와 바깥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 여기 없는데.”
“그럼 바지 주머니에 있나?”
그럼 찾아보라는 듯 태조가 세경을 마주 보았다.
“아, 여기 있…….”
세경이 태조의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든 찰나였다.
쪽.
태조의 입술이 세경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녀는 제 볼을 더듬거리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뭐예요, 갑자기.”
“규원이만 해주길래.”
“아우우!”
제 이름이 불리자 규원이 대답하듯 옹알이를 했다.
“너도 해줘?”
태조가 아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규원이 방긋거리자, 태조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아들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이제 가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세경이 기저귀 가방을 들고 태조에게 다가갔다.
그가 이리 달라며 세경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태조가 가방을 가져가려 몸을 숙인 순간.
쪽!
“……!”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춘 세경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어머나, 우리 강아지 왔어요?”
집 안에 들어가자 마 여사가 태조의 가족을 반갑게 맞이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건 태조의 품에 안긴 손자 규원이었다.
“아옹!”
규원이 마 여사를 보자 반가운 듯 손발을 바동거렸다. 낯가림이 별로 없는 아이이기도 했지만,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마 여사가 자주 돌봐준 덕분인지 규원은 스스럼없이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오느라 고생했다. 세경인 어디 아픈 데는 없지?”
“네. 어머니.”
마 여사가 규원을 어르며 세경에게 물었다. 태조는 아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어머니를 향해 다소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 안부는 제일 뒷전이시네요?”
“내가 다 큰 아들 걱정도 해야 하니? 너야 알아서 잘 지내겠지. 규원인 뭐 먹였고?”
“오기 전에 이유식 조금 먹었어요.”
“동서 왔어? 아이고, 우리 귀여운 규원이도 왔네?”
주방에 있던 예령이 뒤늦게 나와 세경에게 인사를 했다. 마 여사에게 안긴 규원과 눈을 맞추며 찹쌀떡처럼 쫀득한 규원의 뺨을 콕콕 눌러주기도 했다.
“일찍 오셨네요? 제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뭐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세경이 미안한 얼굴로 말하자 예령이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냥 있어. 나도 별로 한 건 없거든. 어머니랑 홍 여사님이 다 준비하셨지. 식사는 조금 이따가 그이랑 아버님 오면 같이 하자고. 지금 오시는 중이라니까.”
“그래. 태조 넌 짐 좀 방에 두고 오고.”
모친과 형수님 앞에서 태조는 완전히 찬밥이었다. 그가 세경의 가방을 챙겨 들고 2층으로 올라가자 마 여사는 며느리들과 함께 거실로 향했다.
“세경이 뭐 좀 마실래? 그이는 한 20분 정도 지나야 올 거야.”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규원이 안 무거우세요?”
“그새 조금 살이 붙었나? 저번 주보다는 무거운 거 같다만 아직까진 괜찮아. 너는? 얘 안고 있으면 팔이 아플 것 같은데.”
“조금 시큰거리긴 해요. 그래서 매일 팔목 보호대 차고 있고요.”
“근데 규원인 벌써부터 이목구비가 또렷하네요. 눈도 큼직큼직하고.”
예령이 규원을 보며 혀를 똑똑 굴렸다. 그러자 마 여사의 품에 있던 아이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 꽃미소는 어쩔 거야. 진짜 뺨도 보들보들해 보여서 한 입 깨물어 주고 싶네.”
“규원이가 성격이 순한 편이지?”
“네. 저이도 어릴 때 그랬어요?”
“태조? 무슨. 쟤 어릴 때 말도 못 하게 까칠했어.”
마 여사가 아들의 흉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세경이 웃자 마 여사가 정말이라며 말을 덧붙였다.
“음, 하지만 얼굴은 태조 어릴 때랑 아주 똑같은데. 요 순한 성격은 너 닮은 거 같고. 아, 태조 어릴 때 사진 한번 볼래? 너도 보면 놀랄걸? 규원이랑 아주 붕어빵이라.”
“네. 보고 싶어요.”
“저두요, 어머니. 윤조 씨 어릴 때 사진도 같이 보여주세요.”
