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외전 (4) -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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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외전 (4) - Ever after
2023.07.15.
태조가 테이블에 놓인 반지들을 훑어보았다. 조만간 규원을 데리고 제주도에 내려가려던 차, 장모님께 드릴 선물을 고르는 중이었다.
“다른 상품도 보여드릴까요?”
태조가 섣불리 물건을 고르지 못하자 성 매니저가 물었다.
“음, 장모님이 착용하실 거라. 화려한 것보단 평소에도 할 수 있을 만한 거로 봤으면 하는데요. 주로 카페에 계시니깐 반지보단 목걸이나 귀걸이도 좋을 것 같고.”
“그럼 평소에도 하기 좋은 심플한 스타일로 몇 가지 가져와 볼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상품을 가지고 오겠다며 성 매니저가 자리를 비웠다. 태조는 커피를 마시며 상자에 담긴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하나 사갈까.”
태조가 반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요즘 세경은 일할 때 외에는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규원이 안겨 있을 때 반짝이는 것만 보면 죄다 손에 쥐고 잡아당기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엔 두 사람의 결혼반지까지 탐내느라 세경의 네 번째 손가락을 꽉 쥐고 놓지 않기도 했다. 목걸이나 귀걸이를 잡아당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다 규원이 펜던트에 긁혀 상처가 나자 얼마나 속상해했던지.
“이번 건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네.”
태조는 곧 도착할 세경의 선물을 기다리며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때 룸 밖으로 나갔던 성 매니저가 고급 상자에 담긴 상품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거 한번 보세요. 요즘 어머님들이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시더라고요.”
성 매니저가 상품들을 테이블 위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태조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세트로 나온 물건들을 세세히 살폈다. 그리고 정란에게 제일 잘 어울릴 법한 것을 하나 골랐다.
“이게 좋겠네요.”
***
갤러리 화온의 통창으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마 여사는 커피를 마시며 멀찍이 앉은 한 여자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방 여사가 사나운 마 여사의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예령을 건드렸다 한 방 먹은 뒤로 따로 모임을 만든다 하더니. 결국 본인이 주도한 모임이 와해되자 이 자리에 다시 참석하고 있었다.
“어머나, 반 관장 임신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지금 몇 개월인 거예요?”
낯익은 여사님의 물음에 예령이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 6개월 돼가요.”
“6개월? 근데 이렇게 배가 많이 나왔어요?”
“쌍둥이라 그런가 봐요.”
예령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예령과 윤조에게 찾아온 아이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세상에. 쌍둥이? 성별도 알아요?”
“네. 둘 다 남자라고. 그래서 그런지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둘이 아주 배를 얼마나 차대는지.”
예령이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반면 그 말을 듣고 있던 방 여사의 얼굴은 김이라도 뿜을 듯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었다.
며느리에게 아들의 외도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 아들은 이혼까지 당했고 손주는 일 년에 손에 꼽을 만큼 보는 게 전부였다.
따지고 보면 제 아들의 외도 사실이 알려진 것도 예령이 일부러 사진을 흘린 탓이 아닌가.
남의 가정은 파탄 내놓고, 저는 저렇게 행복하단 얼굴로 웃고 있으니 방 여사는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쌍둥이면 더 조심해야겠어요. 몸도 더 무거운데, 이런 자리에 와도 되는지 괜찮은지 모르겠네.”
방 여사가 샐쭉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저 사람은 또 왜 저러나?
방 여사를 보며 혀를 쯧쯧 찬 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한 채 마 여사에게 말했다.
“여사님은 좋으시겠어요? 둘째 며느리에 손자도 보시더니. 올해도 좋은 소식이 있으시고.”
“그러게요. 저희도 사진으로 봤는데. 손자가 아주 귀엽던데요? 근데 작은 며느리는 모임에 안 데리고 오세요?”
“세경이가 좀 바빠야지. 안 그래도 얼마 전까지 드라마 촬영한다고 정신이 없었거든. 오늘은 시간이 되면 온다고 했는데.”
마 여사가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렸다. 오전에 짧은 스케줄을 마친 세경이 태조에게 들렀다가 온다고 했었다. 같이 식사를 하는 건 무리일 것 같고, 태조와 점심을 먹고 난 뒤 시간이 나면 여기에 잠깐 오라고는 했는데.
“어머, 저기…….”
그때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누군가가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마 여사의 시선이 아이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갤러리 문이 열리며 하늘색 꼬까옷을 입은 규원이 들어왔다.
