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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함께 걷는 길 (96/100)


96. 함께 걷는 길
2023.07.01.



 
청담동의 한 드레스숍.

매장엔 새하얀 웨딩드레스와 다양한 스타일의 파티 드레스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별처럼 빛나는 비즈 장식과 반짝이는 티아라를 보며 규원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엄마가 사라진 걸 알고 곧 울음을 터트렸지만.


“여기 보세요. 딸랑딸랑!”

세경이 드레스를 갈아입는 동안 신 매니저와 유나가 장난감을 흔들며 규원을 달랬다.

세상 서럽게 울어대던 규원도 눈앞에서 장난감이 흔들리자 그에 정신이 팔려 조금씩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으아앙!”

물론 그것도 잠시뿐이었지만.


“우리 강아지 왜 이렇게 서럽게 울까?”

소파에 앉아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마 여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규원을 안아 들었다.

20분간 아이를 달래고 있던 유나와 신 매니저는 그새 지친 듯 두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엄마 곧 나올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응?”

마 여사가 규원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고 있던 규원은 또 한바탕 울어 젖히려는지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흐엥.”

규원이 또다시 울음을 쏟아내려는 찰나, 세경의 드레스 시착을 도와준 직원이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아이를 한번 쳐다보더니 세경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신부님 드레스 다 갈아입으셨어요. 바로 커튼 열어 드릴게요.”

숍 직원이 싱긋 웃으며 커튼을 쳤다. 그제야 단상에 선 세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레이스와 비즈 장식이 달린 머메이드라인의 드레스가 세경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간단히 틀어 올린 머리엔 꽃 모양 장식의 헤어핀이 꽂혀 있었고, 손에는 심플한 카라 부케가 들려 있었다.


“우와, 정말 예뻐요, 누나!”

“역시 연예인 외모 어디 안 가.”

신 매니저와 유나가 박수를 치며 오버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세경은 피식 웃으며 마 여사의 품에 안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규원인 왜 이렇게 울어.”

“아우우웅.”

마 여사가 규원을 안고 다가오자 세경이 아들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안쓰러우면서도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낯선 듯 두 눈을 끔뻑거리는 게 너무 귀여웠다.


“엄마 보니까 울음 딱 그치는 거 봐라.”

마 여사가 아이를 한번 추어올렸다. 제대로 보자며 그녀가 떨어지자 세경이 몸을 곧게 세웠다.


“어떠니? 드레스는 마음에 드니?”

유나와 신 매니저가 사진을 찍어대는 동안 세경도 거울로 제 모습을 살펴보았다.


“네. 괜찮은 거 같아요. 여기서 살을 조금 더 빼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도 딱 좋은데 뭐. 거기서 살 더 빠지면 규원인 어떻게 봐.”

유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출산 후 고작 6개월이 지난 것뿐인데, 세경의 몸은 이미 예전 체형으로 돌아가 있었다.

살이 쪘다 쳐도 그때보다 2-3킬로 정도 더 늘어나긴 했을까?

하지만 그것도 규원을 돌보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자신은 20분간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지칠 거 같은데, 하루 종일 아이를 봐야 하는 세경이 저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감당할지.


“내가 보기에도 지금이 딱 좋구나. 태조도 같이 보면 좋을 텐데. 하필 지금 차가 좀 막힌다고 해서.”

마 여사가 아쉽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태조도 회사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중간에 차가 막혀 조금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던 터였다.


“태조한텐 나중에 사진으로 보여주고. 이번엔 규원이의 감상을 들어볼까? 규원아, 엄마 어떠니? 아주 예쁘지?”

“꺄앙!”

마 여사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흥분한 규원이 몸을 마구 바동거렸다.

가족들에게 보여줄 겸 마 여사가 사진을 찍은 뒤 세경은 다음 드레스를 착용하기 위해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우웅. 마아아…….”

세경이 보이지 않자 입을 삐죽거린 규원이 다시금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태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레스 시착 다 끝났습니까?”

“아니. 이제 한 벌 갈아입었어.”

신 매니저와 유나에게 인사를 한 태조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빠가 오자 규원이 태조에게 팔을 뻗었다.


“세경이가 옷 갈아입는다고 사라지니까 규원이가 계속 울더라.”

“그래요?”

태조가 어머니에게 규원을 받아 들었다. 통통한 뺨에 입술을 누른 그가 규원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직원이 커튼을 쳐주었다.