예령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마 여사가 앨범을 가져오겠다며 세경의 품으로 규원을 넘겨주었다.
“규원이 내가 안고 있어도 돼요?”
“그럼요. 규원아, 큰엄마한테 한번 가 볼까?”
팔을 벌린 예령의 품으로 규원이 안겼다. 무릎 위에 아이를 앉힌 예령이 쫀득한 뺨에 제 볼을 비볐다.
“향도 좋고 손발도 귀엽고. 아주 천사가 따로 없네.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있을 수 있지?”
예령이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규원의 손을 붙잡았다. 그 사이 2층에 가방을 놓고 온 태조가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음? 어머니는?”
“서재에 들어가셨어요. 당신이랑 아주버님 어릴 때 사진 보여주신다고.”
“나랑 형 어릴 때?”
어릴 때 무슨 사진을 찍었더라.
태조가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흑역사 사진을 되새기고 있는 사이, 서재에 들어갔던 마 여사가 커다란 앨범 세 개를 들고 왔다.
“그걸 왜 보여주려고 그러세요?”
“규원이가 너랑 얼마나 판박인지 보여주려고.”
마 여사가 테이블 한쪽에 앨범을 쌓아놓았다. 태조는 예령에게서 규원을 받아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이게 태조 1살 때, 윤조는 3살 때일 거야.”
앨범을 펼친 마 여사가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사진엔 규원이만 한 어린 태조와 조금 큰 윤조가 같이 찍혀 있었다.
“진짜 규원이랑 판박이네요. 이건 그냥 대놓고 규원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세경이 사진 속 태조와 규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빠 품에 안긴 규원이 사진을 보더니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꺄아앙!”
“오구, 우리 강아지 신나쪄요? 이거 보렴. 너랑 똑같은 사람이 여기 있지?”
마 여사가 혀 짧은 소리로 규원에게 말했다. 태조는 제 어릴 적 사진과 규원을 번갈아 보더니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똑같나?”
“똑같지. 성격은 다르지만. 태조 너는 얼마나 울어댔는지 알아? 그에 반해 우리 규원이는 얼마나 순하고 예쁜지.”
마 여사가 규원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예령은 앨범을 넘겨보며 시모에게 물었다.
“윤조 씨는요? 그이는 어땠어요?”
“윤조는 조용했어. 제가 형이라고 나중엔 태조에게 자기 물건도 다 양보하고 그러더라.”
“어쩜. 우리 그인 어릴 때랑 지금이랑 변한 게 없나 봐요.”
남편을 칭찬하는 말에 예령이 기쁜 듯 웃었다. 그러면서 야무지게 윤조의 어릴 적 사진 하나도 챙겨 놓았다.
“세경이 너도 태조 사진 하나 가져갈래?”
“그래도 될까요?”
“그럼. 이거 필름도 다 남아 있는걸.”
마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경은 앨범을 넘기며 사진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개중 규원의 백일 사진 포즈와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 골랐다.
“이거 저번에 본 규원이 사진이랑 비슷한 거 같네. 참, 동서 결혼식 준비는 어때? 잘 진행되고 있어?”
“플래너가 준비해오는 걸 저는 체크하고 확인하는 것뿐이라 어려운 건 없어요. 다음 주에 드레스 몇 벌 시착하고, 결혼사진 찍고 나면 예식 날짜도 금방일 거 같구요.”
“드레스 보는 게 벌써 다음 주였어? 그럼 그날 규원이는 누가 보고?”
“내가 같이 가서 보기로 했다.”
마 여사가 중간에 끼어들어 대답했다. 세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어머니도 오시고, 제 친구도 온다고 했어요. 매니저도 같이 갈 거 같고.”
“친구라면 유나 씨 말하는 거죠?”
“네.”
“위치 알려줘요. 나도 시간 나면 가 보게.”
세경이 드레스 숍 주소를 찾아 예령에게 알려주었다. 그 사이 바깥이 소란해지며 진 회장과 윤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태조가 일찍 왔구나?”
