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016화
대한민국에서 재벌 3세는 특별한 존재였다.
못 사는 나라에서 태어나, 스스로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됐기에, 서민인 시절을 경험해본 재벌 1세.
서민을 경험해본 재벌 1세 아래에서 자라고, 재벌 1세와 함께 치열한 현장에서 그룹을 일궈낸 경영진들의 교육을 받으며 다소 거친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했던 재벌 2세.
위의 두 세대와는 달리 대한민국에서 재벌 3세란 태생부터 성장과정 전체가 특별대우 그 자체였다.
번석그룹 총수인 변호수 또한 전형적인 재벌 3세중 한 명이었다.
태어난 이래로 기억이라는 게 존재한 시절부터 주변 어른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고 굽신거렸다.
그런 그에게 어른이라는 존재는 자기 아랫사람에 불과했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신분이라는 개념을 배운 호수는 여자 또한 신분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여자란 존재 중 절대다수는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떠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리고 호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극 소수의 호수와 맞먹으려 드는 여자보다는, 차라리 아양 떠는 여자가 호수는 맘에 들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그런 호수의 눈에 어떤 여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장난감이라 생각하고 대했다.
그의 기준에서, 적당히 예뻤고, 적당한 심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적당히 그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호수는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생동안 옆에 마네킹을 하나 세워둬야 한다면, 크게 모난 부분 없이 두루두루 괜찮은 이 여자를 세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생각이 든 것이었다.
가윤은 딱 적당한 마네킹이었다.
“응? 대답해봐.”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지금까지 어떠한 마네킹도 이렇게까지 주제 파악을 못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이었지만, 현수는 그의 눈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볼 수 있었다.
“나도 딱히 아쉬울 건 없는데, 기분이 좀 많이 나쁘네?”
아까 스폰서들이 뱉은 말보다 훨씬 순화된 대사였지만, 말에 담긴 무게감이 남달랐다.
그는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가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선, 표정만으로도 현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나머지 세 명 못지않게 화가 나 있는 것을.
인터넷에서 재벌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연예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우라가풍겨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사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고, 티만 내도 알아서 기는 존재니까, 저렇게 행동하는 습관이 든 것일 터였다.
직접적인 시선을 받지 않는 현수가 느끼기에도 이럴진대, 직접 그 눈을 마주하고 있는 가윤이 느끼는 심적 압박이 어느 정도일진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때 변호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 잘 듣는 괜찮은 마네킹인 줄 알고 아껴줬는데….”
변호수는 생각하기에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뒤통수를맞을 줄 몰랐네?”
가윤이 뭔가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뱉지는 못했다.
그것을 보더니 변호수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넌 그렇게 상황 파악할 줄 알고, 눈치도 꽤 빠른 사람이었어. 그래서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했던 거고.”
그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호수 씨…. 제 말…. 제발….”
간신히 뱉은, 짧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간절함이 짙게 베여있었다.
그 말을 들은 변호수가 가윤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 너도 하고 싶은 말이야 많이 있겠지.”
그 말에 가윤이 서둘러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런데 곧이어 변호수가 한 말은 가윤은 다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근데 무슨 말을 들어도 난 벌써 어떻게 할지 결심했어.”
그 순간 가윤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변호수는 그 자세 그대로, 잠시 동안 서 있었다.
가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변호수는 가윤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나한테 이렇게 대한 여자는 처음이라고 잘 될 거라는 생각한 건 아니지?”
호수는 가윤에게 싱긋 웃어주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밖으로 사라질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본 현수는 짧은 시간 속으로 저 남자를 이용할 방법을 떠올렸다.
가윤은 변호수가 사라지고 난 이후 계속 혼이 다 빠진 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세 명의 스폰서들에게 당차게 내뱉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이렇게 미래의 신데렐라를 꿈꾸던 한 여자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현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한 편의신파극의 여운을 느끼며 마지막 크레딧을 보듯 가윤과 세 남자를 봤다.