“…….”

태조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아내를 바라보았다.

얇은 꽃잎이 겹겹이 덧대어진 듯한 튤 드레스를 입은 세경이 단상 위에 서 있었다. 머리엔 커다란 보석이 박힌 티아라가 올라가 있었고, 흰 면사포가 등 뒤로 떨어져 세경의 몸을 길게 감싸고 있었다.


“아부부부! 꺄웅!”

규원이 다시 나타난 엄마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반면 태조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왔어요? 어때요? 이거 본식 드레스라는데.”

세경이 태조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여태껏 화보 촬영을 하며 한껏 꾸민 세경을 여러 번 본 터였다.

하여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새삼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하는 그런 반응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쁘다. 진짜.”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쑥스러운 듯 태조가 입술을 가렸다. 그의 귓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신랑님도 오셨으니까, 같이 예복 한번 맞춰 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래. 너도 좀 갈아입고 와서 세경이랑 나란히 서 보렴.”

직원의 권유에 마 여사가 맞장구를 쳤다.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어머니에게 규원이를 맡기고 탈의실로 향했다.

태조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세경은 마 여사의 품에 안겨 있는 규원을 살폈다. 볼을 콕콕 찌르고 혀를 똑똑 굴려주자 규원이 입술을 방긋 늘였다.


“어우, 완전 인형 같아.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파.”

규원의 미소에 유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2세 계획을 세워봐야겠다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달칵.

그때 굳게 닫혀 있던 탈의실 문이 열리며 태조가 나왔다.


“…….”

마치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장 차림인데도, 그는 묘하게 평소보다 더 우아하고 잘생겨 보였다.


“어때?”

그녀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자, 태조가 넥타이를 매만지며 세경에게 다가왔다.


“머, 멋있어요.”

“아옹!”

세경을 따라 규원도 대답했다. 아이의 귀여운 옹알이에 유나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도 오셨으니, 이렇게 세 가족 같이 사진 한 장 찍는 건 어때요?”

“그럴까? 태조 너 세경이 옆으로 올라가 보렴.”

마 여사의 턱짓에 태조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태조 쪽으로 몸을 튼 세경이 흐트러진 그의 옷과 넥타이를 정리해 주었다.

그가 그런 아내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태조의 시선을 느낀 세경이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물었다. 그가 세경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대답했다.


“예뻐서.”

“…….”

“새삼 다시 반한 거 같아.”

세경의 귀가 희미하게 붉어졌다. 태조가 장난스럽게 귓불을 만지작거리자 그녀가 새침하게 그를 흘겼다.


“저…… 애정 표현은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사진부터 찍을까요?”

유나가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부부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마 여사는 아들의 팔불출 같은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더니 규원을 태조에게 건네주었다.


“자, 규원이도 여기 보고.”

카메라를 든 유나가 손가락을 딱딱 부딪쳤다. 신 매니저는 그녀의 뒤에서 정신없이 장난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장난감에 관심을 보인 규원이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촤라라라락!

영원토록 기억될 세 사람의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듯 날씨도 맑게 갠 어느 여름날.

태조와 세경이 결혼식을 올리는 호텔엔 수많은 하객과 취재진들이 북적거렸다.

식은 비공개였지만, 일부러 찾아온 취재진들을 위해 식장 한편에 포토존도 마련되었다.

포토존에 선 이들은 대부분 얼굴이 알려진 배우와 가수들이었지만, 두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국내에서 내로라할 만한 정·재계 인사들과 법조계까지 그 면면이 다양했다.

그리고 두 사람만큼이나 이 결혼식에서 주목을 받는 이는 따로 있었으니…….


“어머 어머, 눈 동글동글한 거 봐. 볼살도 통통하고. 뺨 한번 깨물어 보고 싶네.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얘 웃는 건 어떻고. 오구오구. 우리 규원이 기분 좋아요? 엄마 아빠 결혼식 하니까 너무 신나?”

“아부부부부붕!”

규원이 손발을 바동거리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그에 규원을 둘러싸고 있던 세경의 친구들이 같이 비명을 질렀다.

하나 규원의 귀여움에 홀랑 빠진 건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세경이 아이를 데리고 회사에 찾아올 때마다 선물을 한가득 안겨주는 바보 삼촌 둘도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진태조 유전자에서 저런 깜찍한 녀석이 나오다니.”

