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027화
효주는 현수와 대화를 통해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깨달았고, 한석과 어긋난 부분을 고치려고 했다.
‘한석아. 어젠 내가 너무 예민했었나 봐.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하고 얘기했어.’
효주는 이번에도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
‘아니야. 나도 너무 예민했었어. 미안해 효주야.’
한석도 같이 사과를 해왔지만, 그의 표정은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더는 한석과 다투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는 일상 얘기를 하며 순조롭게 대화를 이어나갔고, 효주는 이렇게 끝을 맺을 줄 알았다.
‘너 그때 현수 옷에다 토하고 난리였잖아.’
효주는 평소처럼 한석에게 까르륵대며 얘기를 이어나가던 중 주제가 잠깐
‘근데 효주야 요즘 현수랑 되게 친하게 지내나 봐?’
현수로 빠져나갔을 때였다.
한석이 표정이 약간 굳으며 효주에게 말을 건넸다.
‘저번에 그 일 이후로 그냥 가끔 연락 정도 하고 지내는 사이야. 걱정 안 해도 돼.’
효주는 현수의 말대로 혹시나 한석이 질투심에 또 짜증을 낼까 그를 안심 시키려 했다.
‘음…. 근데 걔도 좀 이상한 거 같아. 아무리 그래도 그거 한 번 도와줬다고 무슨 10만 원을 넘는 음식을 먹냐.’
갑자기 현수의 뒷담화를 하는 한석.
효주는 한석의 또 다른 모습에 약간 실망감이 들고, 묘하게 기분이 나빠 왔지만, 같이 호응해 주기로 했다.
‘그렇긴하지. 나도 그렇게 많이 나올줄 몰랐어. 그래도 나도 맛있게 먹었고, 돈도 챙겨줬잖아.’
효주가 한석의 말을받아주자 한석이 표정이 밝아지며 계속해서 현수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현수 걔 내가 봤을 때 좀 이상한 거 같아. 저번에 조교쌤이랑 데이트도 하고 다음 날 다른 여자애랑 모텔에서 나오는 거 같던데.’
효주는 계속되는 뒷담화에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닌 거 같은데 자꾸 현수를 까내리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한석은 분명 누구 욕을 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효주를 좋아해서 나오는 질투심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며 참아 보기로 했다.
‘아 진짜? 하긴 현수 생긴 거 보면 여자가 없을 리가 없긴 한데, 그래도 여러 명 만나는 건 좀 충격이긴 하네.’
‘그치? 나도 얼떨결에 봐서 그냥 잘못봤겠지 싶었는데 너한테 하는거 보니까 진짜 이 여자 저 여자 다 만나고 다니는 애인가봐.’
효주가 계속 한석의 말을 받아주자 신이 났는지 한석이 선을 넘는 발언을 했다.
한석이 말하는 이 여자 저 여자가 자신을 말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자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효주는 그냥 실언을 한거라 생각하고 여기서 한석의 말을 끊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게. 근데 한석아 현수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효주가 말을 끝내자마자 한석이 인상을 쓰며 했다.
‘왜? 기분 나빠?’
효주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한석의 표정을 보아하니 잘 들은 것 같았다.
‘뭐라고?’
‘아니, 같이 얘기 잘하다가 왜 그만하자는 거야? 현수랑 뭐 있어?’
한석은 진심으로 같이 욕하고있다가 급발진하는 효주를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가 막혀왔다. 지금 자신이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 모르는 것도, 나를 의심하는 것 같은 태도도.
효주는 더 이상 참지못하고 소리치듯 말했다.
‘그럼 뒷담까는게 잘하는거야? 너 이런 사람이었어?’
한석은 순간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거렸지만, 이내 표정이 굳어지더니 효주에게 큰소리로 내뱉었다.
‘난 그냥 있는 사실대로 말한 거뿐이야. 그리고 네가 왜 갑자기 짜증 내는지 모르겠어. 애초에 내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연락을 끊어야 되는 거 아니야?’
효주는 큰소리로 쏘아대는 한석을 보자 머리가 새하얗게질리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분명 화해하고 평소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자신은 참을만큼 참았다고 생각했고 지금 자신에게 큰소리를 치는 한석이 너무 밉고 서운했다.