처음에는 가벼운 복수 정도로 생각했던 행동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만들어진 결과는 한 사람 인생의 파멸이었다.
머릿속 계획상으로도 당연히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계획을 세운 지 오래였다지만, 막상 눈앞으로 망가진 가윤을 보고 있자니 현수는 심경이 복잡했다.
하지만 현수는 그 복잡한 심경 속에서, 인정하기 싫지만 짜릿함이라는 감정이 더욱 컸다.
망가져 버린 가윤의 모습은, 현수에게 상상 이상의 정서적 쾌감을 줬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조차 또 가윤을 괴롭게 만들고 싶었다.
이미 가윤은 잠깐 사이에 자신이 붙들고 있던 줄들이 가차 없이 끊어져 나갔다.
그러나 가윤에게는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마지막 줄 하나가 남아있었다.
현수는 정신이 나가 있어서 잊고 있는 가윤에게 상기시켜줘야 했다.
스스로 떨어져 나간 줄이 아닌 그녀가 내팽개치려 했던, 그녀가 진심으로 아꼈던 마지막 줄.
“이거였어요?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가.”
현수의 말에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던 가윤의 고개가 스윽 들렸다.
텅 빈 눈동자가 현수를 바라봤다.
그리곤 비어있던 눈동자에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현수야….”
눈물과 함께 그녀의 눈에서 약간의 희망이 엿보였다.
아직 그녀에게 자신이 남아있어 줄 거라는 약간의 희망.
현수는 자신이 망가뜨려 놓은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짜릿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허탈하고 슬픈 표정을 지은 채 현수는 말을 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서요. 이제 와서 제가 필요한 건 아니죠…?”
가윤은 그런 현수의 표정과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할 힘도 사라져 보였다.
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조금 더 응시하더니, 조용히 몸을돌려서 호텔 밖으로 떠났다.
가윤은 그렇게 터덜터덜 지친 발걸음으로 원래 함께 나가기로 했던 문을 나서는 현수를 보며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 . .
현수는 짜릿한 쾌감과 안쓰러움의 복잡한 심정이 가슴을 휘젓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걸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 안 갔겠지?’
점점 현수의 발걸음이빨라졌다. 처음에는 빠른 걸음이던 것이 나중에는 달리기로 변했다.
그렇게 현수는 호텔 발렛파킹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외제차들 사이에서 최신형 외제차 한 대가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 옆에는 문을 열려고 하는 변호수가 서 있었다.
현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잘못되면 큰일인데.’
찍혔을 때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될 것인지 제대로 겪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 자신은 여자 문제로 안 좋게 엮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열고서 차에 몸을 실으려는 것을 본 순간, 딱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니면 다신 기회가 안 온다.’
현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잠시만요.”
차에 반쯤 몸을 실은 변호수가 고개를 돌려서 현수를 봤다.
그리곤 이내 현수를 알아본 변호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뭐지?”
현수는 호수에게 임팩트있는 첫인상을 심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받으신 문자, 제가 보낸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변호수는 잠깐 침묵하더니 잠시 후,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그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낀 현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뭐, 지금 감정이야 되게 짜증 나시겠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신다면 제가 큰 도움 드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술 한 잔 얻어 마실 자격은 되는 것 같은데요.”
이번 대답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변호수는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가 반대편 차 문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타.”
현수가 변호수를 따라 도착한 곳은 청담 어딘가의 바였다.
그리고 그곳의 마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변호수가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다가와서 그를 맞이해주었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 으리으리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알아서 세팅해줘.”
“네.”
마담은 미소를 잃지 않고 공손히 인사를 하고서 나갔다.
그 직후 변호수가 현수를 바라보며 무언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방문에 노크를 했다.
“어.”
변호수가 대답을 하자 정장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는 손에 서류 봉투를하나 들고있었다.
사내는 현수를 보더니 그를힐끔거리며 변호수의 눈치를 봤다.
“괜찮아. 말해.”