“세경이 덕분이죠. 작은 애 아니었어 봐, 태조는 오늘도 일 때문에 늦든가 안 왔을 거야.”
마 여사가 태조를 흘기며 잔소리를 했다.
어머니의 구박에 태조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세경이 웃으며 그의 옆에 섰다.
“아버님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하세요. 형님이랑 어머니가 일찌감치 준비하셨대요.”
“그래. 큰 애가 수고했구나. 윤조도 들어왔으니 같이 식사부터 하자.”
“아앙!”
“음? 요 녀석, 뭘 알고 대답하는 건가?”
규원의 씩씩한 대답에 진 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식구들이 다이닝 룸으로 향하자 세경이 태조에게 손을 뻗었다.
“규원이 이리 줘요. 당신도 가서 저녁 먹어야지.”
“규원이는 내가 안고 있으면 돼. 당신이야말로 들어가서 편히 먹어.”
태조가 규원을 넘겨주는 대신 세경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두 사람 뭐 해요. 빨리 들어오지 않고.”
“지금 들어가요.”
먼저 들어간 예령의 재촉이 떨어지자, 태조가 세경의 손을 잡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
품에 안은 규원의 숨소리가 고르게 흘러나왔다. 시댁에 갔다 온 게 꽤 피곤했던지, 규원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세경은 동그란 머리통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아들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고롱고롱 잠이든 규원을 잠시간 지켜본 뒤, 그녀는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왔다.
“규원이는 자?”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보던 태조가 세경에게 물었다. 조그만 소란에도 아이가 깰까, 까치발로 다가간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했나 봐요. 금방 잠이 드네.”
“맨날 집에서 몸 뒤집고 배밀이만 하다가, 부모님 앞에서 애교 부리며 방긋 웃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픽 웃은 태조가 이리 와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당신도 피곤하지 않아요?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일을 해요?”
“우현이가 보내온 서류 좀 읽고 있던 거야. 그보다 지금 잠들었으니 규원인 한동안 깨진 않겠네?”
“아마 그렇겠죠?”
“그럼…….”
태조가 태블릿을 던지듯 내려놓고 세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세경이 흡, 숨을 삼켰다.
느리게 움직인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우리도 오랜만에 부부의 시간을 좀 가져볼까?”
“무, 무슨 시간이요?”
“부부의 시간.”
부부의 시간은 뭔데요?
세경은 차마 저 말을 내뱉진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짓궂게 올라간 입술과 그보다 더 빠른 손이 야릇하게 그녀의 옷을 파고든 탓이었다.
“규원이 태어나고 우리 둘만 있는 시간도 별로 없었잖아.”
나직하게 속삭인 태조의 입술이 세경의 입술을 덮쳐왔다. 그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고 있던 세경의 몸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세경이 소파에 눕자, 그 위로 태조의 몸이 겹쳐졌다. 그의 손이 세경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냈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호흡이 일렁거렸다.
입술에서 턱으로, 그리고 목선을 타고 내려온 그의 입술이 세경의 쇄골을 지분거리고 있을 때였다.
“으아아앙!”
집이 떠나가라 울어대는 규원의 울음소리에 태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
찰나의 욕정과 부정(父情)사이에서 갈등하던 태조가 한숨을 쉬며 세경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깊은 고뇌가 묻어나는 모습에 세경이 웃으며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쩌죠? 규원이가 안 도와주네요.”
세경이 아들을 달래려 몸을 일으키려 하자, 태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냥 있어. 내가 규원이 다시 재우고 올게.”
태조가 세경에게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엎드린 그녀는 아들의 방으로 들어가는 태조의 등을 쳐다보았다.
열린 방문 사이로 우는 규원을 안고 달래는 태조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등을 도닥이는 그의 손길이 평소와 달리 다급해 보였다.
“아무튼.”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세경이 규원의 방으로 들어갔다. 태조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녀가 규원의 등을 가볍게 다독거렸다.
“쉬, 우리 아가 빨리 자야지.”
세경이 어르듯 규원에게 귓가에 속삭였다.
남편과의 뜨거운 밤을 위해선, 아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