“할무니이…….”
규원이 마 여사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팔을 뻗자 규원이 도도도 달려와 마 여사에게 답삭 안겼다.
“우리 강아지 왔어?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오고 있으면 나한테 연락을 하지.”
규원의 뺨을 쓰다듬은 마 여사가 세경에게 말했다.
“규원이 챙기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태조는? 여기까지 안 데려다줬어?”
“네. 일이 있어서요.”
세경이 싱긋 웃었다. 예령이 이쪽으로 오려고 하자, 세경이 마 여사와 함께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규원이 왔구나. 아빠 만나고 왔어?”
규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령이 말랑한 볼을 툭툭 건드리며 세경을 바라보았다.
“동서도 뭐 마셔야지.”
“전 괜찮아요. 여기 오기 전에 커피 한잔 마셨거든요.”
예령에게 대답한 세경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밥은 먹었니? 태조가 오늘 너 선물 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이랑 먹고 왔어요. 선물도 받았고요.”
“무슨 선물 받았어요?”
예령이 눈을 반짝거렸다. 나흘 전, 같이 식사를 했을 때 태조만 선물을 가져오지 못했다며 나중에 주겠다고 했었다.
“음, 이거요.”
세경이 손에 든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쭉 뺀 예령이 테이블에 놓인 물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와, 못 가져올 만하네.”
세경이 내려놓은 건 엠블럼이 선명하게 박힌 차 키였다.
“규원이 데리고 다니려면 차도 튼튼한 게 좋겠다고 해서.”
“그래서 네가 그 차 끌고 온 거니?”
“네. 그이가 카시트도 다 준비해 놨더라고요.”
규원이 테이블에 놓인 차 키를 보자 손을 파닥거렸다. 마 여사가 앙증맞은 손을 잡아 쥐고 규원을 말렸다.
“우리 강아지는 집에 있는 자동차 타자. 저건 지금 너한테 무리야.”
“챠챠아!”
규원이 발을 바동대며 소리치자 사람들이 웃었다. 규원도 그런 여사님들을 보며 방긋거렸다.
“얘 웃는 것 좀 봐. 제 엄마를 쏙 닮았네.”
사람들이 규원을 보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마 여사가 있는 테이블로 사람들이 모인 반면, 방 여사의 테이블은 사람들이 빠져 텅 비어 있었다.
***
제주도 푸른 바다에 노을빛이 섞여들었다.
정란은 진열대에 놓인 트레이를 정리하면서 문 쪽을 힐끗거렸다. 딸과 사위, 손주가 오는 날이라 정란의 마음은 다른 때보다 들떠 있었다.
“사장님, 그냥 밖에 한 번 나갔다 오세요.”
“아니. 조금 전에 전화하지 않으셨어요?”
“5분 전에 했어. 지금 오고 계신다고 하더라.”
거북이처럼 묵을 쭉 뺀 사장님을 보며 직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란은 제가 그렇게 조급했나 싶어 머쓱하게 웃었다.
“너네들은 일 안 하고 나만 보고 있니?”
“일하면서 가끔 보는 데도 사장님은 계속 문 쪽만 보고 계시더라고요.”
“요 녀석들이 진짜.”
자신을 놀리는 말에 정란이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정란과 카페 직원들은 가족처럼 친한 사이였다. 정란이 워낙 자기 사람들을 잘 챙기는 터라,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만둔 친구들도 그녀를 보러 종종 카페에 찾아오곤 했다.
“어? 저기!”
그때 카운터를 지키던 직원 하나가 문 쪽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정란의 고개가 그에 반응하듯 휙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나, 세경은 아니었다.
“…….”
정란이 뚱한 얼굴로 흘겨보자, 그 시선을 슬쩍 피한 직원이 변명하듯 내뱉었다.
“……손님 오셨다고요.”
정란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한편으론 좀 진정하라며 저를 놀리는 녀석들이 좀 귀엽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딸랑, 울리는 종소리에 정란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엄마!”
세경이 정란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 선 태조는 규원을 안아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느라 고생했네, 우리 딸.”
정란이 단숨에 달려가 딸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태조를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 서방도 어서 와. 그동안 별일 없었지?”
“네. 어머니도 어디 아픈 데 없으시죠?”
“나야 늘 건강하지. 우리 규원이 할머니 얼굴 안 잊었으려나?”