작지만 분명 우리를 도와준 친구에게 밥 한 끼사주고 그냥 대화 좀 했을 뿐인데 자신을 의심하는 게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속으로는 계속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감정을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저번부터 나 의심하고 있어? 내가 현수한테 넘어갔을까 봐?’
‘아니, 그런게 아니라…. 진짜 그런 뜻은 아니었어.’
한석은 효주가 정색하며 말하자 갑자기 수습하려 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만해야되나 싶었지만, 서운하고 밉고 억울한 복합적인 감정들에 효주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효주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됐어. 난 지금까지 내가 충분히 믿음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네가 날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겠어.’
한석은 효주의 눈물에 굉장히 당황한 듯 횡설수설했지만, 효주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효주는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고,
한석의 팔을 뿌리치고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곧장 돌아갔다.
* * * *
‘와. 남한석이 봤을 줄이야. 세상 좁네. 사려야 겠다.’
효주의 말을 들으며 현수는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가윤과 지희를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그렇게 됐어. 그 자리에서 풀었어야 했는데, 자꾸 눈물이 나서 도저히 있고 싶지 않더라.”
효주는 아직도 한석을 두고 그냥 집으로 간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마. 한석이도 지금 네 걱정밖에 안하고 있을거야. 근데 혹시 아직 연락 안왔어?”
효주는 현수의 말에 휴대폰을 잠시 보더니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응…. 아직 연락이 없네. 많이 화났을까?”
효주는 여전히 한석과의 사이가 멀어질까봐 걱정이 많은 듯했다.
‘나 때문에 싸운 거면서 그렇게 걱정되는 애가 또 나를 찾아와?’
현수는 속으로 의아함이 느껴졌다. 효주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보였다.
‘생각해보니까 매번 내 말을 그대로 따르긴 했지.’
원래 현수는 이쯤 되면 효주에게 연락이 안 올 줄 알고 있었다.
한석이 남자 문제에 예민한 것을 알고 있었고, 분명 오늘도 자신 때문에 싸울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자신이 효주에게 다가가 상담을 진행하려 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연락이 먼저 온 것이다.
‘말 들어보면 분명히 나 때문에 싸운 거 맞는데…. 나한테 감정이 벌써 생긴 건 절대 아닌 것 같고. 뭐지…?’
물론 현수는 효주가자신을 ‘상담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의존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인식할 수 있게끔 유도할 계획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현수의 예상보다 몇 배나 진도가 빨랐다.
그저 몇 번 이야기를 들어준 게 전부였는데 이미 효주는 현수에게 의존성이 생겨버렸다.
‘좋긴 한데...’
“화는 안 났을 거야. 네가 울면서 가서 지금안절부절못하면서 연락 기다리고 있을걸?”
현수의 말에 안심이 됐는지, 한숨을 푹 내쉰 효주는 현수에게 하소연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석이가 널 너무 맘에 안 들어 하는 거 같은데, 현수 너밖에 이런 얘기 할 곳이 없어.”
그 말을 들은 현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알고 있는 효주의 성격대로라면 진즉에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했을 거다.
그런데도효주는 지금 현수에게 괜한 얘기를 해서 사이가 멀어질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수는 효주가 굉장히 수동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이런 애였나?’
현수가 기억하는 효주는 결혼 전까지 한석과 한 번도 다투지 않을 정도로 남자관계도 확실하고 이해심이 많아 보였었다.
현수는 한석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자신과 관계를 확실히 하지 않는 효주가 의아했다.
‘확실한 건 효주는 아직 나한테 호감이 가는 수준에 머물러있는 거고, 나한테 나쁜 상황은 절대 아니라는 거지.’
원래의 계획보다 약간 틀어졌지만, 절대 나쁜 방향은아니었기에 이틀 뒤 엠티를 생각하며 효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원래 남들 상담을 엄청 잘해줘서 그런가 보다.지금 네 상황은 남들도 다 겪으면서 지나가는 상황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안 싸우는 커플이 어디있어.”