변호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가 변호수에게 서류 봉투를 건넸다.
“말씀하신 결과입니다.”
“그래. 두고 가.”
그렇게 말하려 변호수는 서류 봉투를 소파 구석에 휙 하고 던졌다.
사내는 그것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숙이고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이번엔 또사내가 나가기가 무섭게 마담과 웨이터가 술상을 들고 왔다.
으리으리한 데코레이션의 술상이 테이블에 깔렸다.
변호수가 양주병을 따더니 그에게 내밀었다.
“술 마시고 싶다며?”
현수는 잔을 들었다.
병 하나만 팔아도 서민들 일당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비싸 보이는 위스키가 현수의 잔을 채웠다.
현수는 자신의 잔이 채워지자 병을 건네받고서 변호수의 잔을 채웠다.
잔을 채우며 슬쩍 의중을 심을 말도 섞었다.
“상무님과 술자리 가지고 싶었죠.”
“조사 좀 했네?”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현수는 지금부터가 예민한 살얼음판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직감했다.
변호수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 변호수의 경계심을 사게 된다.
호기심을 최대한 사면서, 경계심을 최소한을 사는, 그 경계선. 그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밟아야 했다.
“비에스 화학의 이차전지 부분 상무, 그전에는 비에스전자 파운드리 사업 팀장님으로 지내셨고, 그룹에서 해결사로 유명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던 변호수가 현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려 보이는데 생각보다 세상 공부를 꽤 많이 했나 보네.”
칭찬 같아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그에게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수는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비에스에는 관심이 많아서요. 아마 이번에 이곳에 오셨다는 거면 정말로 비에스에서 전장사업에 본격적으로 나간다는 거겠죠? 어쩌면 자체 육성이라기보다는 합작회사나 인수겠군요.”
현수는 술을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엘 패키지 같은 회사는 비에스가 먹는 순간 시너지가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그 순간 변호수가 고개를 돌려서 현수를 바라봤다.
일 년만 지나고 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보일 터였다.
현수는 이 정보가 변호수의 흥미를 약간이나마 끄는 데 성공했다는 걸 직감했다.
“진짜 우리 그룹에 관심 많나 보군. 너 전공이 어디야?”
“의대생입니다.”
“이 정도 관심이면 공대나 가지. 주식이라도 하나?”
변호수는 아직까지도 똘똘한 대학생을 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공대가 아니라 법대를 갈 걸 그랬습니다.”
“법대?”
현수가 방금 두 가지 지식 자랑을 한 건, 바로 다음 멘트를 치기 위한 밑밥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상무님이 비에스 화학 비자금 문제 청소하시는 거 도와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수가 그 말을 뱉은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려던 변호수의 행동이 살짝 멈칫거렸다.
“깐깐한 유럽으로부터 기업결합 심사 통과 받으시려면, 적어도 이차전지 사업부만큼은 회계 장부 깔끔하게 세탁하셔야 하잖아요.”
순간변호수가 현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와 눈을 맞춘 순간 현수는 자연스레 긴장이 올라왔다.
현수는 최대한 평온한 척 연기를 했다.
“VIP 손님들 많이 상대하시는 교수님들이 우리나라 기업 운영에 대해서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스타일인 것 아닌가요?”
그러자 잠시 후 변호수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걸 믿으라고?”
“제가 똑똑해서 잘 알아듣는 면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 여자를 아예 등신 만들어 버리는 게 우연은 아니었네.”
“네뭐, 자기 자랑 좀 하자면 완전히 설계였습니다.”
변호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터트렸다.
“나 원.대학생 놈이랑 여자 두고 싸우질 않나, 그놈이랑 술을 마시질 않나. 오늘 참 골 때리는 날이군.”
“그런 하루를 보내시는 덕에 저한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죠.”
“욕심도 안 숨기네. 그래. 바라는 게 뭔데?”
현수는 몸을 조여오는 긴장감을 견뎌내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상무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