정란이 손뼉을 치곤 규원에게 팔을 뻗었다. 영상 통화를 자주 한 덕분인지 실제 보는 건 오랜만인데도 규원은 정란을 보며 헤, 웃었다.
“우리 손주, 할머니한테 안겨 볼까?”
규원이 짧은 팔을 파닥거렸다. 태조는 정란의 품에 조심스럽게 규원을 안겨주었다.
“우리 규원이 많이 컸네? 전보다 무거워졌는걸?”
“무거?”
“오구, 이제 말도 잘하고.”
정란이 제 말을 따라 하는 규원이 귀엽다는 듯 뺨에 입을 맞췄다.
“세경이 너 점심은 언제 먹었니? 엄마가 여기 김 사장님 식당에 예약은 해뒀는데. 지금 저녁 먹기엔 좀 이르지?”
“몇 시로 예약했는데?”
“6시로 잡아뒀는데. 진 서방 배고프다 하면 시간 좀 당겨보고.”
정란이 어떻게 하겠냐는 듯 태조를 바라보았다. 세경의 시선도 엄마를 따라 태조에게 향했다.
“조금 쉬었다 가죠. 시간도 남았으니, 저흰 여기 앞에 바닷가라도 다녀오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아, 그 전에 마실 것부터 줘야지. 두 사람 뭐 마실래?”
“나는 커피요. 아이스로. 당신은요?”
“저도 세경이랑 같은 걸로 주십시오.”
“규원이는? 우리 강아지는 우유 좀 데워줄까?”
정란이 규원을 보며 물었다. 우유란 말을 알아들은 건지, 규원이 웅!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저기 창가 쪽에 앉아 있어. 음료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줄게. 참, 바닷가는 요기 카페 앞쪽에 길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내려가면 되고. 세경이 너 길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지.”
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란은 잠시 기다리라며 세경에게 규원을 건네주었다.
“규원이 이리 줘.”
정란이 직접 커피를 내리려는 듯 조리대 안쪽으로 들어가자, 태조가 세경의 품에서 규원을 데리고 갔다.
카페 안을 두리번거린 세경은 태조의 손을 잡고 빈 테이블로 향했다.
“아기 의자 가져다드릴까요?”
직원이 다가와 묻는 말에 태조가 괜찮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세경은 저를 보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 뒤 태조에게 말했다.
“규원이 안고 있으면 커피 마시기도 힘들 텐데.”
“괜찮아. 규원이가 거기 앉는 거 싫어하잖아.”
태조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장난을 치자, 방긋 웃은 규원이 아빠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저런, 손님들이 알아 봐서 어쩌나?”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은 정란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빵도 같이 가져오긴 했지만, 몰려드는 시선에 두 사람 다 제대로 뭘 먹지도 못할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먹다가 바깥에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요, 엄마. 우리 요 앞에 들렀다가 식사 전에 들어올 테니까.”
“드떠와!”
규원이 세경의 말을 따라 하며 발을 바동거렸다. 정란이 혀 짧은 소리에 웃음을 터트렸다.
“규원이도 나갔다 들어올 거야?”
“우웅!”
정란이 통통한 뺨을 살짝 꼬집었다. 손자의 재롱을 넋 놓고 보고 있던 정란이 세경에게 말했다.
“두 사람 다 커피 마시고 나갔다 와. 이건 내가 치울 거니까, 다 먹으면 그대로 두고.”
“그럴게요. 엄마, 저기 손님들 몰린다. 어서 가 봐.”
세경이 카운터를 보며 정란에게 눈짓했다. 태조는 미지근해진 우유를 규원에게 먹이며 틈틈이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태양이 서서히 바다 아래로 가라앉을 무렵.
규원을 안고 나온 태조가 모래사장 위에 아들을 내려놓았다. 발이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게 재밌는지 규원이 방방 뛰었다.
“마아아아!”
규원이 한발 뒤에 물러서서 두 사람의 모습을 찍고 있는 세경을 불렀다.
엄마에게 가려고 한 발, 한 발 내딛던 규원이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자 태조가 아이를 쑥 안아 올렸다.
“…….”
동그란 규원의 눈이 태조를 보며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세경이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풋. 완전 둘이 똑같아.”
화면에 뜬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세경이 웃었다. 그러자 세경에게 다가온 태조가 그녀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왜 우리만 찍어. 같이 찍어야지.”
태조가 핸드폰을 들자, 세경이 자세를 잡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태조가 세경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는 순간.
찰칵.
단란한 세 가족의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