“엄마 아빠 좋은 점만 쏙 빼닮은 거지. 솔직히 태조한테 애교는 쥐똥만큼도 없잖아.”

멀찍이 서 있는 우현과 석주가 한마디씩 했다. 저 귀여운 아이한테 나중에 입히려고 우현은 얼마 전 공룡 옷도 하나 산 터였다.


“나 아이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내 자식도 아닌데 진짜 귀엽다니까. 나중에 태조한테 규원이 데리고 출근하라든가 해야지. 아니, 그냥 베이비 모델부터 시키라고 할까?”

“태조가 퍽이나 시키겠다. 그 녀석도 제 아들 예뻐서 밖에 잘 안 내보내려고 하던데.”

“그야…….”

석주의 말에 우현이 규원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저렇게 넋을 빼고 보니까 그렇지.”

“저, 잠깐만요! 규원이 좀 데리고 갈게요.”

그때 규원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유나가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아이를 돌보고 있는 예령에게 말했다.


“세경이가 규원이 괜찮은지 걱정하고 있어서요. 식 시작 전에 작가님도 아이랑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시구요.”

“그래요? 그럼 내가 규원이 데리고 신부 대기실로 갈게요. 거긴 어때요? 아까 보니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던데.”

“지금도 그래요. 근데 규원이가 눈에 안 보이니까 세경이가 계속 한숨만 쉬더라고요.”

유나가 세경의 표정을 떠올리곤 어색하게 웃었다. 친구들이 오면 웃으며 사진을 찍다가도 괜히 바깥을 기웃거리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니까 당연히 걱정되겠죠. 그럼 홀 들어가기 전까진 신부 대기실에 동서랑 있는 게 낫겠다. 식 시작하면 내가 다시 규원이 데리고 오고.”

예령이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신부 대기실로 향하자 규원을 본 하객들이 저마다 귀엽다며 돌고래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동서.”

“아, 형님.”

세경이 신부 대기실로 들어오는 예령을 반겼다. 그리고 유모차 안에서 방긋 웃는 규원을 보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규원이 안 울었어요?”

“응. 사람들이 옆에서 귀엽다고 하니까 아주 신나서 방긋방긋 웃고 있었어.”

예령이 작은 입을 오물거리는 규원의 볼을 콕 찔러댔다. 이윽고 바깥에서 하객들을 맞이하던 태조가 신부 대기실로 들어왔다.


“빠아아아아!”

규원이 아빠를 보자 팔을 마구 흔들었다. 태조가 피식 웃으며 아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식장 들어가기 전에, 두 분 같이 사진 한 장 찍으시죠.”

고개를 끄덕인 태조가 세경의 곁으로 다가갔다. 도우미가 세경의 위치를 잡아주며 드레스와 면사포를 정리해 주었다.


“그럼 두 분 입 맞추는 것부터 찍겠습니다.”

사진작가의 말에 세경의 옆에 선 태조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셔터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이번엔 아이랑 같이 찍어볼까요?”

사진작가의 말에 예령이 규원을 안아 태조에게 건넸다.


“이번엔 두 분이 아이의 뺨에 같이 뽀뽀하는 포즈를 취해주시면 됩니다. 자, 두 분 아이한테 볼 뽀뽀. 우리 아가는 여기 보고.”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유나와 예령도 규원이 카메라를 보게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아우웅.”

규원의 통통한 뺨에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찰나의 순간을 놓칠까 사진작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신부님, 신랑님, 이제 곧 식 시작합니다.”

직원의 말에 태조가 세경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따 봐.”

고개를 끄덕인 세경이 규원의 볼을 톡 두드렸다. 곧 예식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예령도 규원을 데리고 신부 대기실을 나섰다.


“후우.”

뒤늦게 밀려오는 긴장감에 세경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신부 대기실을 나선 세경이 웨딩 로드의 입구에 섰다.

아치형의 꽃장식 아래 선 세경이 제 옆에 선 태조를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자, 세경이 그 위에 손을 올렸다.


“자, 오래 기다렸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신랑 신부, 입장!”

사회자석에 있는 우현이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을 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은은한 피아노 선율이 홀 안에 울려퍼졌다. 태조가 세경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갈까?”

“네.”

씩씩하게 대답한 세경이 꽃길처럼 늘어진 붉은 융단 위로 태조와 함께 걸어 나갔다.


 
- 충동의 대가 본편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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