현수의 말을 들은 효주가 약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겠지? 남들 다 겪는 건데 나만 유별나게 이러나 봐. 이 상황을 다들 어떻게 해결하는지 신기하네.”
“네가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래. 오래 만나거나 사귄 경험 많은 사람들 보면 엄청 흔한 일이라서 감흥도 안 올걸? 이 정도로 사이가 갈라지는 거면 헤어져야지.”
현수는 효주와 한석이 헤어지지 않을 걸 알고있었다.
효주에게 엄청난 집착을 보이는 한석과 의존하는 성향이 강한 효주가 겨우 이걸로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수는 둘 사이가 끝나는 걸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현수가 원하는 것은 한석과 계속 사귀는 상태에서 효주와 만나는 것이다.
그는 효주와 사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면 효주가 상대하기 지극히 쉬워빠진 남한석의 여자친구로 남아있는 게 제일 좋은 그림이었다.
‘거기다... 자극적인 그림도 조금 땡기기도 하고...’
현수는 전생에 그 지고지순했던 효주가 이번 생에서는 자신와 바람을 피게 된다는 상상을 하자 짜릿함이 올라왔다.
깨끗한 사람을 타락시키는 느낌이었다.
“현수야, 그럼 남들은 이 상황에서 보통 어떻게 해?”
“음…. 내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계속 대화로 푸는 거 같은데. 효주 너는 지금까지 매번 싸울 것 같으면 피하기만 했잖아.”
현수는 효주와 한석의 사이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효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리고 한석이가 질투심이 꽤 많은 성격인 거 같으니까 앞으로 내 얘기는 자제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현수의 조언에 뭔가를 깨달은 듯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래야겠어.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한석이랑 사이 안 좋아진 거 같아서 속상하네. 현수 넌 엄청 좋은 사람이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 한석이도 좋아할 거야.”
“아냐, 난 그냥 너희둘이 계속 잘 지내기만 하면 좋을 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번엔 진짜 꼭 풀고 와.”
현수는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효주를 응원했다.
“응 이번엔 진짜 꼭 화해하고 올게.”
효주는 감동받은 표정을 지으며 현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 * * *
효주는 현수의 조언대로 오늘은 한석과 무조건 화해를 하고 말 생각이었다.
‘싸우더라도 무조건 끝까지 대화로 풀라고 그랬지?’
효주는 한석이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한석아, 어디야?”
-나 지금 수업 마치고 나가고있어.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어.
한석은 전화기 속 목소리만으로도 뚱한게 느껴질 정도였다.
효주는 화해가 쉽지 않겠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최근 들어 한석과 너무 많이 싸우기도 했고, 이대로 가다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는불안감이 불쑥불쑥 올라왔기에오늘은 무조건 풀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잠시 후.
효주는 한석이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침에 싸우며 울었던 감정이 갑자기 올라오며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쓸어내리고 한석을 웃으며 반겼지만, 그 모습은 다른 사람이 봤다면 너무 어색하다고 놀릴게 분명했다.
“어, 왔어?”
효주의 어색함을 느낀 한석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응…. 무슨 일이야?”
항상집을 데려다주던 한석이 저렇게 물어오자 기분이 약간 상하는게 느껴졌다.
“집에 가야지. 나 안 데려다주려고?”
순간 감정이 약간 튀어나와서 약간 쏘듯이 말해버렸다.
“아냐, 데려다 줘야지 가자.”
한석도 효주가 약간 감정이 상했다는 걸 느꼈는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냥 넘어 가기로 했다.
효주는 한석과 걸으면서 뭔가 불합리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화해하려고 노력하는데 한석은 그저 자기 기분만 생각하고 날 챙기려는 느낌이 들지가 않았다.
효주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둘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러 넘쳤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누가 봐도 다정하고 예쁜 연애를 하고 있어서 지금 모습을 보면 전혀 다른 커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효주도 어색한 기류를 느끼고 한석에게 말을 먼저 꺼내려고 하던 찰나에 한석이 먼저 말을 건냈다.
“효주야 난 사실 네가 왜 울면서 그렇게 갔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